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흔적
'동래'를 호령한 '6백년 철의 왕국'
동래는 이른 시기부터 부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해왔다.
넓은 분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황령산과 장산을 좌우로 끼고 온천천에서 수영만으로 하천이 흘러내리고 있다.또한 금정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등 풍수지리적으로 안정감 있는 지세를 자랑한다.
"부산"이라는 지명은 현재의 좌천동에 있는 "증산"이라는 산이름에서 유래한 것인데
신라 경덕왕대 이후 고려 때까지는 동래로 불렸다.
중국풍의 미칭인 동쪽의 봉래산이라는 뜻을 가진 "동래"의 지명 유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대 시기 이 지역 정치체인 거칠산국.장산국.래산국.독로국등의 나라 이름에서
그 음과 뜻을 살린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동래에는 철기문화가 수용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정치집단이 출현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한시대의 무덤 유적으로는 내성유적.구서동유적.노포동유적 등이 산재해 있으며
생활 유적으로는 지금의 동래역 바로 앞에 동래조개무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철제무기와 야철지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정치집단이 4~5세기의 가야 왕들이 묻혀있는 동래 복천동고분군의 주인공들이다.
복천동고분군은 동래 중심가 북쪽의 마안산(속칭 대포산)중앙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에 위치한다.
원래는 동래시장까지 이어진 꽤 긴 구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릉의 끝이 학소대와 연결되어 있다.
무덤은 아래에서 위쪽으로 만들어지면서 구릉 정상부와 경사면에 골고루 분포,
총 1백13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으며 모두 9천2백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무덤은 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독무덤 등 그 모양이 매우 다양하다.
특히 딸린덧널과 덧널무덤의 경우 부산에서는 유일한 5m 이상의 큰 무덤으로서 구릉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토기류 철기류 의기류 장신구류 등의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철제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밖에도 인골 및 순장이 확인되었다.
또한 종류가 다양한 토기의 경우 아가리가 밖으로 꺾이고 다리가 짧은 굽다리접시 및
동물모양과 물결무늬가 있는 항아리받침대 등이 출토됐다.
이중 다른 지역 토기도 많이 나왔다.
처음에는 불꽃모양의 구멍을 가진 함안토기와 일본 하지기계토기가 드문드문 나타나다가
나중엔 신라 창녕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이밖에 장송의례나 신앙행위와 관련된 짚신.동물.수레.배.등잔 등의 모양을 한 토기류도 발굴됐다.
철기 출토품중에는 무구류가 다량 발견됐는데 갑옷.투구.말갖춤새 등은
실용성이 높아 주로 지배자 무덤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고리자루 큰칼"의 경우 큰 무덤에서는 문양이 있는 것이 출토되고
작은 무덤에서는 문양이 없는 것이 나오고 있어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쇠를 소재로 하여 만든 덩이쇠는 바닥에 깔려 많이 나오고 있는데
때로는 화폐로서의 기능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기류에는 미늘쇠.가지방울.굽은 쇠손칼.창.통형동기등이 있는데
특히 7개의 방울이 달린 가지방울은 이형으로서 주목된다.
장신구류는 수정과 유리 등으로 만든 주옥과 금속공예품 등이 출토됐다.
유리는 3~4세기까지 이 지역에서는 가장 귀한 장신구로 주로 파란색의 목걸이가 많았다.
그리고 5세기 이후의 금속공예품으로는 금동관(2개)과 금(동)귀걸이가 보인다.
나뭇가지 모양의 금동관은 가야 고유의 것이고 출자모양은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헌자료가 부족한 가야사의 경우 당시 무덤의 발굴을 통해 출토되는 자료만큼
많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의 큰 봉분을 가진 것을 제외하고는 남부지방 최대의 고분군이고 유물도 화려하다.
따라서 5세기 전후의 동래에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가지고서
가야의 한 지역을 영도 할 만한 왕자가 출현했음이 분명하다.
가야는 흔히 "철의 왕국"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복천동고분군을 통해 볼 때 가야는 단순히 철을 수출만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기술수준이 높은 무구류를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철기류를 바탕으로 "동래왕국"은 서기 400년
저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명령을 받은 5만명의 고구려 남정군과 일대결전을 치른 것이다.
가야의 기마인물토기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때의 동래의 왕자들은 철로 만든 갑옷과 투구와 말갖춤새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봉황 문양이 새겨진 금빛나는 "고리자루 큰칼"을 지휘봉 삼아
각종 철제 무기로 무장한 동래전사들의 선봉에 서서 고구려 기마병들과 혈전을 치르며
동래인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오늘날 비록 살아 있는 왕자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지만 가장 양지바르고 높은 곳에 묻히면서
갖가지 껴묻거리를 가진 무덤의 피장자를 통해서 그 장엄한 모습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같은 왕자의 모습은 화려한 금동관과 금(동)제 귀걸이의 출토라든지 순장의 흔적을 통해 뒷받침된다.
부산시에서는 지난 9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이 고분군을 사적공원으로 조성하고 (사적 제273호),
96년에는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을 개관했다.
[복천분관]에는 이 지역 출토품을 중심으로 가야 및 일본 유물도 함께 전시하고 있는데
특히 야외전시관은 고분군 내부구조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등 당시의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다.
휴일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겸하여 전시관을 찾는다면
이곳에 묻힌 고대 동래지역의 왕들이 되살아나 기꺼이 맞이할 것이다.
/백승충. 부산대교수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연구원/
'과학·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명의 천재 '장영실'은 [부산사람]이었다. (0) | 2014.09.03 |
---|---|
일본 반출 [연산동 고분 유물] '환수 운동' 민간 전문단체 나섰다 (0) | 2014.08.30 |
[연산동 고분군 베일을 벗기다] 7. 좌담회 (0) | 2014.08.23 |
'1만년 전' [해운대 인]들의 흔적... (0) | 2014.08.21 |
[연산동 고분군 베일을 벗기다] 6. 고분군 '정비' '복원'의 방향 (0) | 2014.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