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범어사

금산금산 2014. 12. 24. 20:21

'범어사'

 

 

 

경허선사 영향 항일민족불교의 정신적 기반

 

 

 

 

범어사 숲속에는 싱그런 솔향기가 배어 있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보이는 당간지주를 지나면 중앙에 조계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만난다.

이 문은 돌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는 독특한 구조로 구성되었는데

3칸 건물의 오른쪽에는 "선찰대본산",왼쪽에는 "금정산 범어사"라는 현판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엄종 사찰로서 융성하였지만 근대에 와서 선풍의 진작으로 인해

선종사찰의 대표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범어사 대웅전은 전면 3칸,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식 가구의 양식적 특성과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범어사는 처음 세워졌을 때 그 모습 그대로일까?

조선 영조 22년(1746) 동계스님이 간행한 "범어사 창건 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신라 흥덕왕 때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이라고 한다.

의상대사는 흥덕왕 이전에 활약한 사람이며 지금의 범어사에는 의상대사가 활동하던 시기의 유물이나

자료가 전혀 없으므로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대체로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당에서 돌아왔던 문무왕 때에 창건되었다가

창건 사적에 나오는 흥덕왕대에 실질적으로 건립되었다고 본다.

9세기에 범어사가 대규모 사찰로 건립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무렵 불교의 중심교단이었던 화엄종이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음을 알려주는 징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로 불교 대중화가 더욱 확산되는 가운데 화엄종 신인종 법상종 등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종파가 점차 발전하면서 지방사회에까지 확산되어 화엄십찰찬)과 같이

지방에 사원이 건립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범어사도 바로 이런 과정에서 세워진 사찰이라 할 수 있다.

또 창건 설화에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영험담이 보이는데 이것은 당시 왜의 침입에 대한

지배층의 대비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변경지역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왜를 막으려 하였으며 아울러 사찰을 왜적의 침입을 막는

실질적인 군사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이중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따라서 범어사는 국토 남단에 위치한 호국불교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이렇게 세워진 범어사는 안타깝게도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크게 불탔다.

이때 범어사와 관련된 기록들이 모두 소실되었을 것이다.

당시 범어사가 위치한 동래는 조선의 최전선기지 사수와 왜군의 교두보 확보라는 전략적 이해가 얽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범어사도 파괴,약탈되었다.

이후 선조 35년(1602)에 관선사가 중건하였지만 곧 화재로 불탔고 다시 광해군 5년(1613)에 헌감,묘전 등

여러 스님들이 중창하였다.

이후 일제시기의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무애행으로 유명한 경허선사가 만년에 범어사에 선원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범어사는 1910년에 한국 불교의 선종 수사찰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1913년에는 다시 선찰 대본산으로 확정돼었다.

선원과 선회의 창설을 통해 선사상을 강조하는 범어사의 사상적 경향은 경허선사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191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에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과 이후 항일 민족불교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다.

더구나 선종 부흥을 꾀하면서 선학원을 1921년 설립할 때도 서울의 범어사 포교당을 이용하였고

1922년 선학원 활성화를 위해 선우공제회를 창립할 때 범어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범어사는 교육 부문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명정학교를 설립하였고 1917년에는 지방 학림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포교소(당)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포교소는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교육 계몽적인 기능까지

수반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동래에 설치한 포교당이 1921년부터 경영한 "싯달 야학교"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배출된 청년 승려들과 빈한한 농민의 자제들이 당시 민족 운동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이는 범어사가 동래 지역의 3.1운동과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사회 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범어사는 민족사찰로서 불교 수호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탁월한 지도력과 당대의 선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동산스님이 범어사를 이끌었다.

동산 스님은 특히 1950년대의 소위 정화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는 근대 불교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범어사의 사상적인 맥락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불교에서 범어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처럼 컸으며 고승들의 선풍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조원영 밀양대 강사.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