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무차별'
"가진 것 다 빼앗겨도 손해 아니다" 그런 넉넉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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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선암사는 혜월 선사가 머물며 무소유 무차별을 몸소 실천한 사찰 중 한 곳이다. 1920~30년대 선사가 직접 심고 가꾼 사찰 뒤편 동백나무 군락이 유일하게 남은 선사의 흔적이다. 선사가 일군 논과 밭은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됐다. 김병집 기자 bjk@ |
'더 가져라'는 물질의 속삭임에 너도나도 젖어들고 있다.
받으려만 하고, 채우려고만 안달이다.
점점 더 큰 아파트, 더 비싼 차, 더 높은 자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엔?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된 걸까.
가지지 못한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그 무리에서 벗어나 다행이라 여길 것인가.
행복 대신 고통이 더 커졌음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절감하고 있다.
인간을 바로 보고자 한
지혜 있는 이들은 일찍이 물질을 좇는 삶을 두고
허망하고 위험한 삶이니 경계하라 일렀다.
오늘날 삶에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혜월(1861~1937) 선사다.
소유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은, 그리고 함께 사는 삶을 살아 낸 불교
선지식이다.
■ 지역 곳곳에 남은 혜월 선사의 삶
덕숭산 정혜사에서 출가한 선사는 '남쪽으로 가서 불법을 전하라'는
스승 경허 선사의 명을 좇아
51세 때 남으로 내려와 76세 때 솔방울 가득 든 자루를 어깨에 멘 채 그대로 입적할 때까지
통도사 내원사 범어사 선암사 등 부산·경남을 주유했다.
부산 부암동의 백양산 선암사가 가장 오랜 주석처였다.
'무소유·무차별' 혜월 선사의
정신
선암사 동백나무 군락 보며 되새겨
"물질의 속삭임에 밀려난 '참 행복'
외지 사람 차별 않는 기질 회복을"
지난 22일 찾은 선암사에서 선사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절 뒤편 동백나무
군락뿐이었다.
선암사 주지 원범 스님은 "선사가 직접 심었다는데 예전엔 600그루가 넘었지만 한 70~80그루쯤 남았다.
선암사에
다른 기록이나 흔적은 없다"고 전했다.
선사가 입적한 지 한참이 흘러
천성산 중턱의 양산 미타암에 세워진 '혜월혜명대선사무상설법탑'이
그나마 선사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하지만 선사의 법과 삶은 사라지지 않고 부산과 경남 일대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선사가 깨달은 법은 운봉 향곡을 거쳐 현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으로 맥이 이어지며 조계종의 큰 흐름이 됐다.
호봉 현봉 운암 기석호 등 다른
제자들도 선사의 높은 도력을 전했거나 전하고 있다.
최근 저서 '부산불교 100년의 발자취'에서 혜월 선사를 평가하기도 한 불교
전문가 현익채 전 금정중 교장은 "혜월 선사는 '무심 도인'으로 부산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선사의 삶을 기억하는 흐름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선사께서는 글이 약해 기록이 많지 않은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가진 것을 다 빼앗겨도 손해가 아니라는 지혜를 후대들에게 전한
선사의 삶은 많이 가지는 것을 행복이라고 여기는 오늘날에 큰 귀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내 것 네 것 없는' 무소유
무엇보다 선사의 삶은 많은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글을 잘 몰랐던 선사는 난해한
법어나 게송 대신에 몸소 실천한 삶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선사의 비움, 즉 무소유에 얽힌 일화들은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선사는 선암사에 머물며 손수 황무지를 개간해 이천 평
논을 만든 적이 있었다. 이 옥토를 노리던 마을 사람이 혜월의 천진함을 이용해 세 마지기 논을 두 마지기 값에 사 버렸다. 돈이 적다고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혜월의 꾸짖음이 내려졌다.
"이놈들아 그게 무슨 소리냐. 저
논 세 마지기는 아직 그대로 절 앞에 있고 여기에는 두 마지기 논값이 있으니 다섯 마지기 논으로 불어 버렸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냐."(최인호의
'보려고 하는 놈이 누구냐' 중)
어느 날 선암사에 도둑이 들어 선사가
아껴 키우던 소를 훔쳐 갔다. 절 승려들이 난리가 났지만 선사는 조용히 뒷짐을 진 채 뒷산에 올라 소 이름을 힘껏 불렀다. 도둑에게 끌려가던
소가 음메 응답하자 절 승려들이 쫓아가 도둑을 잡아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를 본 선사는 "소를 찾았으면 됐지 사람을 왜 때리느냐"고 도둑을
돌려보낸 적도 있다.
■백치를 그대로 지닌,
무차별
양산 미타암에 머물 때 선사를 모시던 제자가 금호
스님이었다. 금호 스님의 아들이자 신라대 전 총장이던 법산 김용태 스님이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생생한 증언은 이런 선사의 삶을 잘 보여 준다.
법산 스님은 선사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준비 중인데 그 중 일화 몇몇을 소개했다.
양산 미타암에 머무는 선사의 얘기를 듣고
부자들이 많이 찾았다. 부자들은 스님 입으라고 좋은 옷을 많이 해 왔는데 선사는 언제나 기쁘거나 싫은 표정을 겉으로 내지 않았다고 한다. 부자가
돌아갈 때가 되면 선사는 미타암 입구까지만 나가 합장해 배웅할 뿐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찾아와도 스님의 배웅은 한결같았다. 손님이 가고 나면 그
옷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선사는 목숨을 노린 자에게도 차별심을 내지
않았다. 선사의 가르침을 망신당한 것으로 오해한 어느 스님이 선사를 살해하려던 일이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선사는 목숨을 건지고 범인은 당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이후 선사의 행적은 기이했다. 당시 범인이 갇힌 양산경찰서 서장 방 앞에 자리를 깔고 풀어 주라 시위를 벌여
기어이 풀어 주게 했다는 것이다.
"악은 선으로 끊어야 풀린다. 이 놈 징역을 살리면 마음이 반성되는 것이 아니다. 악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라는 게 선사가 남긴 말이었다.
'처세의
명수들만 재주 부리며 활개 치는 세상에서 백치에 가까운 유치를 그대로 지녔다.' 동국대 서경수 교수가 저서 '길에서 길로'에 남긴 선사에 대한
평가다. 서 교수는 "돈이 생기면 시장에서 미꾸라지를 사 방생하던 방생법문, 빚돈으로 불쌍한 과부를 도와준 보시 법문 등 혜월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훌륭한 법문이었다. 그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법문이었을지 모른다"고 적고
있다.
■부산사람의 너른 품 다시 회복해야
선사가 일궜던 선암사의 논과 밭은 지금은 수천 세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그 위에 사는 우리는 선사가 삶으로 보여 줬던 무소유와 무차별이라는 행복의 길을 어느 틈엔가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 우리가 돈과 힘을 따르는
그 순간 무수한 약자들이 생겨나고 있음을 잊어버리고 산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달랐다. 외지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는
게 부산사람에 대한 평가였다. 이웃이 있고 공동체의 삶은 잘 꾸려졌다. 이런 부산사람의 너른 품은 혜월 선사 같은 불교 선지식들이 이 지역에
남긴 하나의 흔적이기도 하다.
어느새 이익을 좇고 나와 남을 구분하면서
삶이 삭막해졌다. 행복을 좇지만 행복은 멀어지는 형국이다. 지금의 우리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 아닐까. 손해 보지 않으려 복잡하게 계산을
두드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영한 기자 kim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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