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동래온천'

금산금산 2014. 12. 31. 20:18

'동래온천'

 

 

 

 

고려인들 찾아와 풍류 즐긴 안식처

 

 

 

 

                                                        

 

 

 

부산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동래 온천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려한 금정산을 배후로 하고 온천물이 샘솟던 동래는 예로부터 유명한 온천지의 하나로 손꼽혔다.

신라 신문왕 때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당시 동래현)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

기록("삼국유사"권3,탑상4 영취사)으로 보아 동래 온천은 일찍부터 온천으로서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권23 동래현조는 동래의 온정에 관하여 그 온도가 달걀도 익힐 만하며

 병을 가진 사람이 여기서 목욕을 하면 이내 병이 낫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왕들도 수차례 이곳을 다녀갔음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동래 온천은 온도와 약효가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고려의 유명한 문인이었던 이규보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있다.

<유황이 수원에 녹아 있다고 믿지 않았고,

도리어 양곡에서 아침해를 목욕시키는 것인가 하였네

땅이 외져서 양귀비가 더럽히는 것을 면하였으니

길손으로서 잠시 멱 감아보면 어떠하리>



이규보의 시에 따르면 아마도 동래온천은 유황이 녹아있는 온천이었고

약효는 고려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선초의 학자 김종직은 "우뚝 솟은 금정산 그 아래 유황물이 있네,천년동안 삶는 듯 끓어

                 계란을 삶을 정도라네"라고 한 데에서도 보듯이 동래 온천이 유황온천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온천의 종류를 나누는 기준으로 동래온천은 온도 섭씨 62도로 염소이온이 가장 많은

약식염천이라고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적 분류와는 달리 당시의 동래온천에서는 유황냄새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아마 이러한 동래온천에서 이규보도 온천욕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가 온 시점이 정확하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경주.운문산 등지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일어났을 때 이의 진압을 위해 자원종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동래 온천을 다녀갔으리라 짐작된다.

고려 충숙.충혜왕 때 벼슬을 한 정포는 "고려사"권106,정해전에 들어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정포는 시문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정포의 동래에 관한 오언율시가 "동문선"에 "동래잡시"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정포 또한 동래온천을 돌아보고 목욕을 한 감회를 시로 기록해 놓고 있다.

정포는 충혜왕 때 울산으로 귀양온 적이 있는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아마도 이때쯤으로 여겨진다.

정포는 충혜왕 때 좌사의대부라는 관직에 올라 정치에 대해 비판.충고하는 글을 많이 지어 올렸는데

이런 연유로 당시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를 참소하여 울산으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정포가 귀양을 와서도 시를 읊고 태연자약하게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즈음에 그는 동래를 돌아보며

소하정 적취헌 온정 및 해운대를 보고 느꼈던 감회를 "동래잡시"로 남긴 것 같다.

동래에 관련된 시를 남긴 이로 공민왕 때 문신으로 좌사의대부에 올라 중앙의 요직을 맡았던 정포의 아들,

정추를 들 수 있다.

그는 공민왕 15년 무렵 신흥사대부 이존오와 함께 신돈을 탄핵하다가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동래에 관한 "동래회고시"라는 연작시를 남겼는데 여기서 해운대,겸효대 소하정 정과정 등을 소재로 하여

여러 가지 풍물과 전설을 읊고 있다.

충선왕 때 벼슬을 한 박효수도 "동국여지승람"동래현조에 동래 온정에 관한 시문을 남기고 있다.

박효수는 당시에 지조있는 인물로서 유명하였는데 그런 그가 동래 온천장에 와서 목욕을 하면서

느낀 감회를 통해 당시의 온천 모습이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시의 첫머리에 "골짜기 깊숙한 곳,돌못이 펼쳐 있어 맑게 흔들리는 물 가득히 괴어 있네,."라고 하여

골짜기 깊숙한 곳의 노천에 온천이 있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노천탕이 아니었을까라고 여겨지는데 박효수는 여기서 목욕을 하면서 자신이

마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젖어"황홀하게 꿈속에서 무하유향을 노는 듯 하구나"라고 읊었다.

현재의 온천장은 향락가로 변해 버렸지만 당시의 동래 온정은 고려인들에게 또 하나의 안식처로서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부산사람으로서 금정산과 그 산자락에 포근하게 싸여 있는 동래 온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자원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

자못 부끄러울 뿐이다.

 

/김기섭.부산대 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