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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람도 모르는<10> 부산 '마을 신(神)'들의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

금산금산 2014. 4. 26. 07:54

 

부산 사람도 모르는<10>

부산 '마을 신(神)'들의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

마을 제당과 당산나무, 못다한 사랑 간직한 그녀들이 산다

 

 

 

 

대리 마을 처녀 총각의 아픈 사연이 전해지는 구포동 당숲 전경.

 

 

# 영도

- 최영장군 사모했던 탐라 여왕
- 그를 찾아왔다 외로운 혼령돼

 

# 구포 당숲

- 백년가약 맺은 선비 잃은 처자
- 선비의 팽나무에 기대 숨져

 

# 장산

- 신선과 혼인했던 고씨 부인
- 하늘 간 남편 찾다 실족사

 

# 청사포

- 어부 남편 바다서 잃은 여인
- 소나무 위서 기다리다 생 마쳐

 

 

■ 부산의 마을 제당은 이야기 보물섬

   
외로운 혼령이 된 탐라국 여왕을 모시는 아씨당 전경.

부산 사람은 마을을 정주 단위로 생활했다.

마을은 삶과 생업의 공동체였으므로 궂은 장례식부터 힘든 농사일까지 마을 사람이 함께했다.

 

또 마을은 운명과 신앙의 공동체였다.

마을의 주산(主山)에는 제당(당산)을 세워 마을 신을 모시고

일 년에 한두 번 제사를 올렸다.

마을의 평화가 곧 개인의 안녕과 직결되었으므로

모든 주민이 정성스럽게 신을 모셨다.

특히 험한 바다에서 조업하는 부산 사람은 마을 제당을 많이 세웠다.

신성한 의례 공간인 제당에는 으레 전설과 이야기가 숨어 있다.

마을 제당은 설화의 보물섬이자 이야기의 창고였다.

이 창고에서 마을 신이 좌정한 이야기를 뒤져보면 마을 신들의 슬픈 러브 스토리가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이 마을 신으로 좌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 최영 사모하다 혼령 된 탐라국 여왕

영도 신선동 봉래산 기슭에 아씨당이 있다.

원래 아씨당은 영도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호국관음사 인근으로 옮겨왔다.

이 아씨당에는 최영 장군을 사모한 탐라국 여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영 장군과 탐라국 여왕은 서로 전쟁을 벌인 사이였다.

최영 장군은 탐라국을 군마(軍馬)의 양육지로 삼기 위해 대대적 정벌에 나섰다.

탐라국도 물러서지 않고 격렬히 맞섰다.

백전노장 최영 장군이지만 수백 년 동안 여왕이 탱자나무를 심어 만든 견고한 성을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때 최영 장군은 지략을 썼다.

갈대를 재배한 뒤 불을 붙여 큰 화재를 일으킨 것이다.

성이 소멸하자 탐라국 여왕은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전쟁에 졌을 뿐만 아니라 사랑 앞에도 무릎을 꿇었다.

비록 적이었지만 최영 장군의 용맹한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신돈의 음해에 빠져 유배를 간 장군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절영도까지 왔다.

하지만 절영도로 귀양살이를 갔다는 것은 풍문에 불과했다.

그녀는 최영 장군을 만나지 못하고 적막한 땅에서 홀로 지내다가 죽어서 혼령이 됐다.

최영 장군을 사랑했던 죄로 외로운 귀신이 된 것이다.

사무친 원한을 풀지 못한 그녀는 절영도 목마장의 말을 죽였다.

멀쩡하던 말이 절영도를 떠날 때면 나자빠졌다.


정발 장군이 부산 첨사로 왔을 때 탐라국 여왕은 꿈에 나타나 해법을 줬다.

"나의 사당을 지어서 모시면 군마가 무병할 것이며, 나를 모신 백성은 소원 성취할 것이다."

조정에서 그 꿈 이야기를 듣고 아씨당을 지어준 뒤부터 군마가 죽는 일이 없어졌다.

제당을 지어 그녀를 신으로 모시자 이루지 못한 사랑의 원한이 봄눈 녹듯이 풀린 것이다.


■ 처녀 총각 못다 한 사랑 구포 팽나무

천연기념물 제309호
로 지정된 구포동 당숲의 주인은 역시 팽나무다.

대리 마을의 당산나무였던 팽나무가 천연기념물이었는데 2007년 구포동 당숲 전체로 확대됐다.

팽나무의 수령은 600여 년이다.

아마 부산의 역사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수목일 게다.

이 팽나무가 당산나무가 된 배경에는 대리 마을 처녀 총각의 아픈 사랑이 있다.

사랑에 목말랐던 팽나무는 자그마치 600년의 세월을 버텼다.

세종 때 대리 마을에 사는 가난한 선비와 김 초시의 딸은 부모 몰래 백년가약을 맺었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처자는 정표로 손수건을 주고, 선비는 팽나무 지팡이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낭자, 이 팽나무를 땅에 꽂아 잘 자라거든 내가 급제해 돌아온다는 뜻이니 꼭 기다려주오."

하지만 한양으로 떠난 선비는 고갯길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처자를 흠모했던 이웃의 부잣집 도령과 대리 마을의 못된 무당이 저지른 짓이었다.

이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처자는 매일 지팡이에 물을 주고 가꾸니 싹이 트고 잎이 자라났다.

삼 년 후 처자는 구포장에 온 장사꾼으로부터 선비가 피살되었다는 비보를 들었다.

크게 상심한 그녀는 팽나무를 떠나지 못하고 곁에 기댄 채 그만 죽고 말았다.

처자가 죽은 자리에 또 하나의 팽나무가 자라나 붙어서 쌍을 이룬 팽나무가 되었다.

사무친 원한은 곧 무서운 재앙으로 나타났다.

마을에 화재, 가뭄, 홍수 등 재난이 계속 일어나자 원로들은 처자의 원한임을 깨닫고

선비와 처자의 영혼 혼례식을 치러주었다.

또 팽나무를 당산나무로 정하여 매년 당산제를 올리니 끊이지 않던 재앙도 사라졌다.

사랑했던 선비를 잃은 천추의 한을 알아주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자 가슴에 맺혔던 원한을 푼 것이다.

 

 

 

■ 신선 좇아 장산에 오르다 죽은 고선옥

재송동에서 장산에 오르다 보면 산 중턱에 작은 제당이 있다.

바로 재송2동 당산이다.

이 마을 제당 안에는 고당신과 성주신, 세주신과 구룡신을 모시는 위패가 있다.

여기에 전해지는 설화는 하늘로 올라간 남편을 좇다가 죽은 고 씨 할매의 슬픈 이야기다.

수천 년 전 이곳의 장자벌에는 고 씨들이 모여 살았는데, 고선옥(高仙玉)이라는 아름다운 처녀도 있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장자벌로 내려온 신선이 목이 말라 한 집에 들어가 물을 청했다.

정성스럽게 물을 건넨 처녀가 고선옥이었다.

아리따운 자태를 보고 첫눈에 반한 신선은 그녀와 혼인을 하여 장자벌을 일구고 살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60년이 되던 해에 하늘로 다시 오라는 천명이 내려졌다.

신선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남겨두고 하늘로 올라갔다.

고선옥은 떠난 남편을 잊지 못하고 제왕반 바위에서 불을 켜두고, 부부암에서 남편을 그리며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남편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일렀다.

"나의 형체라도 보고 싶거든 장산의 정산으로 올라오시오."

잠에서 깬 고선옥은 급히 장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정상을 얼마 앞두고 그만 바위에서 미끄러져 죽고 말았다.

지금도 장산에는 고선옥이 호롱불을 켜둔 제왕반 바위와 남편을 그리던

부부암(영감할매바위)남아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은 고선옥의 고귀한 마음을 기리기 위해 제당을 지었으며,

고 씨 할매를 마을 신으로 숭배하여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올렸다.

 

 


■ 소나무에서 남편을 기다린 김 씨 할매

달맞이 고개 아래의 작은 포구인 청사포에는 맞배지붕의 작은 제당이 있다.

이 제당을 지그시 감싸고 있는 소나무가 수령 300여 년이 된 당산나무다.

마을 사람은 이 노거수를 수호신으로 숭배하며, 망부송(望父松)이라 부르고 있다.

남편을 소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다 죽은 김 씨 할매의 전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300여 년 전 청사포 마을에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가 살았다.

청사포 마을 사람은 대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고깃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면 김 씨 할매는 바위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파손되어 남편이 익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 씨 할매는 남편이 돌아올 것을 철석같이 믿고 바위에서 기다렸다.

그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더 먼 바다를 볼 수 있는 소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렸다.

그렇게 애타게 남편을 기다리다 김 씨 할매는 숨을 거뒀다.

   

마을 주민은 부부의 혼을 위로하고 김 씨 할매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소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해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도 이곳에서 올렸다.


세상사 가운데 이루지 못한 사랑만큼 힘들고, 떠나간 님보다 애달픈 기억은 없다.

그들의 응어리진 원한을 풀어주는 방법은 마을 제당을 세우고, 마을 신으로 모신 것이었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