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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 <9> '야구도시 부산'의 탄생 이야기

금산금산 2014. 4. 19. 10:40

 

[부산 사람도 모르는] <9>

'야구도시 부산'의 탄생 이야기

부산의 조선인 야구팀 1910년대 후반 결성, 日 최강팀과 대등한 경기

 

 

 

일제 강점기의 부산 대정공원 운동장(현 서구청 자리). 부산에서 많은 야구 경기가 열린 곳이다. 부산박물관 제공

 

 

 

- 日 거류민단회 주축 개교
-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
- 1910년 전후로 경기 시작
- 부산 야구 '창세기' 열어

- 초량구락부-세관팀 경기
- 식민지 대 제국 대결 비화
- 불공정 판정에도 이겼으나
- 승패 바뀌는 설움 겪기도

- 광복후 전국중등학교 대회
- 경남중학교 3연패 위업
- 부산에 열풍 일으키며
- 야구도시 성장 기폭제로

 

 


■ 야구도시 부산의 순항

   
우리나라 최초의 황성기독교 청년회 야구팀. 오시마 가츠타로의 '조선야구사'에 수록된 사진이다.

지난 4일 부산시는 한국야구위원회, 기장군과 함께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 건립을 위한 실시협약서를 체결했다.

1년 전 우선협상 대상자로 지정된 이래 순풍에 돛을 단 듯

야구도시 부산의 항해가 순조롭게 이뤄진 것이다.

 

부산은 '한국 야구 명예의 전당' 유치를 통해

한국 야구의 상징적 도시로 튼튼한 기반을 다지게 됐다.

한국 야구사를 새롭게 장식하게 될 이즈음에서

부산 야구의 탄생에 관해 살펴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한국 야구의 원년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이는 '한국운동경기사'(1958)를 쓴 나현성 교수의 단순한 오기에서 비롯됐다.

동아일보 체육기자인 이길용이 1930년에 쓴 '조선야구사'

오시마 가츠타로가 1932년에 저술한 '조선야구사'를 보면 모두 한국 야구의 기원을 1904년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때를

한국 야구의 원년으로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다.

다만 오시마 가츠타로는 필립 질레트가 경성으로 부임하기 전 평양에서도 몇 명의 동호인과 숭실대학의 학생에게도 야구를 가르쳤다고 하였으므로 야구 원년이 몇 년 더 소급될 여지는 남아 있다.

그러나 '카더라'는 식의 사료를 내밀며 억지로 야구 원년을 당기는 일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 1913년 철도군과 대결한 부산군

부산 야구의 탄생에는 일본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05년 일본인 거류민단회가 주축이 되어 개교한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부산제1공립상업학교)에 야구부를 두었다.

일본에서는 1873년 학생 야구가 보급돼 야구부의 설립이 유행하던 터였다.

이 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0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대신동으로 교사를 새로 지어 이전한 이후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 운동장에서 각종 야구 경기가 열렸다.

오시마 가츠타로는 1913년 철도국에서 창설한 철도야구팀이 10월 17일 최초로 원정하여

부산팀과 게임을 치렀다고 했다.

이 경기는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에서 벌어졌는데, 격전 끝에 철도군이 부산군에 7-4로 이겼다.

철도군은 정식 창단 이전에도 '성남구락부'라는 이름으로 활약했으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막상막하를

이루던 강팀이었다.

양 팀 선수는 모두 일본인으로 구성됐다.

부산팀을 이끌던 선수들은 소학교나 상업학교의 교사였고, 와사전기회사의 사원도 있었다.

당시 야구단원들은 전업 선수가 아니라 취미로 야구에 열중한 마니아였다.

이후 철도군과 부산군의 대결이 자주 이뤄졌다.

1914년 3월 다시 부산에 원정을 온 철도군은 부산군을 10-3으로 꺾었다고 한다.


■ 부산 일류팀으로 승격한 초량구락부

 

1915년은 부산 야구사에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미시무라 부산부립병원장과 같은 일본인을 중심으로 부산야구단이 조직돼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 교정에서

발회식을 가졌다.

이 발회식에서는 야구단 규칙도 공포됐다.

총 17조로 된 야구단 규칙은 부산 야구단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최초의 규정이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야구단 단원은 부산에 거주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자들로 조직한다고 하였다.

야구단의 목적은 단원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야구 정신을 진작하며, 체력을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부산야구단은 일본인의 야구 동호회 성격이 강했으나 부산에 야구를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6년부터 부산일보사(일제 강점기의 부산일보사)가 주최하는 제1회 부산야구대회가 열렸다.

1917년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세관팀, 교원팀, 실업팀, 부산공립상업전수학교팀 등 4개 팀이 참가했다.

1918년 제3회 대회에서는 부산부청단, 우편국단, 삼우구락부, 기자단, 금성구락부 등 7개 팀이 겨뤘다.

신설 팀을 보건대 부산에서 야구의 유행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918년에는 대정공원 운동장이 준공돼 부산 야구팀의 연습과 경기가 활발해졌다.

일본인에게서 영향을 받은 조선인 청년도 야구 동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팀이 초량구락부이다.

1920년 초량구락부는 부산진구락부 등과 함께 도쿄에 있는 조선유학생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했다.

초량구락부는 당시 부산 일본인의 최강팀인 세관팀과 대적할 정도로 성장했다.

1921년 초량구락부는 부산의 제1류팀으로 승격하였으며, 부산운동협회가 주관하는 부산 야구단 시합에서

세관팀과 우승 쟁탈전을 벌였다.


■ 야구 경기에서 당한 식민지의 설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은 야구 경기에서도 큰 설움을 받았다.

일본인 심판은 불공정한 판정을 남발했고, 일본인이 장악한 언론사는 엉뚱한 보도를 냈다.

1921년 5월 대정공원에서 초량구락부와 세관팀의 경기가 있었다.

이 경기는 식민지 조선과 일본 제국의 대결로 비화해 대성황을 이뤘다.

불공정한 심판 판정 속에서도 초량구락부는 8-6으로 승리를 거뒀으나 어이없게 세관팀은 자신이 승리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양 팀의 주장이 엇갈리자 결국은 무승부로 결정이 났다.

초량구락부는 크게 낙심하던 터였는데 경성일보와 부산일보의 보도를 보고 나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초량구락부가 6-8로 패했다는 보도가 난 것이다.

초량구락부 청년들은 격분하였으나 일본인이 체육단체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조선인은 일본에서 열리는 야구대회에서도 유니폼에 조선인의 성을 달고 출전할 수 없었다.

일본의 보총(寶塚) 야구협회에 속한 야구단은 조선인 선수가 뛰어보기를 열망하는 곳이었다.

미국의 메이저리그에 입성하고 싶은 한국 선수의 심정과 같았다.

당시 뛰어난 실력을 갖췄던 손효준 김정식 정인규 함용화 선수 등은 일본에서 맹활약했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인 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시합에 참가할 수 없었다.

만약 선수가 조선인 성을 달고 경기에 나서면 바로 보총 야구협회에서 왜 조선인을 채용하였냐는

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 경남중, 3년 연속 우승의 쾌거

1920년대 중등학교 야구대회 개최에 따라 부산에서도 학생 야구가 크게 성장했다.

일본 오사카에서 매년 열리는 전국 중등학교 야구대회는 수십만의 일본인이 참관하는 큰 체육행사였다.

1921년부터 조선에서도 예선전을 벌여 통과한 팀이 출전했다.

대회가 열리는 오사카의 나루오 운동장은 야구 선수에게 꿈의 그라운드였다.

부산에서는 부산중학교와 부산상업학교가 출전했다.

1930년대부터는 학생 야구를 비롯해 모든 야구 행사가 통제됐다.

경제 불황이 이어지고 군비 증가와 침략 전쟁에 따라 애꿎은 야구 경기가 타격을 맞았다.

   

광복 이후 야구 중흥 시대가 다시 열린다.

미 군정 시기 야구를 좋아하는 미군은 야구 경기를 권장했다.

1947년부터 조선야구협회 주관으로 제1회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첫 대회에서 우승한 경남중학교는 제2회 대회에서도 경기중학교와 결승전을 치러

4-1로 승리를 거뒀다.

1949년 3회 대회에서는 경남중학교와 동래중학교가 결승전에 나란히 올랐다.

치열한 접전 끝에 경남중학교가 7-3으로 승리를 거머쥐면서 부산에 야구 열풍을 일으켰다.

이 열풍은 부산이 야구도시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됐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