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역사...
[장산국]은 존재했다!"
2014-09-01 [10:13:28] | 수정시간: 2014-09-02 [13:55:08] | 20면
▲ 장산국은 유적이나 기록은 없어도 제의나 설화 등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장산의 보존과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년 한 차례 열리는 장산제 모습. 부산 해운대구 제공 |
"장산국(장山國)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김승찬 부산대 명예교수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떤 감 같은 것일까.
하지만 오랜 기간 전설과 설화를 좇아 온
원로 민속학자의 진술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부산의 상당히 많은 신선 이야기를 들어 장산국을 봉래국으로 엮기도 했고, 오늘날 양산과
기장의 경계인
월평고개에서 신라군과 벌어진 전쟁에서 패해 복속됐다는 장산국 멸망의 역사도 들려줬다.
그의 장산국 이야기는 해운대는 물론 장산과 양산까지 넘나들었다.
최근 장산국 스토리텔링 활발
새로운 문화예술 씨앗 될 수도
신중하고 근거
있는 복원 필요
하지만 장산국은 그 시기나 장소도 특정 지을 수 없는 나라다.
흔히 [장산국]이라 하지만 내산국 우시산국 거칠산국 등 이름도 여럿이다.
다른 나라일 수도 있지만, 한 나라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장산국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들어 이런 장산국을 되살려 내려는 움직임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가 장산국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는 차원에서
최근 기획, 제작한 창작 오페라 '해운대-불멸의 사랑'처럼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두 해 전에는 부산문인협회 주도로 무대화한 창작 시극 '장산국' 사례처럼
장산국에 살았다는 선인 부부의 이야기에 다산을 장려하는 현대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시도도 있었다.
일시적인
유행으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그래 왔다.
장산국은 그 기원이나 역사에나 기록조차 제대로 없다 해도 오랜 세월 '동국여도' 등
고지도에 '고장산국(古장山國)' '장산국기(장山國基)' 등의 표기로 계속 이어졌고,
민간에서도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장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을 두고
마을 제의를 여는 등 '성스러운 지역'으로 삼았다.
사실 장산국을 대상으로 학술적인 연구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다.
실증할 유적이나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신라 31대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 온정에서 목욕을 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나
'옛 장산국 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이 땅을 취해 거칠산군이라 했고 경덕왕 때
지금의 동래현으로 고쳤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은 다
후대에 남겨진 것들이다.
홍보식 부산박물관 발굴조사팀장은
"장산국에 관한 유적이나 근거 자체가 없고 시기도 특정 지을 수 없어 학술적 연구가 어렵고
그 규모를 봐도 앞으로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될 가능성도 극히 낮다.
문학이나 예술, 또 민속에서 다룰 수밖에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장산국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부산의 뿌리일지 모르는 역사이고, 바로 그 기록되지 못한 역사가
새로운 문화예술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김승찬 명예교수는
"장산국을 장산 정상에 100명 정도 거주한 작은 부족으로 보기도 하지만, 설화나 전설을 알아 갈수록
부산의 수많은 설화나 이야기를 묶을 수 있을 만큼 그 영역을 넓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할 부분도 있다.
장산국 역사와 기록을 찾아 온 향토사학자 주경업 선생은
"현대인의 머리로만 짜낸 스토리텔링이어서는 곤란하다. 무조건 이야기를 짜내려 해서는 안 된다.
신중하게 접근하고 근거에 맞게 장산국 이야기를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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