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에 '변한' 독로국 있었다
부산에서의 국가태동
▲ 동래에 있었던 변한 독로국의 고고학 자료는 구서동 노포동유적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발견됐다.
사진은 독로국의 근거지중 하나였던 노포동 지하철 차량기지 일대의 전경. 김상겸기자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고인돌을 부산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고인돌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유적 자체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후대의 무분별한 유적파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나
부산에서도 고인돌이 존재하였음이 일부 문헌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부산지역에서 신석기시대 패총유적이나 삼국시대 고분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점과 비교할 때
고인돌유적의 수는 애초부터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은 세형동검이라고 불리는 칼이다.
이 칼은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신분이
보통 사람보다 높았음을 과시하는 상징물 구실도 했다.
당시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일반 성원들을 모아 놓고
각종 행사,특히 종교행사를 벌일 때에 이 칼과 청동으로 만든 거울,방울을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청동기가 파란색을 띠는 것은 녹이 슬어서 그런 것이지 원래의 색은
찬란한 황금빛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신기한 물건들을 몸에 달고 손으로
휘두르면서 햇빛이 물건에 반사되면
그 사람의 몸에서 광채가 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물건들을 소유한 사람은 태양(하늘)과 통하는
살,즉 하늘의 자손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법하다.
세속적인 권력이 아직은
미약하던 청동기시대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일반 성원들을 통제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소중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함께 넣어
주었다.
부산지역에서는 이러한 청동기들이 발견된 예가 매우 드물다.
하지만 고인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적의 파괴나 조사의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근의 김해나 진영에서는 이러한 청동유물이
자주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부산에서도 이러한 유물들이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까지는 고인돌이나 청동기 등의 자료가 별로 없기 때문에
계급의 발생과
정치권력의 태동 과정에 대한 연구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새로 철기가 보급되어 가던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세기~기원전 1세기)의 유적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기원후 3백년 경까지를 학계에서는 원삼국시대,혹은 삼한시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를 부산에 적용시키자면 삼한의 하나인 변한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역사서술은 중국의 "삼국지"가 거의
유일하다.
물론 우리쪽 사서인 "삼국사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 관한 서술내용에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그나마 부산지역과 관련된 기사는 더더욱 드문 형편이다.
"삼국지"에는 변한과 진한을 구성한 24개국의 명칭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 중 변한 독로국이 부산 동래에 해당된다.
독로국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바다건너 일본(왜)으로 가는 고대 항로에서
인근의 김해 구야국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을 것이다.
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접한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특별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이라는 것을 후대의 국가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영토의 넓이나 국민의
수,권력의 강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은 작고 미숙한 국가적 형태였다.
국가형성의 태동기,혹은 국가체제를 향하여 달려가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독로국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독로국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구서동에서 출토된 토기,노포동에서 발견된 무덤떼,복천동의 무덤떼와 동래패총 등을 들 수 있다.
구서동유적은 원래 무덤이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이미 파괴되어 버렸을 것으로
판단된다.
노포동유적은 3세기에 해당되는 무덤들로서 그 중에는 무덤의 크기나 부장품의 양에서 앞서는 것들이 있어
일반성원보다 우세한 개인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독로국 최고 지배자의 무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동래 복천동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복천동고분군은
부산에서 가장 중심적인
고분군으로서 무덤의 입지,규모,부장품의 면에서 다른 유적들을 압도한다.
따라서 4~6세기 경 부산지역 최고 강자(지배세력)의
공동묘지가 현재의 복천동 구릉에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구릉에 조성된
최고 지배자의 무덤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8호분의 연대는 4세기 전반경인데
그 이전의 무덤들은 구릉 아래쪽에 자리잡았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그 곳은 주택가로 변해 버렸고 유적도 이미 파괴되었을
것으로 여겨져 안타깝다.
아마도 인근의 김해 구지로유적,창원 다호리유적의 양상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호리유적은 기원전 1세기에 해당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돼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던 바로 그 유적이다.
부산에서 다호리유적에 필적할 만한 유적을 찾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아무튼 복천동고분군의 경우를 볼 때 늦어도 4세기 전반경이 되면
독로국의 지배자는 일반성원들을 압도하는 강자로 군림하였으며
그는 철을 매개로 한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교역망에서
김해 구야국의 세력과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복천동 고분군에 부장된 막대한 철기의 양과 외래계 유물의 존재가 그 증거물이 아니겠는가.
/권오영.한신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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