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울릉도 지킴이 '안용복'

금산금산 2014. 9. 10. 10:36

울릉도 지킴이 '안용복'

 

 

 

신라이후 줄곧 우리땅, 왜구 약탈에 조선 空島정책

 

 

                                                                               

                                                                ▲ 동래사람 안용복은 조선시대 왜국과의 영유권 시비에 휘말렸던

                                                           울릉도를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사진은 풍광이 수려한 울릉도 전경).                                                                        

 

현재 울릉도에 부속된 독도가 일본과의 영유권 시비에 휘말려 있는 상태이다.

조선조 시절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가 왜국의 영유권 시비 대상이었다.

오늘날 울릉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 가운데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이는 조선시기의 영유권 시비 과정에서 울릉도를 지킨 결과이다.

여기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부산의 보통사람] 안용복.

 

숙종때 동래에 살았던 평민 신분의 어부였던 그는 17세기 울릉도 영유권 시비 과정에서

왜국 대마도의 침탈 간계를 막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울릉도는 일찍이 서기 512년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항상 한국의 영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왜국과의 영유권 시비에 휘말렸던 것은 고려후기부터 조선초기에 걸쳐 자행되었던 일본해적,즉 왜구의 약탈에 대한 대책에서 비롯된다.

조선초기 무렵 외딴 섬 거주민의 안전을 위하여 거주민을 내륙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이 실시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울릉도 거주민도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왜구가 소멸된 후에도 조선인의 울릉도 거주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

당시 부역과 군역을 피하여 울릉도에 숨어드는 백성이 있었지만 뱃길이 멀고 험하여

제대로 조사하기 조차 어려웠다.

울릉도에는 배를 만들 재목과 각종 수산자원 등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몰래

남해와 동해 연안의 조선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는 일이 빈번했었다.

 

여기다 왜인들이 몰래 들어와 고기잡이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런 와중에 왜인들 사이엔 울릉도가 명백한 조선 영토라는 생각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이것은 큰 문제거리였다.

두 나라 어부들이 영유권 시비를 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용복이 울릉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왜국에 항의하였던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안용복은 1693년(숙종 19년)봄에 동래. 울산의 어부들 40명과 더불어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왜인들과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용복은 동료 박어둔과 함께 왜국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안용복은 굴하지 않고 왜국 관료들에게 납치 행위와 울릉도 침범의 부당성을 따졌다.

그 결과 왜국은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점을 인정한 문서를 안용복 일행에게 지급하였으나

이들 일행은 대마도주의 농간에 걸려 문서를 탈취당하였다.

안용복은 1696년 봄에도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왜국 어부들을 발견하고 동료 11명과 함께

그들을 쫓아가 왜국으로 들어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때도 대마도주의 간계에 걸려 안용복 등은 공식적으로 울릉도 문제와 무관한

단순 표류만으로 취급되어 조선에 송환되었다.

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문제에는 항상 대마도주의 중간 농간이 작용하였다.

그러한 점은 안용복이 1693년 왜국에 납치되었을 때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즉 대마도주는 왜국 정부가 안용복에게 지급한 문서를 탈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 일행을 조선 정부에 인계하면서 오히려 항의 문서를 올리는 등 횡포를 부렸다.

왜국 영토인 다케시마에 침범한 죄인을 송환하니 조선 정부는 앞으로

다케시마 근해에서 어부들의 고기잡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왜국에서 불렀던 다케시마는 울릉도의 왜식 이름이었다.

항의 문서에서 울릉도란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고 "일본 영토 다케시마"라고만 언급한 점은

농간의 극치였다.

울릉도와 다케시마가 별개의 섬이며 그 가운데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착각을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조선 정부가 그 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항의 문서를 그대로 수용하면 장차 이를 빌미로

울릉도를 탈취하려는 속셈이었다.

대마도주가 울릉도에 관심을 가졌던 주요 원인은 대마도가 극히 척박한 섬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대마도는 거의 대부분 산지이며 경작지는 섬 전체의 3% 수준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대마도는 일찍부터 왜구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조선의 왜구 토벌이 강화된 조선초기부터는 울릉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407년(태종 7년) 대마도주는 울릉도로의 집단이주를 조선 정부에 건의했으나 거절당한다.

또 1612년(광해군 4년)에는 대마도주가 울릉도의 지형 조사를 청하였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이들 사건은 울릉도에 대한 대마도의 관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안용복이 지참한 대마도주의 항의 문서를 받은 조선 정부는 다케시마와 울릉도가 동일한 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왜국영토 다케시마"에 대한 침범 항의를 수용하는 척하면서도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이로 인해 장차 예상되는 대마도주의 농간을 봉쇄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표현의 삭제를 요청하자

조선 정부는 오히려 송환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해 대마도주의 저의를 정확히 파악,

강력한 항의 문서를 보냈다.

울릉도는 왜국에서 다케시마로도 불리지만 명백한 조선의 영토임을 지적하고

안용복 등이 자국 영토인 울릉도에서 납치된 사건의 부당성을 항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왜국에서는 자체 조사에 착수하여 1696년 1월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뒤

1697년에는 조선의 울릉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공식문서를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로써 조선 정부는 시비에 휘말렸던 울릉도 영유권을 확고하게 유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현재의 [울릉도 영유권]은 17세기말(1693~1697)의 왜국과의 영유권 시비를 극복함으로써 확립됐다고

말할 수 있다.

평범한 어부 안용복의 용기있는 결단이 영유권 시비를 극복,종식시킨 것이다.

보잘것 없는 백성인 안용복이 울릉도에 대한 분명한 영토 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왜국에 항의해 울릉도 영유권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현재 직면한 일본의 독도 침탈 기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며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다.

시민들의 폭넓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서만 다른 나라의 침탈을 저지하고 영토를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인택.부산교육대 교수.부산 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