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6> 부산의 고개에서 마주치는 '도둑들'

금산금산 2014. 3. 29. 10:26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6>

부산의 고개에서 마주치는 '도둑들'

만덕에는 빼빼 영감, '모너모'에는 할매 설화…고개마다 품은 산적 이야기

 

 

 

 

 

수백 년간 걸어서 넘어야 했던 만덕고개는 1965년부터 찻길로 변했다. 부산시는 만덕고개에 도로포장 사업을 했고, 이후 차량이 왕래하는 고갯길로 변모했다. 유승훈 제공

 

 

 

# 대티고개

- 부산진~하단장 연결
- 낙동강 재첩 이동로
- 장꾼들 모인 뒤 넘어


# 만덕고개

- 동래·구포장 지름길
- 최고의 산적 아지트


# 모너모고개

- 동래부~부산포 경계
- '못 넘는 고개'서 유래

# 쌍다리 험한 고개

- '기장 홍길동' 정봉서
- 모친 병수발 효자서
- 빈자 돕는 의적으로

 

■ 산과 고개가 많은 부산

   
대티고개는 서구 서대신동에서 사하구 괴정동을 넘는 고개였다. 1971년 대티터널 개통으로 대티고개의 중요성이 점차 사라졌다. 부산박물관 제공

서울 사람이 부산에 와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일이 있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부산을 생각했건만 막상 와보니

산과 언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산이 많은 부산에서는 당연히 터널도 많다.

동전을 준비하지 않은 채 자가용을 몰고 터널 요금소에 들어갔다가

허둥대는 경험도 한다.

그래도 이런 일은 예전에 비해 나은 셈이다.


부산 곳곳을 걸어서 다니던 옛날에 산은 정말 넘기 힘든 곳이었다.

부산의 도보꾼은 산의 비탈진 지형인 고개를 찾아다녔다.

대티고개, 영선고개, 만덕고개, 모너모고개, 문현고개

부산의 고개들은 걷는 거리와 시간을 줄여 주었다.

이렇게 고개는 지름길인 동시에 마을이나 고을을 구분하는

지리적 경계였다.

 

 예컨대 모너모고개는 부산포와 동래부를 경계 짓는 분수령이었다.

이런 고개를 넘으면 새로운 마을과 마주쳤고, 그곳에서는 다른 풍속과 인심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고마운 고개에 무서운 놈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도둑들'이었다.


■ 고개를 넘어야 하는 '장돌뱅이'

오일장
을 찾아다니던 장돌뱅이에게 고개는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하는 통로였다.

용호동의 아낙네들이 분개에서 생산한 소금을 이고 초량이나 서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문현고개를 넘어야 했다. 지게골고개로도 불리던 이 고개는 소금 장수의 애환이 깔려 있다.

동래장구포장을 왕래하던 보부상은 반드시 만덕고개를 통과해야 했다.

동래 사람은 이 고개를 '구포고개'로, 구포 사람은 '동래고개'로 불렀다.

만덕고개는 유달리 험하고 가파른 '깔딱고개'였지만, 동래장과 구포장을 최단거리로 연결했다.

대티고개는 부산의 서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부산진에서 하단장을 보러 가려면 반드시 대티고개를 지나야 했다.

괴정과 하단 사람은 이 고개를 '재첩고개'라 했다.

아낙네들이 낙동강 재첩을 들고 부산장에 팔러 다녔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울창했던 이 고개에서는 도적과 마주치기 일쑤였다.

혼자서 넘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으므로 괴정 삼거리에서 여럿이 모인 뒤에 고개를 넘었다.

구포의 장꾼이 부산항에 가려면 구덕령을 넘어야 했다.

이곳에는 무서운 산적이 자주 출몰하는 산적바위가 있었다.

보부상은 이 산적 떼를 피하려고 반대편의 높은 망바위에서 망을 본 뒤에 고개를 지났다.


■ 만덕고개의 '빼빼 영감'은 누구일까

장돌뱅이의 애환이 배어 있는 고개에는 이야기꽃이 피었다.

고개에서 마주친 도둑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지면서 하나의 설화가 됐다.

만덕고개는 부산의 고개 가운데 최고의 산적 아지트였다.

만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넘어야만 도둑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만등고개'라 불렀다. 만등고개에서 전래하는 설화가 빼빼 영감 이야기다.

빼빼 영감은 동래장과 구포장을 오가며 삿자리를 파는 홀아비였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서 빼빼 영감이라 했다.

어느 날 빼빼 영감이 장꾼들이랑 만덕고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도적 떼가 나타났다.

무서운 도적들은 장꾼들을 묶고, 돈과 물건들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이때 빼빼 영감이 나서 애원했다.

"여기 장꾼들은 겨우 끼니를 때우며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오. 이런 사람들의 물건을 털어서야 하겠소."

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산적들은 빼빼 영감을 발길로 차고 뭇매를 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빼빼 영감이 밧줄을 풀고 비호같이 달려가 산적들을 때려눕혔다.

겁에 질린 산적들이 모두 도망갔고 다친 놈 몇 명이 남았다.

장꾼들이 도적들을 잡아 동래로 가자고 했으나 빼빼 영감은 더는 도둑질을 하지 않을 테니 풀어주자고 했다.

그는 장꾼들에게 술과 안주를 배불리 제공한 뒤 오늘 일어난 일은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며칠 뒤에 장꾼 한 사람이 빼빼 영감 집을 찾아갔으나 그는 사라졌고, 빈집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모너모고개의 산적을 따돌린 할매

모너모고개는 전포동에서 양정동으로 넘어가는 낮은 언덕이었다.

이곳은 동래부와 부산포를 왕래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 공사를 하면서 모너모고개는 사라졌으며, 현재는 송상현 공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고갯마루에 있는 공동묘지는 산적들의 무대였다.

동래와 부산을 통틀어 양대 산적 아지트를 꼽는다면 만덕고개와 모너모고개를 들 수 있다.

모너모고개의 지명은 '못 넘는 고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림이 울창하고 산적 떼가 들끓어 넘을 수 없다는 뜻의 '못 넘는 고개'가 모너모고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모너모고개에도 여러 설화가 전래한다.

그중 하나가 산적을 따돌린 할매 이야기다.

자수를 만들어 팔던 할매는 어느 날 밤늦게 모너모고개를 넘었다.

저고리 속에는 부산장에서 장사를 해 번 돈이 있었다.

산적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난 할매는 꾀를 냈다.

비록 혼자지만 여러 일행이 있는 것처럼 지껄이는 속임수였다.

마침 산적들은 무덤 뒤에 숨어 있었다.

많은 사람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할매를 잡지 못하고 미행만 했다.

주막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도둑이야, 사람 살려라"하고 소리치며 뛰어가는 걸 보니 할매 한 명이었다.

도적들은 다시 산길로 달아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네년이 더 도둑년이다."


■ 쌍다리 험한 고개의 의적 정봉서

 

부산의 고개에서 마주친 도둑 중에는 흉악범뿐만 아니라 의적도 있었다.

한양에 의적 홍길동이 있다면, 기장에는 정봉서가 있었다.

정봉서는 기장 쌍다리 험한 고개에서 도둑질하던 의적이었다.

그가 도적이 된 배경에는 기구한 사연이 있다.

원래 정봉서는 동래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홀어머니가 병석에 누웠는데 한 의원이 개 1000마리를 먹어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정봉서는 지나가는 개를 보기만 하면 훔쳐 뒷다리를 고와 어머니께 드렸다.

그렇게 시작한 바늘 도둑은 점차 소도둑이 되었다.

어머니를 위해 시작한 생계형 도둑질이 점차 늘어 큰 도둑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여느 산적과 달랐다.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집을 도와주는 일도 했다.

하루는 정봉서가 아이를 출산하는 집을 지났다.

산모를 위한 쌀과 미역을 준비하지 못해 한숨만 쉬는 남편을 보았다.

인기척이 들려 남편이 나가보니 쌀과 미역, 고기가 놓여 있었다.

정봉서가 주고 간 것이다.

이렇게 의적으로 소문난 정봉서도 결국 동래 포졸에게 잡히고 말았다.

옥에 갇힌 정봉서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봉서의 아내가 동헌으로 달려갔다.

남편에 버금가는 장사였던 그녀는 하마석을 번쩍 들어 동헌의 문을 쳐버렸다고 한다.


# 금곡·화명·반송동 깊은 골짜기, 산적 자주 출현 행인 괴롭혀

■ 부산의 유명한 도둑골

과거에는 도적들이 산과 골짜기, 고개를 오가면서 강도질을 했다.

산이야말로 그들의 삶터이자 안식처였다.

산은 인적이 뜸하므로 도둑질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며 포졸이 기습한다 해도 내빼기에 좋았다.

도둑들이 자주 출현하는 깊은 골짜기에는 '도둑골'이란 지명이 전해진다.

금정산 줄기가 낙동강과 마주치는 금곡동에 '도둑골'이 있었다.

금곡동 도둑골은 깊은 골짜기로서 도둑들이 숨어 있다가 행인을 괴롭힌다고 해서 붙여졌다.

금곡동 아래의 화명동에도 깊은 골짜기가 많았다.

화명동 대장골의 뒷산은 산적의 본거지였다.

이 산적들은 화명동 수정 마을에 버젓이 나타나 민가의 곡식을 약탈할 정도로 대범했다.

수정마을의 허섭 진사는 주민을 산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준 인물이다.

허섭은 산적에게 매년 정기적으로 곡식을 주는 대가로 산적이 주민을 괴롭히지 않기로 약조를 받아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내준 선각자로서 진정 큰 부자였다는 소문까지 전해진다.

   

소나무가 울창했던 반송동에도 도둑골이 있었다.

반송동 본동마을의 뒷산 쪽에는 기장으로 넘어가던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매우 으슥했던 이곳에는 산적이 자주 나타나 행인의 물품을 빼앗아 갔으므로 '도둑골'이라 불렀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