부산 이바구

'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하> 희망의 가교

금산금산 2014. 2. 8. 12:44

 

'신 영도다리'…[만남과 부활] <하> 희망의 가교

마주한 '세월의 강' 너무 멀었지만 '건널 수 있는' 희망도 봤다

20대 대학생 "평화통일 원하면 국가연합으로 가야죠"

70대 피란민 "그러다 '빨간 물' 들면 안 지워져"

 

 

 

지난달 29일 오후, 김우성(왼쪽부터) 씨, 주기덕 씨, 이기활 씨, 강지연 씨가 팔짱을 끼고 영도다리 위를 나란히 걷고 있다. 백한기 기자 baekhk@kookje.co.kr

 

◇ 소중한 만남

- 피란민 부부·남녀 대학생
- 영도다리 지척서 4시간 이야기

◇ 통통 튄 대화

- "강요 마세요" - "알지도 못하면서"
- 정치·통일관 두고 분명한 시각차

◇ 하나된 감동

- 피란시절 아픈 사연 나누며
- '다름' 존중…서로에게 귀 기울여

◇ 다음을 기약

- "좋은 공부했어요"…"꼭 다시 보자"
- 닫혔던 마음 열고 반성과 격려


'80세와 두 달배기'.

영도다리의 나이를 측정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탄생연도(1934년)로 따지면 영도다리는 올해 80세의 '늙은이'다.

 

 하나, 지난해 11월 말 다시 들어 올려진데 초점을 맞추면 아직 두 달여밖에 안된 '어린아이'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다리를 바라보는 두 시선이 스며들어 있다.

근현대사의 온갖 시련을 꿋꿋이 견뎌낸 구세대의 연륜과, 창창한 미래로 당차게 뻗어나가려는 신세대의 싱싱한 혈기가 그것이다.

신·구세대의 상이한 시선은 서로 삼투하며 지혜와 창의가 번뜩이는 '희망의 가교'를 꿈꾼다.


본지 취재팀이 지난달 29일 마련한 70대 월남 피란민 부부20대 남녀 대학생의 만남도 이런 가치를 지향했다.

이기활(79·재부평북도민연합회 회장), 주기덕(여·75) 씨 부부와 김우성(24·한국해양대 조선공학과 2년), 강지연(여·23·동아대 영어영문학과 3년) 씨가 그 주인공들.

이들은 이날 영도다리를 지척에 둔 부산 중구 남포동찻집과 영도구 대평동음식점에서 4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비록 대화 중간중간 세대간 간극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넘을 수 없는 벽'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름'을 존중하고 서로의 주장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나됨'을 넓혀갈 수 있다는 기대를 높였다.

특히 대화가 끝난 직후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영도다리 위에 섰을 땐 그 기대가 확신으로 굳어짐을 느꼈다. 이들은 50년의 나이 차이를 넘어 어떻게 서로에게 다가갔을까.


#  신세대, 구세대에 과거사를 묻다

대화는 신세대가 구세대에게 피란의 시린 사연을 묻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 회장의 고향은 평북 태천.

그는 1951년 1·4 후퇴 때 15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피란왔다.

고향에는 어머니와 4명의 남녀 동생이 남았다.

그의 부인 주 씨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동향이다.

주 씨 역시 1·4 후퇴 때 부모를 고향에 두고 11살의 나이로 오빠·언니·동생과 부산으로 왔다.

이들은 피란 7년 후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강 씨 = 두 분은 피란와 영도다리 인근에서 사셨나요?

▶이 회장=제5육군병원(현 남포동 롯데백화점) 앞 방공호를 빌려 살았어. 지하생활을 한 셈이지. 초기에는 시장을 돌며 남의 짐을 날라주며 밥벌이를 했어. 당시 피란민들은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뚝딱뚝딱 '하코방(판잣집을 뜻하는 일본어)'을 짓고 맨땅에다 대충 등겨를 깔고 살았어. 영도다리에는 늘 사람이 붐볐지. 점바치(점쟁이의 사투리)도 많았어. 험난했던 시절, 워낙 답답하다보니 점을 보려는 사람이 많았던 탓일 거야.

▶주 씨=피란와서 천마산 꼭대기(현 서구 아미동)에 살았는데 영도다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어. 일 나간 오빠, 언니 기다리며 부모님 생각나서 많이 울었지. 가끔 자갈치시장에 가보면 피란민들이 빈 땅에다 새끼줄을 치고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어. 나도 나이가 좀 더 들었으면 콩나물통이라도 갖다 놓고 그렇게 우겨가며 장사했을 텐데….

▶김 씨=영도다리가 다시 들린 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심심해서 놀러 오는 줄 알았어요. 영도다리가 피란민들이 재회하기로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장소였다는 건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우리 세대가 당시 사연을 들을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피란민 어르신들을 초빙해 토크콘서트를 열면 좋겠습니다.

▶강 씨=대환영입니다. 신·구세대가 어울릴 수 있는 무대 설치나 프로그램 개발에 신경을 썼으면 해요.


# 정치·사회관 차이 뚜렷

이 회장 부부의 피란시절 얘기를 들으며 서먹서먹함을 털어낸 이들은 세대론으로 화제를 옮겼다.

▶주 씨=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예의가 없어. 지하철을 타면 전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두드려. 노인이 앞에 서 있어도 말이야. 차 안에서 젊은 남녀가 끌어안고 애정표현하는 것도 눈에 거슬려.

▶김 씨=어른들은 정치적인 생각마저 강요합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라고 말이죠. 우리 할머니는 제가 조선공학과에 진학하는 데 반대가 심했습니다. 사관학교에 가길 원하셨죠.

▶강 씨=저는 비행기 승무원이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은 3D 업종이라며 반대하셨어요. 그 바람에 지금은 금융권 쪽 입사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줬으면 좋겠는데….


세대론에서 드러난 견해차는 지난해 12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안녕들 대자보'를 비롯한 정치·사회문제로 화제가 확대되면서 더 커졌다.

▶김 씨=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취업인데, 정규직은 갈수록 줄어들고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있어요. 철도·의료 민영화도 문제고요. 정부가 잘 하는 건 따라야 하겠지만, 잘못하는 것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게 젊은이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씨=맞습니다. 어른들은 어디에도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 회장=정부가 하는 걸 제대로 지켜보지도 않고 북 치고 징 치며 반대하는 건 잘못된 거야. 이명박 정부 때도 소고기 문제로 촛불 들고 나왔지만, 결국 별 탈 없이 지나갔잖아.


# 통일방식 두고도 논란

이들의 견해차는 통일방식에까지 이어졌다.

통일의 필요성에는 모두 공감했지만, 그 방식과 관련해선 구세대는 남한 중심의 흡수통일을, 신세대는 국가연합제 통일을 각각 주장했다.

▶이 회장=국가연합제는 안 돼. 국가연합제로 통일하면 공산화돼.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해.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빨간물은 한번 들면 잘 안 지워져.

▶김 씨=국가연합제로 가야 합니다. 우리도 동·서독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봐요. 북한의 자원과 남한의 자본이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강 씨=저도 국가연합제가 맞다고 봅니다. 지금 북한의 자원이 헐값에 팔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남북이 서로 양보해가며 공통분모를 추출하려고 노력해야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또 만납시다"

이들은 많은 이견을 보였지만 대화의 말미는 유쾌했다. 서로에게서 배울 점을 진솔하게 인정하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강 씨=어른들과 이렇게 장시간 대화하긴 처음입니다. 대화하다보니 이해할 수 있는 점이 많았어요. 피란시절 체험담을 직접 들었던 건 좋은 공부가 됐습니다.

▶김 씨=평소 기성세대의 생각에 불만이 많았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하다보니 수긍할 수 있는 점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닫혀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주 씨=영도다리에 얽힌 삶과 추억을 젊은이들은 몰라. 모르고 사는 것보다 아는 게 중요해. 오늘 젊은이들 기운 듬뿍 받아 행복하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이 회장=만남, 만남이란 참 좋은 거야. 우리 꼭 다시 보자.

"예, 좋습니다." 젊은이들은 큰 소리로 화답했다. 영도다리가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물리적 기능을 뛰어넘어 세대를 잇는 '희망의 가교'로 승화하는 순간이었다.


■ 신·구세대 소통 모범 사례

- "그깟 나이 무슨 상관이에요"… 힙합 춤추는 할아버지·할머니

   
2009년 4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 주민센터가 개최한 '나이 없는 날' 행사에 참가한 이 지역 노인들이 홍익대 앞에서 젊은이들과 거리 공연을 즐기고 있다. 연합뉴스

영도다리는 신세대의 관심권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매일 정오, 다리를 들어 올릴 때 현장에 가보면 구경하러 온 사람이

대부분 노년층인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영도다리를 신·구세대가 함께 즐기는 소통의 공간으로 가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 마포구 서교동주민센터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개최한

 '나이 없는 날'(no age day) 행사에서 그 모범 답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청년문화의 최고 명소로 손꼽히는 홍익대 주변에서 열린 이 행사는 '나이에 상관 없이 신·구세대가 어울려 놀면서 세대차를 극복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청년 위주의 문화에 밀려 늘 '뒷방 늙은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이 지역 노인들은 이날 하루만큼은 힙합클럽, 인디밴드 공연장 등에서 젊은이들과 똑 같은 놀이체험을 하면서 소외감을 털어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호칭 대신 형, 오빠, 누나, 언니로 불렸으며, 찢어진 청바지에 운동화, 힙합룩, 프린세스룩 등 옷차림도 첨단 청년 패션으로 탈바꿈했다.

첫 행사 당시 서교동주민센터 민원행정팀장을 맡으며 행정적 지원을 했던 안종진 마포구 보건행정과장은

"젊은이 문화 공간 일색인 홍대 주변에는 신·구세대간 문화 갈등이 크다""이 행사가 신·구세대의 소통과 화합을 이끄는 작은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노인영화제'도 신·구세대 소통의 또 다른 모범 사례다.

2008년부터 열린 이 영화제는 애초 노인이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작품 발표회'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2010년부터 출품 주제를 제한하며 노인 이해를 통한 세대 갈등 극복에 역점을 두고 있다.

젊은 감독에게는 주제를 노인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해 노인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도록 한 반면, 노인 감독에 대해선 제한을 두지 않는다.

신·구세대가 동참하는 영화 감상·토론회는 영화제의 기본 프로그램이다.

'노인, knowing'이란 행사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 노인을 이해하려는 의도가 구석구석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제를 기획한 서울노인복지센터 관계자는 "영화제가 관심을 끌면서 청소년의 작품 출품도 쇄도하는 등

젊은층의 참여 열기가 뜨겁다"면서 "올해는 국제영화제로 규모를 키운다는 목표로 영화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 '소통의 광장' 만든 외국 사례

- 다리가 잔디밭으로… 강변이 바닷가로

   
2008년 8월, 프랑스 파리 센 강변의 인공 모래사장에서 파리 시민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상식을 깨는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평범한 일상 공간을

소통의 광장으로 바꾼 사례는 외국에도 많다.

호주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Harbour Bridge) 축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다리는 매년 10월 둘째 주 일요일이면 차량이 완전 통제되고 1㎞가량의 상판 위에 녹색 잔디가 깔린다.

수만 명의 시드니 시민들이 그곳에서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인 시드니항을 굽어보며 식사와 휴식을 즐긴다.

2009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입소문을 타면서 널리 알려져 매년 참가자가 늘어나고 있다.

강변이 바닷가로 바뀌는 곳도 있다.

'파리 플라주(Paris Plage)'다.

매년 7월 중순 프랑스 파리 센 강변에 인공 모래사장이 조성된다.

간이 도서관과 음악 분수도 설치된다.

이 행사는 열악한 경제사정과 바쁜 도시생활로 휴가를 못 간 파리 시민들을 위로하고자 2002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2010년 10월 22일부터 이틀간 파리 샹젤리제 거리는 깜짝 대변신을 했다.

회색빛 거리가 온통 녹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1.2㎞ 구간에 꽃과 곡식 등 온갖 식물로 뒤덮였다.

양과 돼지 등 가축도 꽉 들어찼다.

'샹젤리제 녹색거리' 행사는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고통 받는 청년 농민들이 기획했는데, 그 진풍경을 보려고 200여만 명이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행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격의 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소통하려는 강한 의지가 일시적이나마 '지상의 천국'을 만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