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감옥공장'

금산금산 2014. 11. 26. 21:18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감옥공장' 파업으로 일제 착취 항거

 

 

 

 

일제하 농촌의 여성들은 집안 가계를 돕기 위하여 공장으로 내몰렸다.

당시 농촌의 여성들이 쉽게 배워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대표적 공장은 면방직 공장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공장은 부산의 "조선방직주식회사"였다.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조방"이라고 줄여서 불렸고 오늘날 범일동의 "조방앞"이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1968년에 문을 닫았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평화시장과 중앙시장이 들어서 있다.

종업원이 2천3백여명이나 되는 대규모 공장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공장이었다.

조방은 1917년에 독점재벌 미츠이계통에서 물러난 일본인 우마코시 야마모토 중외산업등이 설립하였다.

1919년에 공장을 완성하였으나 불이 나는 바람에 1921년에 가서야 정상적으로 가동하게 되었다.

조방은 방적기 3만2천추,직기1천5백대로 면사와 면포를 생산하여 조선과 중국에 판매하였다.

1930년대에는 대구 김천 대전 사리원 등과 중국의 영구에도 방직공장을 세울 정도였다.

자본금도 처음에 5백만원으로 시작하였지만 1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조방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공들의 값싼 노동력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부산의 중심 공업이었던 섬유공업과 신발공업은 노동력을 최대한 싸게 사용하고 월급이라고 주었던 돈도 공구비나 벌금제도를 통해 다시 빼앗는 놀부방식으로 자본을 축적하였던 것이다.

또 죽지 않을 정도만큼의 열악한 노동조건도 그들의 자본금을 키우는데 한몫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29년에 야간작업이 폐지되었지만 식민지 조선에는 여전히 야간작업이 존재했다.

거의 38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실내온도와 시끄러운 기계소리,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서 주야 교대제로

기계를 계속 돌려댔다.

피곤에 지친 여공들이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한 방에 13명이 같이 사는 좁은 공간에 자유로이 문밖을

출입할 수도 없는 생활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어느 책에는 당시 여공기숙사 "마굿간"이라고 표현하였다.

기숙사는 여공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출입문을 한쪽으로 만들었으며

감사가 늘 감시하여 마치 "감옥"과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문밖출입권을 없애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조방에서 계속 파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30년대가 되면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위한 물자조달기지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때가 되면 면방직공장도 군용면포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때 조방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난 것은 현상적으로는 8시간 노동시간 확보 등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자본가와 대결하기 위하여 조방의 노동자들은 중락회를 만들었으며 1930년 1월 드디어 파업을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무기는 파업이다.

노동자들이 일하지 않으면 공장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나 돈과 무력,권력이 있는 자본가들은 갖은 방법으로 파업노동자들을 회유.해고.체포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1930년 1월의 파업은 지역운동가와 현장노동자들이 연계하여 파업을 전개시켰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부산지역은 물론 전국의 노동단체.청년단체에서 열렬하게 성원하였다.

파업이 발생하자 회사측에서는 통근직공들을 출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중락회는 자성대에 파업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기숙사 여공들은 공장 안에서 추운 겨울 소방호수로 물세례를 받으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아사동맹을 벌였다.그러나 그 파업도 일제 자본가의 갖은 술수와 경찰의 탄압으로 무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파업이 실패한 뒤 오는 것은 바로 주모자 체포와 대량 해고다.

많은 조방파업관련 지역운동가들이 체포되었고 남녀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해고도 모자라 주동자와 파업에 참가한 수많은 여공들을 부산에서 추방하였다.

파업 이후에도 조방의 여공들은 묵묵히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고 그들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지역운동가로 변신하는 등 근대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흔히 근대여성이라면 많이 배우고 말끔하게 개량한복을 차려 입은 신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만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머리"와 "박가분"(오늘날의 파운데이션)도 못바른

조방의 여공들도,근대여성으로서 공장의 불빛을 밝히며 인류 문명 발전을 위해 책임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지의 여성이면서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바로 그 여공들의 모습은 곧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조방앞"을 지나면서 조선의 여공들,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삼가 애도하는 마음을 보낸다.

/김경남.부산대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