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6. '가족'의 재발견
기장 황학·삼성대서 고산 윤선도의 애틋한 형제애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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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황학대' 일대는 고산 윤선도 선생이 4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김병집 기자 bjk@ |
서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을 키워야
하는 대상이 가족이다. 하지만 가장 가까워야 하는 가족끼리 감정싸움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 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긴장
상태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요즘 핵가족화로 가족 구성원 간 배려와 존중도 옅어지고 있다. 이런 세태에서 부산 기장군에 유배를 왔던 고산 윤선도
선생과 그의 아우 윤선양의 뜨거운 형제애가 새삼 돋보인다.
유배지 찾은 아우와 꿈같은 시간
떠나보내며 애끊는 마음 시에 담아
기장서 4년 4개월 생활 특별한 인연
지역문화 콘텐츠로 발굴해야
'유배문학' 재조명 지역사 정리를
■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서린 '황학대'
지난 7일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두호해녀복지회관을 지나 바닷가로 향하자 '황학대'라는 자그마한 동산이 나온다.
학이 날아오는 황색바위라 하여 '황학대'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학대 일대는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1618년 11월부터 1623년 3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오우가'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의 3대 가인(歌人) 중의
한 사람이다.
85세까지 살았던 고산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평생 세 차례 유배되고 두 차례나 이배되는 불운과 시련을 겪었다.
가장 긴 귀양살이를 한 곳이 기장이었다.
성균관 진사였던 고산은 서른 살이던 병진년(1616년, 광해군 8년) 12월 21일 과거시험 유출과 매관매직을 했던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고산은 '괘씸죄'에 걸려 조정을 모함했다는 죄명으로 31세 때이던
1617년 1월 9일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고산은 이듬해 겨울 경원 유배지를 출발해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됐다.
고산은 왜 함경도에서 낯선 땅 기장까지 유배를 왔을까.
이이첨은 북쪽 변방이 호(胡)와 가까워 고산이 내통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함경도에서 기장까지 유배지를 옮기는 횡포를 다시 자행했다.
고산은 이런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기장의 유배지에
찾아들었다.
황학대 위로 올라가니 붉은 동백꽃이 반긴다.
황학대 정상을 둥그렇게 둘러싼 소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고산이 날마다 대했을 하늘, 바다, 바위섬들이 보였다.
혈기왕성한 30대에 이곳에 유배됐던 고산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막막한 바다와 대면했을 고산의 고독, 소외, 비애, 원망의 마음은 파도가 돼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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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일광면 삼성대에 세워진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김상훈 기자 |
■ 뜨거운 형제애를
노래하다
고산은 기장에서 고달픈 귀양살이를 하면서 한시
11수, 제문 1편, 7편의 서(書)를 남겼다.
고산이 기장에서 생활한 지 3년 뒤인 1621년 8월에 이복동생 윤선양이 찾아온다.
'고산유고'에 따르면 동생 윤선양은 고산 선생에게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속전(贖錢·돈을 주고 유배에서 벗어남)을 제안했다.
윤선양은 이복형제임에도 형을 지극히 생각했다.
하지만 고산은 이를 단호히 거절해 고결한 선비 정신과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가치관을 보여 줬다.
고산과 선양은 모처럼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어느덧 야속한 이별의 순간이 왔다.
고산은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황학대에서 기장군 일광면 삼성대까지 말을 타고 배웅했다.
이때 선양을 떠나보내면서 애끓는 마음을 표현한 칠언절구 한시
'증별소제(贈別少弟·아우를 보내며)' 이수(二首)를 지었다.
'네 뜻을 따르자니 새로운 길 얼마나 많은 산이 막을 것이며/
세파를 따르자면 얼굴이 부끄러워짐 어찌하리오/
이별을 당하여 오직 천 갈래 눈물만이/
너의 옷자락에 뿌려져 점점이 아롱지네.'
이
시에는 돈을 주고 유배를 끝낸 뒤 한양으로 같이 가자는
동생의 제안을 뿌리친 강직한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하지만 동생과의 이별의 순간이 닥치자 내면적 갈등을 겪는 모습이 보인다.
만남의 기쁨에서 비롯된 환희의 서정은 사라지고
이별에 즈음해 천 줄기 눈물이 옷자락에 얼룩진
애끊는 슬픔과 한이 서린 송별시다.
두 번째 시를 보자.
'내 말은 내달리고 네 말은 더디건만/ 이 길 어찌 차마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 있으랴?/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 해이니/ 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네.'
동생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형의 아픈 마음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동생을 붙잡아두고 싶지만 유배된 몸이라 그럴 입장이 못 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먼 길이다 보니 조급한 마음에 고산의 말은 서두르지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동생 선양의 말은 오히려 더디 가려 한다.
형제간에 좀 더 머물며 회포를 풀고 싶지만 가을 해는 무정하게도 조금도 머물러 주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다.
기장군
일광면 삼성대에는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가 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건립 위원회'가 2005년 4월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에는
'증별소제' 이수와 '병중유회(病中遺懷)'가 새겨져 있다.
'편히 살기 위해서 도깨비를 막음이 어찌 나만의 즐거움이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먼저 가졌기에 모든 것이 절로 걱정이네/
산 넘어 옮겨 사는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지 마오/
서울 바라보니 도리어 막힘이 없구나.'
유배 생활의 고달픔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은 늘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한다는 고산의 충심이 보이는 시다.
"고산 선생의 뜨거운
형제애와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강직한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삼성대에 시비를 세웠습니다.
삼성대는 고산유고(孤山遺稿)에 나와 있는 기장과
관련된 유일한 지명이기도 합니다."
황구 기장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의 얘기다.
그는 2005년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건립 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당시 고산유고에서 '증별소제'와 '병중유회'를 발췌해 한글로 풀어내 이를 시비에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 고산을 기장 문화콘텐츠로 만들어야
이처럼 기장지역은 고산 문학의 산실이다.
기장과 인연이 많은 고산 윤선도라는 콘텐츠를 지역 문화계에서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황학대의 입간판과 삼성대에 있는 시비만으로 고산의 문학과 정신을 조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조해훈 시인은 "부산시나 기장군이 주체가 돼
고산 윤선도의 유배 시절 문학과 생활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이를 계기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이 나오면 이를 자료로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산이 생활했던 집과 장소를
정확하게 고증해야 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 문학관이나 기념관을 짓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을 조명하는 남해유배문학관을
만들어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황구 실장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기장지역에 유배 온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며
"이들이 남긴 유배문학을 조명함으로써 부산의 지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상훈 기자 ne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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