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동래별장 주인 '하자마'
토지약탈
귀재, 소작농 2천여호 진영농장 소유
화려한 온천장의 현대식 건물에 눌린 채 간선도로의 안쪽에 비켜 서있는 동래별장은
해방이후 유명한 요정으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아직도 일본식
대저택의 멋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동래는 부산시내와 달리 한국인이 주로 거주하였으나
온천장은 일제가 일찍 강점해 호텔 별장 놀이시설 등 휴양지로 개발했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동래별장은 일본인 거부 하자마가 지은 휴양시설이었다.
그의 별장은 시내에도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동래별장으로 부른 듯싶다.
그는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로,부산상공회의소 특별의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 부산상업은행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하자마가 점원에서 거대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피와 눈물 덕분이었다.
1860년 일본 화가산현에서 태어난 그는 오사카의 오백정상점의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1880년 부산에 지배인으로 건너와 1899년에 독립했으며 5년후에는 부산에
본점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 마산 청진 성진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그는 특히 토지 가옥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었다.
외국인은 을사조약 이전에는 조계지(부산 초량 일대)밖 십리이내 이외에는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온갖 수단을 동원,부동산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주목되는 방법은 전당을 미끼로 한 토지약탈에서 보듯 불법적인 사기적
상술이었다.
한국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정한 날에 돈을 갚지 못하면
아무런 절차없이
즉시 가옥이나 전답을 빼앗는 방법을 즐겨 썼다.
담보물이 없어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게 되면 줄 때까지 채무자를 창고에 가두기도 했다.
일본제국주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축재에 혈안이 됐던 것이다.
하자마가 국가권력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마산포 사건 때문이었다.
1898년 마산포 개항이 결정되고 러시아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하자마에게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해 러시아의 진출시도를 막았던 것이다.
이 공로로 하자마는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절영도의 국유림 1백35만평을 한국정부로부터 대부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었다.
그는 이를 발판으로 이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으며 이중 75만평을 일본육군성에 매각하였고
백만평을 부산부에 기증하기도
했다.
하자마의 토지는 대부분 우리 선조의 삶과 직결된 시가지와
농지였다.
부산의 경우 도시민의 삶과 관련된 시가지는 하자마와 같은 일인지주 8명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산에 거주하는
조선사람을 비롯해 일본인 노동자들도
대부분 이들로부터 땅과 집을 빌려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돼지우리 같은 불량주택을 지어 세를
받아먹었다.
고지대의 달동네도 이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일제가 한국을 수탈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께부터 농지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다.동래 김해 밀양 산청 진주 울산 사천 부산 마산 창원 등지를 비롯하여
전북 남원,전남 해남에도
농경지를 확보해 나갔다.
1930년대의 소유규모는 경남에서만 7백80만여평이고 도내 소작지의 3.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 핵심이 김해군 진영면과 창원군 대산면 동면 등 3개 면에 걸친 진영농장이었다.
소작농이 2천여호였으며 일본인 소작농도 90호 가량 됐다.
진영농장은 무라이가 1905년 이후 개간 확대시켜온 대농장으로,
진영역이 접하고 있어 지주경영의 입지조건이 매우 좋은 곳이었다.
무라이는 교토출신으로 미국산 담배잎을 원료로 궐련을 제조 판매하여 담배왕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1905년 연초사업이 관영화되자 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자본가로 자본 전환을 꾀했다.
그러나 1927년 금융공황으로 은행이 도산하게 되자 다음해 3월 농장을 하자마에게
매각한 것이다.
이로써 하자마는 경남에서 제일 가는 땅 부자가 되었지만 당시 경제사정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일본에 불어닥치고
농업공황으로 이어지면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지주들은 손실을 보전하고 위기를 탈출할 경영강화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본시장에 값싼 쌀을 공급하는 책무를 맡은
하자마가 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농민수탈 강화책밖에 없었다.
이것은 농민의 생존과 관련된 소작권 박탈을 무기로 소작료를 무겁게 매기는 일로
나타났다.
정액으로 받던 정조지나 그때그때 소작료를 조정하던 조정지 등 모든 농지의 소작료를 인상했으며
소작료를 받지 않던 밭작물과
논의 이작에도 소작료를 부과했다.
이는 한국인 지주는 물론 동양척식회사나 조선흥업회사 식산은행 농장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던
악랄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금비사용을 강제하면서도 1~2할의 보조금밖에 지급하지
않아 농민부담을 가중시켰다.
농민들은 지주의 경영강화에 반발,1931년 10월 12월 초순과 12월 하순부터 다음해 2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투쟁을 전개했다.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지대인하 소작권보호 비료대금의 인하
등이었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여 타협을 시도하는 한편,경남도청(현재 법원 건물),
김해군청과 경찰서,창원군청과 경찰서 등 일제 당국에
진정하기도 했다.
여기에 수확거부투쟁 침묵시위투쟁 단식연좌농성 등의
실력행사도 병행해 투쟁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이에 따라 일제와 지주측에서는 농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에서 수습방안을 마련했지만
이같은 운동의 확대나 재발방지를 명분으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김해농민조합간부,청년동맹위원장 등 핵심 간부를 검거하는 등 강경책도
병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일제권력의 본질적 속성을 재인식한 농민들은
운동방식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갔다.
진정이나 시위 이외에 법정투쟁도
불사하는 등 "합법"공간을 적극 활용했으며
투쟁대상도 단순히 지주에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피검자 탈환투쟁 등 일제의 통치권력을 대상으로 삼아
정면 대결을 벌이는 등 항일민족투쟁으로 농민운동을 승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의 일제에 대한 빛나는 투쟁의 역사는 문헌 속에 화석화되어
버렸으며
현장에서는 어떠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된 점이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런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우리의 역사인식 태도의 한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원규.부산대 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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