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은' 선생
일제에 맞서 민족경제 이끈 선각자
영남인의 젖줄인 낙동강은 요즘
오염된 강으로,부산시민들의 불안한 삶의 상징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하지만 원시시대 이래 낙동강은 부산인들의 생명줄이었으며 고기잡이와 물물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어머니 품같이 넉넉했던 강이었다. 특히 근대에 들어와 낙동강 하류의 구포는 강을 오르내리는 물화유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개항
후 구포 상인들은 일본과의 중계무역으로 많은 재력을 쌓았다.
당시 구포의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일본자본의 침투로부터 조선경제를 지키려했던 사람이 윤상은이다.
그는 사천군수이자 3천석 대지주였던 윤홍석의 5남 중 3남으로 1887년 구포에서 태어났다.
1901년 14세였던 윤상은은 일찍부터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철도회사(1898년)와
개성학교(1904년.현 부산상고) 등을 설립했던 박기종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1904년 장인이 설립한 개성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윤상은은
그 해 동래감리서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직한다.
그후 고향 구포에
머물면서 1907년 구포구명학교(현재 구포초등학교)를 설립,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 일은 부친의 친구이면서 구포 객주로 많은 자산을 모았던 장우석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구명학교는 윤상은의 조카이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을 지낸 윤현진이 1회 졸업생이었고
부산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이 2년간 교장을 지냈다는 점에서
이 학교의 설립 취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민족경제는 일제의
침탈로 점차 질식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질곡의 시점이었다.
윤상은은 민족경제를 살리고 나아가 일본경제를 몰아낼 방안으로 조선인 상인의 든든한 자금줄이 될
국내 첫 지방은행인 구포저축주식회사(자본금 2만5천원)를 1908년 설립하게 된다.
이 회사에는 안희제 윤현진 전석준 등 경남의 뜻있는 지주들이 참가한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1910년 회사령을 발동해 기존 회사로는 예금취급을 할 수 없도록 방해공작을 벌였다.
그래서 윤상은은
1912년 6월 자본금 50만원의 구포은행으로 확대,지방의 경제를 부흥시키려고 노력한다.
윤상은은 구포 조선인 상인들의 재력으로는
자본금을 충당할 수 없자 부산 거부들의 자본을 끌어들였다.
이때 구포은행에 참여한 인사로는 이규직 윤병준 등 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인 등 모두 16명이 참여했었다.
이들 일본인은 부동산 수산업 등으로 부산에서 제일가는 거부들로서 은행의 대주주가 되었고
구포은행의 경영권도 장악했다.
결국 구포은행은 1915년 본점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경남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하지만 윤상은은 구포은행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투자해 2년 뒤 최대주주로 부상한다.
그 후 영업이 번창,1918년 마산과 하동에 지점을 열고
그해 12월엔 최연국(사천) 전석준(양산) 손영돈(밀양) 김흥조(울산) 등
경남 지주들이 설립한 주일은행을 흡수,통합하게 된다.
그런데 은행운영을 위해 당시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이었던 우사미와도 교분을 터고
지낸다.
이러한 윤상은의 모습은 자본과 정치력에서 일본인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 조선인 자본가들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윤상은이 부산 거부의 자본력에 의존해 본점을 부산으로 옮긴 것은
합방이전 부산 인근의 상권이 구포에서 부산 시내로 옮아갔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부산에 상주하던 일본인 상인들이 점차 조선의 상품 유통에 눈을 뜨면서
부산이 조선과 일본을 연결하는 중심지로 성장한 반면 구포는 부산의 상업을 보조하는 지역으로
전락한 때문이다.
즉 구포를 중심으로 성장의 기운을 엿보던
조선인자본은 일본 상인들의 성장에 기력을 잃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윤상은은 은행경영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독립자금과 사회운동의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1910년대말 부산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호황기를 타고 백산상회를 비롯해 민족계 무역회사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이들 무역상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상해임시정부에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했는데
윤상은은
이들에게 현금대부를 통해 자금줄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3.1운동 후
총독부가 문화통치로 전환하자 부산에 기미육영회(1919년 11월) 부산예월회(1919년 12월) 등
사회단체가 설립되었는데 윤상은은 기미육영회에 가입,인재들을 매년 유학보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국문학자 이극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윤상은의 정치 경제활동은 부산 경남 지주들과 깊은 인연으로 가능하였다.
특히 울산 지주였던 김흥조와는 막내딸을 시집보내 사돈관계를 맺었다.
그외 윤상은은 당시 민족주의자의 대표자였던 김성수와도 친분을 맺고 있었다.
김성수는 동생 윤영은과 일본 유학 시절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귀국 후 윤상은가와 자주 왕래했다.
그래서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방직(1919년) 동아일보(1920년)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었다.
이런 인연은 이후 윤상은의 사회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3.1운동 후 조카 윤현진이 상해임시정부 재무차장이 되자 일경은 윤상은을 압박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윤선생은 1920년 봄 일본으로의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생활에서 윤상은은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동경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있던 백남훈과의 만남이다.
백남훈은
윤상은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주며 유억겸 최승만 김준연 등에게는 매달 학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1923년 윤상은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일시 경남은행을 운영하였으나
5년 뒤 대구은행과 합쳐 경남합동은행이 발족하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몇 회사의 주주였으나 커다란 활동을 하지 않고 구포에서 소일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과 동시에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자 윤상은도 그동안 친분이 있었던
김성수 백남훈 김준연 김도연이 조직한 한민당에 참여한다.
그러나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정세를 관망하며 추이를 지켜본다.
윤상은이
해방 후 경남 재무부장을 지낼 때 유억겸이 미군정 초대 문교부장을 지냈다.
두 사람의 친분으로 윤상은은 1946년 5월15일 부산대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낸다.
그리고 김도연이 정부수립 후 초대 재무부장을 지낼 때 전매청장으로 잠깐 봉직하기도 했다.
교우관계를 통해 볼 때 윤상은을 민족주의 우파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일제말 대부분 친일로 굴종의 삶을 살았는데 반해 윤상은은 고향 구포에서 은인자중,
독립에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꿋꿋이 살다 해방의 그날을 맞았다.
해방 후에도 그는 일시 정치인,관료로서 활동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부산의 젖줄인 낙동강을 지키며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일생을 살다간
우리고장의 휼륭한 선각자였다.
/차철욱.부산대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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