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백산 안희제' 선생의 애국운동

금산금산 2014. 11. 5. 20:52

[이야기로 푸는 부산의 역사]

'백산 안희제' 선생의 애국운동

 

 

'신비한 족적' 그것은 항일횟불이었다

 

                                                                                     

 

 

민족사상의 고취자요,민족교육의 선각자요,민족자본의 육성자요,민족언론의 선구자이면서 독립투사였지만

즐겨 카이저 콧수염을 기르고 다니며 언제나 멋을 아는 신사였던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설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창의성이 풍부했고 말이 나오면 청산유수 같이 좌담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는 고향에서 족형 안익제에게 한학을 수학하고 1905년 을사조약의 소식을 접하자

"국가가 망했는데 선비가 어디 살 것입니까?라고 한탄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하여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공맹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간에 숨어서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라고 조부에게 고한 뒤 상경,

홍화학교,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양정의숙을 졸업하였다.

이 시기 백산은 신문학을 통한 자주독립운동사상에 고취되어 보성.양정학우들을 중심으로 한 청년지사들과

교유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고향인 의령군에 의신학교,창남학교,구포에 윤상은과 구명학교를 설립하고

영남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회 등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10월에는 부산에서 서상일 김동삼 남형우 등과 함께 영남지역 청년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이자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국권회복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려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으로 그 뜻을 펼칠 수 없자 일본견학이라 소문을 내고는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가서 6개월간 머물게 된다.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민족지도자들과 조국광복의 계책을 의논한 후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 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한다.

이후 그는 고향의 친우 최병찬이 폐병에 걸리자 그를 봉천의 병원에 입원시킨 뒤

만주로 나와 그곳의 독립운동단체를 방문한 후 1914년 9월 부산항을 통해 귀향한다.

부산에서 자리잡은 백산은 고향 전답을 팔아 초량 객주인 이유석 추요식과 더불어

부산 동광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조선국권회복단"사건으로 일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리기관인 것처럼 보였으나

상해임시정부의 국내연락과 그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설립된 독립운동의 국내후원기관이었다.

백산상회는 임정과 백산과의 관계,나아가 우리고장과 임정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활동무대였다.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는 현재 백산기념관이 들어서 언제라도 백산의 애국정신을 접할 수 있어 다행이다.

백산은 이른바 "임정36호"의 국내 책임자로 미국 중국의 첩보조직과 연계를 맺고 활동했다.

변장술에 능하여 족적이 항상 신비로웠으며 총독부에서도 그를 정체불명의 인물로 보았다.

백산은 때때로 금테안경에 일본옷을 입고 다녔으며 단장을 짚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고급호텔에 투숙함으로써 일경의 시선을 따돌렸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교묘히 위장하며 활동한 백산은

장차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기미육영회"를 조직,

국내 및 해외에 유학시킬 우수한 청년을 선발한다.

또한"부산예월회"를 조직하여 민족자본가들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부산지역의 사회운동과 민족자본육성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특히 언론창달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동아일보 발기인에 참여,부산지국장을 역임한 후

영남지방 유지들과 "시대일보"를 인수한 뒤"중외일보"로 개칭해 경영하기도 했다.

그러다 필화사건으로 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은 후 1929년 1월 복간,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당시로서는 최초로 조석간 4면씩 8면을 발행하는 등 의욕을 보인다.

이로써 조선.동아일보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다가 결국 재력부족으로

1931년 6월19일 종간호를 낸 후 신문사 문을 닫았다.

백산의 언론활동은 단순한 언론경영의 차원을 넘어 항일민족운동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산은 1930년대 미증유의 대수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전조선수재구제회"를 조직해

 수재민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에서의 활동을 청산하고 1931년 그가 평소에 구상해오던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실행하고자 중국으로 망명해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에서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게 된다.

그는 경북 봉화 금정광산 개발로 많은 돈을 번 김태원의 도움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개간한 뒤

실농민 3백여호를 이곳으로 이농시켜 자작농제를 시행하며 독립에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여기서도 "발해보통학교"를 설립,스스로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광복의 그날을 기다렸다.

강대민.경성대교수.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