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김원봉
빼앗긴 조국위해 총칼든 '부부'전사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민족해방운동가였던 부산 출신의 박차정과 그의 '남편'인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은 90년대 들어와서야 역사적 조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업적도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것은 김원봉의 월북이 남북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대치상황과 연결돼 이들의 평가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박차정은 1910년 동래 복천동에서 아버지 박용한과
어머니 김맹련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강한 항일의식을 가졌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독립의지를 갖게 됐다.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항일활동을 시작했는데
1년 뒤 동래일신여학교 고등과(현 동래여고)에 입학하면서 그녀의 항일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은 근우회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박차정은 1928년 5월10일에 결성된 근우회 동래지회에 가입한다.
이후 그녀는 제2회 전국대회가 열렸던 1929년 7월부터 중앙회에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당시 그녀는 경남의 전형위원으로,33인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또 14인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조직과 출판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박차정은 1930년 1월 "근우회사건"이라는 광주학생운동 후속으로
일어난
서울의 여학생시위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즉 11개 여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학교의 분위기와 사정을 알아보고
각 학교끼리의 연락방법 등 시위를 지원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허정숙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석방되나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돼
꼬박 한달간 운신조차 못하고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그녀는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사람을 따라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상해를 거쳐 북경에 당도한 그녀는 당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주력하고 있던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다.
이같은 인연으로 그녀는 31년
3월 동지 김원봉과 백년가약을 맺고 신혼살림에 들어갔다.
약산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 감천리에서 아버지 김주익과 어머니 월성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애국심이 강한 소년이었던 약산은 11세에 마산 창신학교에 편입했다 2년 뒤
동화학원으로 적을 옮긴다.
이후 그는 1915년 다시 서울의 중앙학교로 전학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학업을 포기,
전국을 방랑하며 사람을 사귀고 견문을 넓혔다.
이때 김원봉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 대한광복회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비밀결사운동이 추구했던 독립운동 방식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강력한 무력항쟁을 벌여야만 비로소 조선은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구현하기위해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땅에 도착한 그는 먼저 천진의 덕화학당과(1916) 남경의 금릉대학(1918)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이어 그는 1919년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심혈을 기울였던 외교 독립노선에 반대,
암살파괴활동을 독립운동 기본방략으로
삼는 의열단을 그해 11월 조직하였다.
의열단의 암살 파괴운동은 당시
민중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으나
민족해방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세계적인 사회주의운동의 성장과 국내의 대중운동과 사상운동의 발전에 부응하지 못하자
1924년에 들어와 의열단의 활동은 급격히 침체되어 갔다.
그리하여 1926년 의열단은 형식을 갖춘 정치조직으로 탈바꿈,
결사적인 항일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각 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학교 등 각급 학교에 입학한다.
그도 그해 1월 황포군관학교에 제4기생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받게된다.
이로인해 약산의 의열단은
민족주체.민중중심 원칙을 확고해 국내노동대중운동을 지향하였으며
1929년 봄 북경으로 거점을 옮겨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창립했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약산과 박차정은 10월 혁명간부학교를 개설,
국내에서 모집한 학생을 대상으로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박차정은 여자부 교관으로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심어주기도 했다.
1935년 약산의 의열단은 유일당 건설을 위해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으며
박차정은 민혁당 남경부녀회를 만들어 여성들을 전체 민족해방운동에 편입시키려고 진력했다.
그녀는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되어야 하고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었다.
민족혁명당은 1937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을 선언,
한.중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해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하기도 한다.
이때 박차정은 일본에 그들의
죄과를 묻는 라디오방송을 담당했으며
오랜 옥고 끝에 숨진 안창호의 추도회를 개최했다.
김원봉은 1938년 10월 한구에서 한.중 연합전선의 형식을 빌려 항일무력기관으로서 조선의용대를 결성한 뒤
중국항전 참가와 일제타도 조국해방 임무를 수행하고자 노력한다.
이때 박차정도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중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다.
김원봉은 1941년 12월에 민족연합 전술의
일환으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
임정의 개조투쟁을 시도했으며 1944년 5월 임정의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35세의 박차정은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민족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투쟁했던 그녀는 해방을 1년 앞두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해방후 김원봉은 귀국길에 아내의 피묻은 적삼과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하고 통곡했다.
해방이후 격동기를 남쪽에서 보내던 김원봉은 월북한 뒤 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이들 부부는
분단이데올로기에 휘말려 그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잠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이들 부부에게 햇살을 내려
우리 고장이 낳은 걸출한 독립투사로 모두의 곁으로 되돌려 놓고있는 것이다.
/이송희.신라대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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