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계의 큰손] '동래 상인'들
오늘날 '수출역군'들의 원조
사람이 의 식 주 등 생활을 위해서는 물품이 필요하다.
그래서 곡식이나 생필품과 같은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하는데
이것을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시켜 주는 사람이 [상인]들이다.
이들은 여기 저기 전국의 시장을 돌면서 물건을 팔았으므로 "장돌뱅이""장돌림"또는 "장꾼"이라 불렸고
시장을 옛날에는 "저자" "장"또는 "장시"라고 하였다.
요즘의 현대인들은 1주일이라 하여 7일을 생활주기로 삼고 있지만
이전엔 장날이 5일마다 열렸으므로 그것이
생활주기였고 장이 서는 날이 선조들의 휴일이었다.
따라서 장날이 되면 온갖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과 장터의 흥을 돋우는 광대패나
사당패 등
놀이패들이 북적거리는 등 한바탕 축제 분위기로 변한다.
사람들은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삼아 저자거리에 나온다.
그래서
"장보러 간다"고 하였고 "남이 장에 가니 씨 오쟁이 짊어지고 따라간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조선시대의 상인들로서 먼저 서울에서는
시전이라는 상인조합이 있었는데
이들 상인들은 상품을 독점판매하는 상당한 권한을 누렸다.
한강은 전국의 상품이 배에 실려서 집하되었으므로 나루터에는
객주나 여각 등 상인들이 항상 북적거렸다.
반면 전국 각 장시에서는 관할 고을에 공인을 받은 보부상이나 힘없는
상인.수공업자.농민들이 장날을 따라 돌아 다녔다.
지방에서 활동하는 상인중에 으뜸가는 존재라면
개성상인(송상)과 의주상인(만상)및 부산의 동래상인(내상)을 단연 으뜸으로 꼽았다.
이들은 지방의 상권 장악은 물론이지만 특히 대외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거상들이었다.
주목할 점은 대상인들이 지역적으로 원거리에 놓여 있었지만 유통망을 장악하려고
그들끼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개성상인들이 몰래 일본에 물건을 내다팔기 위해 부산에 와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의주상인도 동래상인과 결탁하여 소가죽을 모두 매점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자 본래 소가죽의 판매권을 가지고 있던 서울의 창전상인들이 장사길이 막힌다며
그들을 엄금해줄 것을 관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송상이나 내상과 같은 지방의 거상들은 각종 상품을 매점하면서 국내 유통망을 장악,
그 판로를 국외시장과 직접 연결해
나갔었다.
특히 동래상인은 국내무역도 물론이지만 왜관을 거점으로 대일무역에 주로 활동하였다.
무엇보다도 많은 자본과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상권을 장악한 것이다.
따라서 부산은 왜관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했던 조선후기 전국 거상들의 활동무대였다.
조선후기 일본과의
무역은 정기적인 사행무역이나 공무역이 있었지만 사무역이 더욱 활발했다.
사무역은 조선상인과 대마도의 상인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여기엔 바로 동래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대마도의 왜인들도 이윤이 많은 사무역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무역활동은 초량 왜관의 개시대청에서 열린 왜관개시가 주무대였다.
조선시대엔 우리 상인과 대마도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적 거래를 개시라 불렀다.
공무역과 달리 대부분의 거래품목과 수량에
제한이 없었고 경제적인 순수 이윤추구가 목적이었다.
조선초에는 왜관개시가 월 3회 열렸으나 광해군 이후 월 6회의 5일장으로
바뀌었다.
개시가 열리면 수세관리와 동래부의 색리들이 동래상인들의 무역물품을 점검한 뒤 훈도.별차와 함께
상인들을 인솔하고 들어가 일본 상인들과 동서로 줄지어 마주 보고 앉아 가격을 매긴 다음 매매가 성립된다.사무역이라고 하더라도 이처럼 엄격한 통제하에 교역이 이루어졌고 거래된 무역액은
모두 기록해 세금을 부과했었다.
따라서 왜관의 출입이 까다로웠으며 일반백성들의 접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양국이 서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교역할 때면 막대한 이익을 남겼기 때문에 왜관개시는
중요하게 취급됐다.그래서 이 무역에 참가하는 동래상인으로 허가를 받으면 그 자체로 큰
이권이 되었다.
예를 들면 왕실에서 사용하는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무소뿔( 또는 궁각)은
부산에서 일본상인들로부터 수입되었다.
이를 조달하는 공인조직을 궁각계라 불렀다.
숙종 20년(1694)에 궁각계를 조직한 사람들이 바로 동래상인과 역관들이다.
무소뿔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였으므로 내상들은 남방의 물자까지 교역한 셈이었다.
역관도 일본어 통역만하는 관리가 아니라 왜관에서 공공연히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역관은 상역으로도 불렸다.
본래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고 권력이란 힘을 추구하는 것인데 상업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이익을 보장해주어야만 한다.
이를 이권이라 부른다.
상인들이 큰 상권을 얻기 위해 권력의 힘에 빌붙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즉 정치적 권력과 상업적 재력을 겸비한 사람을 흔히 정상배라고 부른다.
물론 이 말은 부정적 이미지이다.
아무튼 상인들이 정치가들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관례는 조선조
시대에도 공공연한 관례였다.
조선후기 숙종때 유명한 정치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론중에서
주로 관직에서 물러난 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였다.
이른바 환국사건이었다.
먼저 소론들은 중인들을 부려서 동래상인과 시전상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공급받았다.
이
자금으로 무인들을 고용하고 환관과 총융사들에게 뇌물을 제공해 환국을 도모한다.
당시 자금을 제공한 동래상인은 박세건과 김도명역관
김천민의 아들)이었다.
의주나 동래 등 상업의 요지에서 수령을 지낸 전직관료가 소론의 환국기도에 참여한 점도 흥미롭다.
그들이 동래상인과 같은 거상들의 자금제공으로 환국을 도모한 사실은
당시 남인정권이 대민정책에 있어서 이들 대상들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른바 농본억상책에 입각,지주층과 자영농민의 보호에 중점을둔 반면 당시 성장하던 상공인 세력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결국 조선시대 동래상인들의 활동무대였던 부산은 일본과의 무역 중심이자 중국상품을 일본상인들이 구입해가는 중계무역의
중심지였다.
현재 부산이 수출산업의 전진기지로 자리매김되고 상공인의 뿌리가 깊은 것도
옛날 활발한 무역활동을 했던 동래상인들의
전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변광석.부산대 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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