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박종철군 추도집회가 `신호탄` 독재정권 백골단에 맞선 시민들
전두환 독재정권으로부터 "6.29"항복선언을 받아낸 "6월항쟁"은
1987년 1월14일 부산 출신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부터 시작됐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과정에서 발생한 박군의 죽음이 15일 보도되면서
정국은 "개헌정국"에서 "고문치사정국"으로 급변했다.
박군의 죽음을 독재정권이 자행한 민주화세력에 대한 살인행위로 규정한
부산시민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산 재야인사들은 박종철군 추도집회를 준비하며
독재정권에 대한 전면적 항쟁의 신호탄을 올렸다.
2월7일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개최된 추도회(부산에서는 신창동 대각사
앞)를 계기로
전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집회를 무산시키는 한편 재야인사에 대한
사전 가택연금,연행,구속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같은
경색정국에도 불구하고 3월3일에는 대각사 앞에서 "박종철군 추모 3.3 부산대행진"이 열렸고
사하구에 있는 사리암에서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속에
박종철군 49재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민족문화의 거두요 부산의 어른이신 고 요산 김정한 선생은
"박군의 죽음은 4천만 민중속에 깊이 살아 있으며 우리는 박군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지의 애도사를 통해 항쟁의 나아갈 바를 제시했다.
"2.7""3.3"집회를 거치면서 백골단을 앞세운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을 목격한
시민들은
전두환정권의 폭력성과 무자비함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민주세력의 강력한 후원자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전기를 마련했다.
거듭되는 민주화 요구에 위기의식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국면전환을 시도했으나
이것은 항쟁의 용광로에 기름을 붓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4.13 호헌조치를 계기로 지식인들이 민주화 투쟁에 새롭게 참여,강력한 저항으로
독재정권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호헌"의 부당함과 시국수습을 촉구하는 지식인의 시국선언이 순식간에 정국을 휩쓸었다.
부산에서도 교수 목사 신부 의사 등에서부터 호헌철폐 시국선언이 연이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산발적인 시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5월17일 노동자 황보영국씨가 옛 부산상고 앞 복개도로에서 "독재타도.호헌철폐.광주학살규명"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한 사건은 부산시민의 반독재 투쟁결의를 더욱 굳게 만든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 재야인사 학생 야당인사 지식인 노동자 시민대중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하나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5월20일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주 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가 결성되어
부산지역 6월항쟁을 이끌 통일전선 지도부가 꾸려지게 된 것이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10일 대각사 앞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던
"고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에 의해 원천 봉쇄되자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이 부산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게 됐고
여기에 시민들이 시위대에 가세하면서 6월항쟁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6월16일 심야시위 도중 경찰에 밀린 시위대가 대청동 가톨릭센터로 피신하면서
"가톨릭센터 농성"을 전개하게 되었다.
6일간 계속된 이 농성은 부산 6월항쟁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금까지 학생이 시위를 이끄는 형태에서 16일 이후에는 시민이 시위를 주도하는 양상으로
양적 질적 전환을 하게 됐다.
이러한 부산의 드높은 항쟁 열기는 식어가던 서울 등
다른 지역의 분위기를 다시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가톨릭센터 농성자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은 절대적이었다.
여고생은 음식과 격려편지를,시민들은 성금과 속옷 등 생활품을 보내왔고
심지어 시위를 진압하는 전경까지 성금이 든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가톨릭센터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시내에서는 17일부터 20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수십만의 인파가 한밤중까지,특히 19일과 20일에는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시위로 인해 교통이 마비돼도 지나는 곳마다 버스에서 그리고 길가에서 시민들은
박수로 환영하며
음료수 담배 빵 랩(최류탄 가스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 심지어는 성금까지 아낌없이 지원하여
격려했으며 시위대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중.고생들도 시위대에 가세,"우리의 소원은 통일""아침이슬""애국가" 등을 부르며 "독재타도"에 힘을 모았다.
KBS 파출소 민정당사 등이 시위대의 표적이 됐으나 지도부의 만류와 참가자의
자제로 큰 피해는 없었다.
수십만 인파의 시위대였지만 질서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투쟁의 열기가 더욱 높아지고 있던
6월18일,좌천동 입체교차로에서
시위하던 이태춘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처럼 고귀한 생명까지 바치며 민주화를 외쳤던 부산지역의 6월항쟁은
진정한 "민주사회"의 도래라는 새 희망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
도대체 이런 시민항쟁정신이 어디서 나왔을까?
4.19혁명,부마항쟁으로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했던 민주성지로서의 자부심,시작했다 하면
끝을 보는 불굴의 부산사람들 기질,박종철 이한열 황보영국 이태춘 열사의 의로운 죽음에 대한
산
자로서의 최소한의 보답,그리고 애국의 열정이 아니었을까.
"6.29 대국민 항복선언"이 "속이구"로 변질되어 노태우 정권으로 군사
독재정권이 연장되었으나
"문민정부",지금의 "국민의 정부"로 이어지는 변화와 개혁의 출발은 6월항쟁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것이다.
6월항쟁의 중심지 서면 남포동 부산역
범일동 연산동 가톨릭센터는 11년 전 역사의 현장을 품에 안은채
일상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항쟁의 주역 부산시민들도 항쟁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힘들게 IMF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불의한 정권,독재정권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6월정신,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려는
6월정신이 살아있는 한 민중이 움직이는 우리 역사는 결코 후퇴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이흥만.동명정보고 교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과학·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범어사 (0) | 2014.12.24 |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동래에 '변한' 독로국 있었다 (0) | 2014.12.17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80년 민주'의 봄 (0) | 2014.12.04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감옥공장' (0) | 2014.11.26 |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친일파' (0) | 2014.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