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친일파'
`요화`에서 종교인까지 일제 `忠犬`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친일파는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위한 대리인,안전판 역할을 한
식민지 지배정책의 산물로서 민족분열정책의 하나로 식민지 조선사회 내에 양산되었다.
친일파는 일제의 침략으로 생긴 개항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부산은 대표적 개항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 뿌리가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친일파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류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던 자들이다.
그들은 일제의 사법 경찰기관에서 책임적 지위에 복무하였으며 형사.밀정.정찰 등 특무에 종사하며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물론 각계각층의 애국지사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밀정의 대표적 인물로 경남 김해 출신이며 부산 영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한 배정자를 들
수 있다.
일제시기 요화로 불렸던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녀는 또한 일제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무릅쓰고 정보를 얻어내었던 누구보다 탁월한 일제의 충견이었다.
배정자는 1870년 김해에서 밀양부의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분남이었다.
배정자라는 이름은 나중에 이토가 직접 지어준 일본 이름 다야마 데이코에서 비롯된 것이다.
러일전쟁 중 배정자는
이토가 고종에게 보내는 밀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고종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것을 염려한 친러파 내각은 일제의 밀정 배정자의 밀서 전달을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이 밀서사건으로 그녀는 1905년 2월에 부산 영도로 3년 유배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같은해
11월에 석방되었다.
그녀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라며
동포 여성 1백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로 끌고 갔다.
그녀는 동포
여성들을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들의 노리갯감으로 바치면서까지 일제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또한 자신의 출세와 영화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민족반역 행위를 한 경우도 있으니
대표적 사례가 박춘금이다.
박춘금은 밀양 출생으로 그의 이름은 폭력계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는 3.1운동 당시만 해도 대구의 도리우치패,김천의 백골패 등과 함께 세간에 그 위세를 떨치던
부산 상애회패의 두령이었다.
박춘금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폭력배들을 모아서 상애회 본부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개인의 출세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던 중 마침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동포를 처참히 학살하고 이"공로"로 일본
"대의사"로 입신양명하여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협잡배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갖은 악행을 저질렀던 박은 해방이 되자 일본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이외에도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황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친일 부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황국신민화
정책은 황민화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부산에서 황민화
운동,민족정신말살 운동에 적극 협력했던 대표적 인물로 교육.종교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R씨를 들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부산의 사립학교 재단 이사장과 종교 지도자를 역임했던 그는
종교계의 황민화 운동 추진단체의 수뇌간부로 활약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했다.
그리고 그는 이에 반대하는 신앙인을 밀고하거나 일본 경찰과 결탁해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대해 "쓸데없는 딴 장난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민족대표 33인중의 기독교 대표자에 대하여 교회를 사욕에 이용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모욕하기도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과정에서 한 증인은 그에 대해
"반민법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더구나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의견서에서 "조국광복에 종교계의 공헌이 크다고 하면
할수록 본 피의자의 죄적은 현저할 것이다"라고 잘 대비시켜 놓아 그의 죄상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그가 반민특위 조사
과정에서 전혀 반성하는 빛도 없이 본의가 아니었고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대체로 친일파들은 이런 식이었다.
이외에도 부산지역의 친일파로서는
동래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던 노덕술,고문 잘하기로 유명하였던 하판락,
경찰관 교습소 교관이었던 노기주,일어 사용과 신사참배를 강요한 부산부 사회계장 김상홍,
사이비 언론인으로 경찰정보원 노릇을 한 곽경종,또 종교인으로 황군위문을 주도했던 범어사주지 차상명과 통도사주지 김정석 등 그 수는 엄청나다.
그들 대다수는 끝끝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치스런 일생을 마쳤으며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의 수치가 되었다.
친일파는 민족자주의 의지를 상실하고 외세에 기생하여 자신의 안위를 돌보려는
민족반역자들이었다.
반민특위가 초창기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과 친일파의 방해와 자체의 한계로 말미암아
결국 친일세력을 처벌하는데
실패했지만 역사의 심판과 교훈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동일.동아대 박사과정.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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