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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7> 부산 ‘경마 타짜’와 ‘하야리아 부대’ 이야기

금산금산 2014. 4. 5. 09:28

 

[부산 사람도 모르는] <7>

부산 ‘경마 타짜’와 ‘하야리아 부대’ 이야기

 

달리는 것은 말이 아닌 욕망… 서면경마장, 부산을 도박판으로 만들다

 

 

 

일제 강점기 부산 서면경마장에서 경마를 하는 장면. 부산박물관 제공

 

 

- 日人들, 부산진매축지서 시작
- 인파 수용에 한계 다다르자
- 농사 짓던 소작농 몰아내고
- 1930년 서면에 건설 나서

- 경마 타짜들 급증하면서
- 1939년 마권판매 116만원
- 4년전 비해 거의 4배 늘어
- 장외에서는 사설경마 유행

- 中·日전쟁 등 발발하면서
- 부지 징발로 내리막길 걸어
- 해방후에는 미군이 차지
- 하야리아 부대가 주둔

 

 


■ 말(馬)과 인연이 깊은 부산

   
1960년대 하야리아 부대 모습. 부산시민공원추진단 제공

올해는 갑오년 말띠 해이다.

말과 부산은 인연이 깊을뿐더러 이미지도 비슷하다.

영도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목마장이었다.

탄탄하고 매끈한 체형으로 갈기를 휘날리며 뛰는 말은 생동감이 넘친다. 부산도 이렇게 뛰는 말처럼 변화무쌍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도시다.

그런데 말띠의 운세에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말띠는 대개 거창하게 시작하나 끝이 약한 용두사미형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말띠 사람은 낭비와 유흥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제 강점기 말이 도박의 수단으로 변질했다.

말 자원의 육성을 위한 경마가 점차 돈벌이 수단으로 추락했다.

일제는 부산진 매축지와 서면(범전동)에 경마장을 설치해 경마대회를 열었다.

부산경마대회에서는 뛰는 말과 환호하는 인파, 그리고 출렁이는 사행심이 도가니 속처럼 들끓었다.

 

 


■ 부산경마구락부의 경마대회

1914년 용산 연병장에서 서구식 경마대회가 개최된 후 부산에서도 경마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

1921년 부산진 매축지에서 처음으로 경마대회가 열렸다.

1924년에는 경성, 평양, 군산, 대구 등지의 우수한 말이 대규모로 출전한 남선경마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경마대회는 부산경마구락부가 주최했다.

구락부(俱樂部)는 클럽(club)의 일본식 표기로 경마구락부는 경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였다.

부산경마구락부는 부산일보 사장이었던 아쿠타가와 타다시를 비롯해

부산의 일본인 실력가를 중심으로 조직됐다.

당시 말은 주요 교통수단이었기에 우량 종마(種馬)의 육성이 매우 중요했다.

일제가 경마대회를 지원해준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애초 부산경마구락부의 부산경마대회는 흥행이 예견된 셈이었다.

말을 좋아했던 조선 사람이 부산경마구락부의 경마대회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수익 창출을 노린 부산경마구락부는 관람자들에게 마권을 발행했다.

부산경마대회로 오는 교통 편의를 위해 임시전차를 운행하고 자동차 요금을 할인했다.


■ 경마장 설치로 낭패를 본 조선인들

봄과 가을에 열린 부산경마대회는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부산진 매축지에 있던 경마장은 지름 80m 정도 규모로, 급증하는 경마꾼의 열기에 부응하기는 비좁았다.

부산경마구락부는 새로운 경마장 설치를 모색했는데, 그 장소가 현 부산시민공원 자리다.

당시 범전동은 부산 시내와 거리가 멀지 않고, 논밭이 넓게 펼쳐졌으므로 적당한 경마장 공간으로 여겨졌다.

경마장 예정 부지의 소유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지주들이었다.

1930년 부산토지조합이 3만여 평의 토지를 매입해 경마장 공사를 시행하자 소작을 짓던 가난한 조선인들은

당장 쫓겨날 형편이 되었다.

경마장으로 얻는 수익이 일차적 목적이었던 일제가 소작인 30명의 거취를 살펴볼 리 만무했다.

이 소작인들과 함께 경마장과 바로 접했던 서면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경마가 진행될 때마다 각종 소음과 악취 때문에 수업에 큰 방해가 되었다.

학부모들은 마권을 매매하는 투기적 모습이 학생들에게 미칠 악영향에 고심했다.

학부모들은 학부형대회를 열고 동래군 당국에 경마장 철폐를 요구했다.


■ 경마도박에 빠진 부산의 타짜들

서면경마장 개장 이후 부산 경마는 열기가 거세졌다.

흥행가도를 달렸던 1930년대 경마는 오락이 아닌 도박이 됐다.

경마가 도박이 된 이유는 마권에 있었다.

마권은 어느 말이 우승할지 미리 점쳐 돈을 주고 사는 승마투표권이었다.

우승 말을 맞히면 배당금을 받았다.

승마투표권은 한 말에 거는 단승식(2원)과 두 말에 거는 복승식(5원)이 있었다.

배당금20원 이내로 제한했으나,  쾌주하는 말의 승부를 맞히는 일이기에 다른 도박에 비해 짜릿함이 컸다.

부산 경마 타짜들이 늘어나자 경마로 생기는 수익이 날로 커졌다.

1935년 서면경마장의 마권 판매액이 36만 원이었으나 4년 뒤인 1939년 116만 원으로 거의 4배나 늘었다.

 

조선인에게 경마 광풍이 몰아치자 이를 우려한 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요사이 경마는 도박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도박화하고 마는 것은 자못 유감이다. 경마 팬의 칠할,

팔할은 조선인으로서 거개 소액권으로 경마가 무엇인 줄 모르고 남이 한다니 따라만 다니는 친구들도 많다'.

 

아무리 소액권이라도 마권 한 장에 2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면경마장에서는 새로운 장외 도박이 유행했다.

마권을 사지 않고 1원이나 50전씩 돈을 걸어 이긴 사람에게 몰아주는 비공식 경마도박이 인기를 끌었다.

일제는 이런 경마도박의 색출에 열을 올렸다.

형사들은 관람자로 가장하고 있다가 이들을 보면 바로 체포하여 경찰서로 끌고 갔다.


■ 경마장을 점령한 하야리아 부대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잘 나가던 경마장에도 역풍이 불었다.

서면경마장과 전쟁의 악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침략 전쟁에 몰입한 일제는 넓은 공지였던 경마장을 부대훈련소로 징발했다.

돈보다 총이 앞서는 전쟁 시기였으므로 수익을 내는 경마장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부터 만주로 가는 조선 철도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72병참 경비대가 주둔했다.

또 외국인 포로들을 가두는 임시 수용소와 이를 감시하는 군속교육대가 들어섰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나자 서면경마장을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다.

미군 역시 군사 도열 훈련을 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서면경마장에는 하야리아 부대가 주둔했다.

 

2차 대전 당시에도 미국 플로리다주에는 유명한 하야리아 경마장이 있었다고 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하야리아(Hialeah)'는 인디언 말로 '아름다운 초원'이란 뜻이다.

부산의 경마장에서 미국의 아름다운 초원과 하야리아 경마장을 연상했던 미군들은

부대 이름을 '하야리아'라고 붙인 것이다.

 

 

1956년 한국마사회는 부대 옆에 새로운 경마 트랙을 설치하고 경마를 재개했다.

마권 발행도 다시 시작해 휴일에는 1500명이 넘는 경마꾼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재개된 경마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번에는 총알 대신 주먹이 날아왔다.

경마장을 점거한 부산 폭력배의 행패를 이겨내지 못하고 기수들이 모두 철수했다.

 

 


■ 시민공원에서 꿈꾸는 부산의 미래

2012년 2월 부산시민공원 내 역사관 건립 사업의 하나로 하야리아 부대를 조사하다

장교 클럽 건물에 들어가 보았다.

이 건물의 원형 천장은 미8군을 상징하는, 성조기의 별 문양과 붉은 줄무늬로 장식돼 있었다.

우리 부산의 땅을 침탈하여 일제는 경마장을 설치하였고, 그 위에 다시 미군의 별이 천정에서 반짝이는 장교 클럽이 건립됐다.

이 건물은 부산의 슬픈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오는 4월 이곳을 리모델링하여 부산시민공원 역사관이 개관될 예정이다.

100년 만에 부산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시민공원

과거 부산의 암울했던 역사를 딛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장소로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 조선총독부 사행성 알고도 방치, 마권에서 식민지 경영 재원 마련

1930년 중반 경마가 과열되자 '금광열 못지않은 경마열'이란 말이 생겨났다.

경마가 과열되고 도박단이 몰렸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방치했다.

식민지를 경영하는 재원경마 도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대까지 경마구락부가 발행하는 마권에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경마구락부는 일제가 허가해 준 사단법인으로 서울 부산을 비롯해 평양 대구 신의주 군산 등 6곳에 있었다.

경마구락부는 배당금의 2할을 수수료로 뗐는데 마권 발행이 많이 늘어나자 수입이 막대해졌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경마 제도에 관한 검토를 시작해 1932년 조선경마령을 제정했다.

조선경마령에 따르면 인가받은 6개 경마구락부만 경마를 할 수 있으며,

마장 시설도 길이 1600m, 너비 30m 이상을 갖춰야 했다.

그런데 이 법의 핵심은 세금 규정이었다.

마권 발행에 따른 수입의 5%에 해당하는 금액을 조선총독부에 내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식민지 조선에서 부산경마장의 수익은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1942년에는 조선마사회령이 공포돼 조선총독부가 세운 마사회가 모든 경마를 주관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