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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1920년대 '부산지역 청년단체' 활동

금산금산 2014. 11. 14. 09:29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1920년대 부산지역 청년단체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당시까지 서울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운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지역문제에 기반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지역현안을 중심에 둔 대표적 민족운동청년회 활동이었다.

20년대 민족운동의 중요한 축으로서 활동하였던 청년회는 3.1운동 이후 고조된 운동역량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 걸쳐 청년단.청년구락부.청년회라는 다양한 명칭의 사용 속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리하여 1920년 12월1일 전국 1백20여개의 청년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청년단체의 총지도기관인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서울에서 결성하였다.

부산청년회도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부산청년회는 3.1운동을 전후하여

부산진 고관초량 영주동 목도(.현재 영도)부민 곡정(현재 아미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7개 청년회 또는 구락부 형태의 청년단체들이 1920년 11월말 결성한 단체이다.

초기에 친목의 성격으로 출발하였던 7개 단체들은 부산청년회로 집결하면서

20년대 전반기 부산지역 민족운동의 중심축으로 자리잡는다.

당시 청년단체들의 활동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청년회가 존재하는 지방에 들어가면 일종의 생명력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으나

존립치 못하는 지방에서는 적막감을 느낀다""동아일보"기사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부산청년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청년단체들은

지방개조.사회혁신.지식광구.건전한 사상으로 단결.산업진흥.세계개조 등과 같은

운동목표를 내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방침을 중심으로 한 청년단체들의 실력양성론을 흔히들 "문화운동"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친선도모 목적의 청년회(JC)또는 청소년 동아리와는

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초기 청년회 운동의 주도세력은 대개가 지역유지로서 지주이거나 자본가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후자의 범주에 속하는 민족자본가계층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 실시와 회사령 철폐라는

변화된 정세 속에서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표방한 "세계개조""지방개조""신문화창조"와 같은 실력양성론이

"문화운동"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분출구가 바로 청년회였다.

한편 부산청년회와 궤를 같이 하여 부산지역 "문화운동"을 배태시킨 단체는

1919년 11월과 12월에 각각 결성된 기미육영회부산예월회를 들 수 있다.

양 단체는 부산을 비롯한 인근지역 양심적 지주.자본가 40여명이 관여하여 결성한 조직으로

대표적 인물들로는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백산 안희제,구포은행 지배인 윤상은,

동래고등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동래은행 지배인을 지낸 김병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부산청년회와 동래청년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지역 청년들 중에서 장차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인물들을 선발하여 해외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제 때 국문학자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었던

이극로(독일.월북),전 문교부장관 안호상(독일),전 국방부장관 신성모(영국) 등이

기미육영회의 지원하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후 부산청년회는 21년 7월 청년회회관을 기공하면서 노동단체의 조직과 노동 영어 실업보습의 3개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의 권익보호 및 일반인들의 학구욕을 채워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전용]의 송도해수욕장에 맞서

부산진 앞바다(현 눌원빌딩 일대)에 [한국인 해수욕장]을 개장하였으며

가을에는 부산진 매축지(현 조방앞 일대)추계시민대운동회를 개최하여

지역민의 연대를 통한 일반대중의 이익증진에 노력하였다.

더구나 부산청년회는 1921년 9월 부산부두총파업이 발생하였을 때 부산청년회에 초기부터 관여하였던

김종범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선언서 3천장을 인쇄하여 배포하는 등 파업 초기부터 적극 관여하였다.

이는 부산부두총파업의 성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동래에서도 1920년 1월을 전후해서 동래청년구락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동래청년구락부는 그 명칭을 1922년 2월 동래청년회로 변경했다.

여타의 청년단체들이 그랬듯이 동래청년구락부 역시 김해시민대회와 삭전(.동래줄다리기)놀이에 참여하여

지역 주민과 교류를 넓히는 한편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은데 따른 온천장 일대 동래권번.예기들의

문란을 단속하여 사회풍기 개량에 노력했다.

이밖에 동래지역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대운동장 확보를 위해 온천장 일대에 상당한 땅을 소유했던 일본인 온천장번영회와 부산와사회사(.현 한전부산본부)를 상대로 운동장부지 확보 교섭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밖에 동래청년구락부는 주민들의 교육.산업.위생에 관한 문화보급을 목적으로 동래군 중에서

농촌지역에 해당하는 일광면 기장면 구포면 서면 등지 각면에 순회강연단을 파견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동래청년구락부와 부산청년회는 1923년을 기점으로 내부적인 성격변화 과정을 겪는다.

곧 초기 청년회운동을 주도하였던 지역명망가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소장그룹을 중심으로

신진청년들이 대거 청년단체의 실질적 담당세력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운동노선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이 무렵 빠른 속도로 국내에 확산되고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결과 1925년이 되면 사회주의 이념지향의 조직으로 노동자계급(4계급)을 대변한다는

"제4동우회"와 일제의 계급착취제도를 타파한다는 의미의 "혁파회"가 부산과 동래에 각각 결성된다.

이런 조직의 출현은 지역명망가 중심의 기존 청년단체를

기층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청년회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이런 모습은 "제4동우회"에서 활동하였던 김희봉 차학순과 같은 인물이

1925년 11월 부산인쇄직공파업에 적극 참여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부산청년회와 동래청년회는 1925년 "혁신총회"를 통해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그해 연말에 이르러 지역별 청년단체를 총지도할 수 있는 부산청년연맹과 동래청년연맹을 각각 결성하였다.

이후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출현하게 되는 신간회 결성과 맞물려

 청년연맹은 부산청년동맹과 동래청년동맹으로 재차 자기변신을 거듭한다.

그후 부산청년동맹과 동래청년동맹은 신간회 부산지회와 동래지회가 존속하는 기간 동안

신간회 지회와 협조관계 속에서 반일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김승.밀양대 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