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오래된 미래, '다문화'
아유타에서
온 허왕후부터 '문화다양성의 꽃'은 이미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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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이 형상의 구지봉 등줄기에 올라타듯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자리 잡은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강원태 기자 wkang@ |
화창한 주말이면 부산 사상구 괘법동 이주민 거리, 경남 김해시 동상동 전통시장 옆 외국인 거리는
이주민들로 넘쳐난다.
도시철도와 경전철로 연결된 부산과 인근 양산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민들까지
모처럼 장을 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해 말 기준 부산에 등록된 외국인 주민은 5만 1천여 명.
전체 인구가 51만 3천여 명인 김해시는 1만 9천802명에 이르고,
양산시(6천359명)까지 합치면 부산권 이주민은 8만 명에 이른다.
미등록 이주민까지 포함하면 10만 명은 훌쩍 넘을 것이라는 추산이다.
■ 신비스러운 존재, 허황옥
우리는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 여성이 급증하기 시작한 근래 들어서야 다문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약 2천 년 전 결혼 이주여성으로서 왕후가 된 허황옥이 있었다.
오늘날 되살려 볼 만한 부산권 다문화의 시발점인 허황옥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김해 가락국으로 건너온
허황옥
한반도 결혼이주여성의 시발점
불교·차 남방문화 전파에 기여
궁궐터 주변 '외국인 거리' 변신
다양한 외래문화 수용한 개방성
다름 존중한 선조들의 자세 배워야
우선 이름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사람들은 '허황후' '허왕후' '허황옥'을 거의 혼용한다.
어떤 이름이 맞을까?
가야사에 해박한 송원영 대성동고분박물관 운영계장은 이렇게 얘기한다.
"허황후라는 표현은 잘못되었어요. 수로왕은 왕이지 황제가 아니었거든요.
아마 허왕후의 이름인 '황옥'과 혼돈을 일으켜서 그런 것 같아요.
허황옥, 혹은 허왕후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삼국유사 등에 전해 오는 허황옥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서기 48년 천축국 아유타에서 허황옥은 열여섯 나이로 옥황상제가 배필로 점지해 준 가락국 수로왕을 찾아
20여 명의 신하와 함께 돌배에 오른다.
수로왕은 망산도에 신하를 보내 배가 들어오는 것을 살펴보게 했고, 도착한 허황옥을 왕후로 맞아
수로왕은 열 명의 아들과 두 딸을 낳는다.
왕후는 이 가운데 아들 2명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준다.
허황옥의 존재에 대해 지금도 출신 지역에서부터 여러 논란이 있다.
천축국 아유타라는 곳이 인도 북부 아요디야인지, 중국 서쪽 쓰촨 성 안악 현(옛 보주)인지,
돌배가 물에 뜨고 150년 이상을 산다는 것이 가능한지 등 많은 연구와 이야깃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야가 제 손으로 쓴 역사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에 병합된 이후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탓이다.
일부 다른 문헌에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과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니
허왕후는 물론 가야사 전체가
전설, 신화 등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2일
허왕후의 능(보주태후릉)을 둘러봤다.
구 시가지의 중심인 읍성과 봉황대가 내려다보이는 구지봉 언덕에 자리 잡은 보주태후릉은 따스했다.
마치 수로왕릉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이다.
왕후릉 앞에는 파사석탑이 든든하게 지키고 서 있다.
송 계장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해 실었던 돌을 쌓아 둔 것인데,
돌배라는 표현은 이 돌을 일컬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수로왕과 허왕후가 초례를 치렀다고 알려진 부산
강서구 지사동 흥국사(옛 명월사)에는
'가락국 태왕 영후(迎后) 유허비'가 남아 있었다.
신령스러운 산세는 그 옛날 수로왕이 달빛에 비친 허왕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명월산'이라 이름 붙였던 유래를 새삼 떠올리게 했다.
■ 2000년 후, 그녀의
흔적
대성동고분박물관 송 계장은 "허왕후 이전에도 가야가
인도와 교류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도 있다"며
벼농사와 지석묘를 꼽았다.
김해에서 발견되는 지석묘가 인도 남부지방의 지석묘와 매우 유사하다는 얘기다.
고고학이나 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대체로 허왕후의 이야기를 후대에 상당 부분 윤색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부 주류·재야 사학자들은 직접 중국과 인도, 일본 등을 답사해 허왕후의 출신지와
그가 한반도에 전해 준 문화의 흔적을 추적·고증하려 애쓰고 있다.
그녀가
실제 누구이며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연구자들이 밝힐 일이다.
중요한 것은 허황옥으로 상징되는 남방문화가 그 오랜 세월 우리가 살고 있는
부산권을 시발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불교와 차 문화다.
허황옥 일행을 뒤이어 가야로 건너온 그녀의 오빠 장유화상 보옥선사는 가야의 국사로 불교를 전파한다.
선사는 왕후의 귀한 아들 일곱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성불에 이르게 하고 칠불암을 짓기도 했다.
수로왕릉 정문을 비롯하여 가야 유적 곳곳에 있는 쌍어문양(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는 모양)은
인도를 비롯한 남방불교의 전래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된다.
왕후의 딸인 묘견공주는 일본 규슈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가야가 동아시아 남방불교 전파의 매개고리 역할을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김해 백월산에 전해지는 죽로차가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 종자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문화재연구원 김병모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를 출발해 옛 보주인 중국 쓰촨 성 안악 현을 거쳐 가야로 들어올 때
차와 소금을 실어 나른 차마고도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오빠인 보옥선사가 불교와 함께 차문화를 가야에 널리
전파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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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에도 이주민들이 오가고 있는 이국적인 풍경의 경남 김해시 동상동 외국인 거리 모습. 강원태 기자 |
김해에서 활동하는 장정임 시인은 김해여성복지회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허왕후를 내세운 다문화 축제를 활발하게 열어 왔다.
"먼 바다를 건너온 허왕후의 집안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궁궐터 주변이
오늘날 김해를 대표하는 외국인 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라고 장 시인은 귀띔했다.
허황후 궁궐터는 읍성 내에 있는 지금의 연화사 안에 있다.
원도심 중심에 자연스럽게 상권이 발달했고, 주거지가 인근 신시가지로 옮겨 가면서
이주민들이 모이는 거리로 발전한 것이다.
공장이 쉬는 휴일이면 동상·서상·부원동 일대에는 중국 태국 베트남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작은 지구촌'이라 부를
만하다.
■ 다문화, 결국
문화다양성이다
어쩌면 허황옥 이야기는 잊고 지내 온
우리의 문화 다양성을 새삼 일깨우는 '오래된 미래'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부족연합체였던 가야가 강력한 집권체제를 가진 신라에 무너진 이후
우리는 너무 오래 단일민족 신화와 순혈주의의 허상에 붙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허상은 집권층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재해석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왔다.
해항도시 부산의 특성을 보여 주는 개방성 역시 이런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유전학적으로도 동종교배는 멸종의 지름길이다.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우리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밑거름이다.
2005년 채택된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회가 지난 2일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법률'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는 소식이다.
법에 앞서, 우리 곁의 결혼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들을 차별 없는 이웃의 시선으로 보는 것,
더 근본적으로는 나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데서 우리 사회의 문화다양성은 꽃피지 않을까? -
- 끝 -
이호진 기자 j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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