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민주의 새벽 부른 '독재타도' 민중의 함성 -'80년 민주'의 봄
'
"모든 효원인이여,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16일 10시 도서관으로."
독재자의 압제에 맞서 식어가는 정열과 희미한 진실을 뜨겁게 불태우자는 한 장의 유인물이
뿌려지자
부산대 학생들은 대열을 지어 도서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수백명이 어깨를 걸고 "유신철폐"를 외치며 교정을 돌자 강의를 듣던
학생들까지 뛰쳐나와 그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이날의 시위는 독재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부마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1972년 박정희정권은 영구집권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면서
독재정치의 상징으로
오늘날 얘기하는 유신체제를 탄생시켰다.
유신정권은 긴급조치,반공법,국가보안법을 무기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철저히 막았고
이후 암흑의 시대가 7년간 지속되었다.
어둠을 몰아 내려는 시도는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재야지도자 장준하의 의문사로 보듯이 새벽은 멀게만
느껴졌다.
한편으로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일컬어지던
극단적 기아를 추방하는 성과를 거뒀으나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1970년대초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1979년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위에 나타났다.
16일 오후 수천명의 부산대 시위대는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부영극장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2백~3백명씩 모여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펼쳤다.
학생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시민들은 힘찬 박수와 격려로 성원을 보냈고
상인들은 경찰에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거나 음식을 나누어주면서 동조했다.
유신독재의 강요된 침묵을 거부하는 젊은 함성이 높아가자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부산 시민의
억눌린 열망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귀가하던 직장인과 노동자,고등학생이
속속 대열에 합세하자 시위는 삽시간에 거대한 민중항쟁으로 변했다.
시청 앞과 충무동 입구에는 5만여명의 인파가 물결을 이루면서 "유신철폐""독재타도"를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암울하던 기운은 사라지고 거리는 어느새 민주와 자유의 새벽을 노래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시위대의 수가 늘어나자 당혹한 경찰은 더욱 가혹하게 대응하였다.
부상당한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분노는 거세졌다.
밤 10시부터 통금을 실시한다는 경찰의 방송에도 동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날 부산대학교는 임시휴교 조치로 교문을 닫았으나 부산 시민들은
저녁 무렵 시내에 모여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위를 이어갔다.
그들은 관공서와 항쟁의 발생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은 신문사를 공격하면서
정권을 대변하는 기관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한편 18일
마산에서는 경남대생을 필두로 시위가 일어났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냈던 "3.15 의거의 후예"라는 긍지를 품고 있던 마산 시민 1만여명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독재타도""박정희 하야"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펼쳤다.
그들은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의 주구로 상징되던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파출소를 공격했다.
수출자유지역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까지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보다 한층 더 격렬한 양상을 나타냈다.
민중의 올바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독재정권은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는
역사적 진리를
박정희정권은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박정권은 10월18일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마산.창원에는 19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항쟁을 저지하고자 했다.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각 대학교와 관공서에 배치되었으며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진압을 가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부상당했고 결국 18일 부산은 3일에 걸친 민주항쟁의 막을 내렸다.
마산항쟁도 이틀만인 20일 새벽 진압되고 말았다.
조직적 지도부와 뚜렷한
구심점없이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부마항쟁은
독재정권의 폭력적 대응으로 인해 며칠만에 종결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독재정권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마침내 10월26일 군부독재는 막을 내렸다.
탄압과 공포의 독재시대가 종결된 것은 박정희의 죽음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하지만 그 뒤에는 장기집권 정부의 말기적 지배에 대항한 민중의 강력한 민주화 열망과 요구가 있었으며
부마항쟁은 그 정점에 있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항쟁은 4.19 이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과
다수 시민이 봉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부마항쟁은 유신의 억압적 통치구조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분출된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우리가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부마항쟁은
찬란한 지역적 항거로 각인되었다.
항쟁의 결과 민족.민주운동의 변방으로 취급받아오던 부산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으며
지역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부마항쟁에서 드러난 민중의 역량은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항쟁""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지면서 80년대 민주항쟁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산의 반독재투쟁은 1987년 6월 직선개헌과 정권타도를 위한 전국적 항거와 함께 다시 치솟아 올랐다.
그것은 부마민주항쟁의 부활이었다.
노기영.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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