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국권회복' 운동
[국채보상운동] 걸인 기생까지 참여, 지도체계 미흡에 좌절
지난 우리는 IMF체제로 국가의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외채 상환의 한 방법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다.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이 깃든 금을 아낌없이 외채를 갚는데 내놓은 모습에서
또 다른 한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꼭 90년 전 우리 선조들도 국채를 갚기 위해 하나된 모습으로 일어섰다.
1905년 이후 일본의 지속적인 정치.경제적 침탈로 국민주권은 상실되고 생활의 기반을 잃어 가는 과정에서
민중들은 근대교육을 통한 의식의 성장과 신문.잡지를 비롯한 인쇄매체의 계몽 등의 영향으로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독립의지를 갖게 되었다.
이에따라 민중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근대교육운동이라는 방략을
선택하게 된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29일 서상돈.김광제 등
대구지방의 애국지사들이 처음 제창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국채 1천3백만원은 1년치 국가예산과 거의 맞먹는 거액이었으므로 만일 외채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국토가 일본의 영유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인해 거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부산과 경남지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부산지방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은 부산 상무회의소 회원들이었다.
그 후에 회원 부인들의 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단연동맹금 모금을 적극 전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예를
들어보면 좌천리에서는 남자들보다 부인들이 먼저 "부산항 좌천리 감선의연부인회"를 결성하였으며 이어 "부산항 좌천리 단연동맹회""영도
국채보상부인회""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가 발기돼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여성들조차 "국난 앞에서 어찌 남녀의 차별이 있겠느냐"면서 솔선해
이 운동에 참여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때까지만 하여도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보수성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 영남지역에서 다른 지역보다 현저하게
여성들의 참여가 활발한 점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였다.
이는 경상도 지방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산.창원.마산 등지는
항구도시로 외래 문물과 보다 많이 접할 수 있어 개화의식이 높았던데 원인이 있었지 않나 생각된다.
여성들이 조직을 통하여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활동한 것은 이 운동이
처음이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의 경우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부녀.아동을 비롯해 짚신 콩나물장수 떡장수,나물파는 여인,술파는 여인,계집종 머슴 걸인 백정 마부들까지
국가가 있는 다음에 국민이 있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이는 옛날부터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이에 대처해온 민초들의 저력이
이때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분석된다.
국채보상운동은 각계 각층이 참여한 범국민적인 운동이었으나
지도원리가 확립되지 못한 채
애국충정만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당시 이 운동의 구심체로 떠올랐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강력한 전국적인 지도부로서 통일적 지도체계를 확립하지 못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도 했다.
또한 운동 주도층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미약해 국내의 저지세력과 일제의 탄압정책에 부딪치자
효율적으로 운동을 지속시켜 나갈 수 없었다.
범국민운동으로서의 국채보상운동은 끝내 광범위한 민중운동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좌절되는 불운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크게 앙양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은
그후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또 다른 하나가 학교
설립운동이었다.
관립학교는 관리의 양성에 편중하는 경향이 있어 고관의 자제가 주로 다녔으므로
당시의 민족적 욕구에 부응하기도 어려웠고 민족 교육에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실질적인 면에서 민족적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은 관립학교보다는 사립학교였다.
사립학교는 1883년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교 설립이후 별 진전이 없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점점 그 수가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1905년 러.일 전쟁서 승리한 일본이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자
근대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교남학회 서부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대동학회 등의 학회들은 을사조약 이후 지역성을 띠고
출신지역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지역사회의 개발과 문화향상,민족의식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이라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게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 부산은 1876년 개항 이후 밀어닥친 신문화를 수용함으로써 개화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고 아울러 자주 자강의 정신이 팽배,신교육을 통한 민족 교육을 희구하는 기운이 응집돼
여러 곳에서 학교가 설립됐다.
부산에서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는 1895년 5월 설립된 부산개성학교.
그러나 설립자 박기종의 취지와는 달리 개성학교는 일제 식민지 교육의 전초작업의
예비적 포석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교육사업이 추진되면서 최초로 근대식 여자학교인
부산진 일신여학교(1895년)가 설립됐다.
지역별로는 동래의 경우 "기영회"의 추진 아래 "동래부학교",1904년
"개양학교",1906년 "삼악학교",
1907년 11월 "동명학교",1908년 5월 "명륜학교"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1905년 5월 교육을 위한 "찬학연구회"가 조직되고 "부산친목회(1905)"가 중심이 돼 학교설립을 추진하였다.
또 교남교육회의 학교설립운동과 관련해 동래의 양진학교와 명진학교,진주의 신안학교,김해의 동명학교 등이
교남교육회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밖에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야학교가 초량(초량동립학교) 영주동(명진학교)
동래부(동래부숨면사립노동야학교)에 들어선다.
노동 야학은 애국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개항 이후 농촌지역의 경제파탄과 함께 농민들이 도시나
항구로 이주하여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연관돼 있었다.
그리고 국권회복에는 하층민까지 모두 참여해야 된다는 당대의 절박한 분위기로 인해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같은 노동야학교의 교육활동을 통한 근로자들의 의식 성장이 1921년에 일어났던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의 정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최경숙.부산외국어대 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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