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3. 이웃 '공동체'

금산금산 2014. 9. 25. 20:03

[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3. 이웃 '공동체'

 

 

"잘 살려면 남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훤하던 그때로 가야지"

 

 

 

▲ 구불구불한 길옆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안창마을

풍경은 정으로 어울려 사는 이곳 사람들을 닮았다. 김경현 기자 view@

 

 

한낮 해발 150m 식당은 한적했다.

 오목조목한 집들은 겨울에서 갑자기 여름으로 넘어간 듯 따가워진 햇볕에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낮 최고기온이 섭씨 21도까지 올랐던 지난 18일 점심, 부산 동구 안창마을의 한 식당에서

주민들과 마주 앉았다.

주민들은 이웃이자 가족이었다.

수직으로 쌓아올린 집에 스스로를 가둔 도시인들은 편리함 혹은 돈과 고독을 맞바꿨으나,

범내(虎川)의 발원지인 안창 사람들은 그 밑지는 거래와는 거리를 둔 채 이웃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20분도 안 되는 시간, 버스 몇 정거장 거리에 펼쳐진 이 정겨운 풍경은

어수룩한 도시인을 잠시 당황하게 했다.


■ 이웃, 가족의 또 다른 이름

"다음 달 제 아버님이 아흔여섯 번째 생신인데, 밀양에서 모셔 와

여기 안창에서 잔치를 한 번 해 드렸으면 싶습니더. 어떻습니꺼?"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서범교(64) 씨가 말했다.

 기자에게 "우리가 잘 살려면 과거로 가야 한다"며 안창 자랑에 한창이었던

 통장 박희영(65) 씨는 서 씨에게 "잘 의논해 보자"고 맞장구를 쳤다.



'오리고기 촌' 안창마을
단체 야유회·상부상조
도시가 잃은 '정' 간직

문화공간 '빈빈' 진출해
생활-문화 이어주기 작업
"마을공동체 살리기 운동
주민이 주체 돼야 성공"


"제사를 지낼 때면 마을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에 찾아와 음식도 나눠 먹고 하느라

천장이 담배 연기로 노랗게 물들 지경입니다."

범일 4동 23통 친목회 회장 안쾌준(68) 씨의 얘기다.

이 안창마을을 배경으로 23통 친목회 안쾌준(오른쪽) 회장과 문화공간 빈빈 김종희 대표가 웃고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친목회가 주민들을 모아 나들이라도 할라치면 대형버스 3대가 출동한다.

오는 26일 친목회 운영위원회가 모여 4월 중 떠날 봄 야유회 장소를 결정한다.

"동해 같은 데는 어떻노? 묵호나 이런 데 맛집을 미리 잘 검색해가 가면 안 좋겠나?"

지금은 2선으로 물러난, 통장 경력 27년 8개월의 '안창 지킴이' 박순식(68) 씨가 제안한다.

안 씨가 "작년에 동해 쪽 ○○비치 콘도 갔다 왔는데 집사람이 거기 한 번 더 가고 싶다카데" 라며

박 씨를 거든다.

모여서 마을 공동의 일을 구상하고 도모하는 일. 제도적으로는 입주자대표회의나 반상회가 하는 일이다.

회의 불참의 대가로 벌금을 받기까지 하지만 사람 모으는 일이 쉽지가 않다.

그러나 안창에선 이런 모색과 도모가 수시로 벌어진다.

흔한 말로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훤히 알 만큼 이웃의 사정을 일상적으로 듣고 나눈다.

그저 오리고기 식당촌으로 알려진 안창은

우리가 오늘날 잃어버린 이웃과 공동체 문화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수정산을 배경으로 범내가 흘러내려 가는 안창은

1960년대만 해도 마을이 크게 형성되지 않은 한적한 곳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부산진구 일대 신발공장 노동자들이 저렴한 셋방을 찾아 몰려들면서

마을이 급속히 팽창했다.

신발공장이 해외로 떠났듯 지금은 여공들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지만, 이웃의 정만큼은 간직한 이곳,

최근에는 문화의 온기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 공동체의 매개, 생활과 문화

수영구 남천동 KBS 뒤쪽에 번듯한 공간을 가진 문화공간 빈빈이 지난해부터 안창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

수시로 안창에 올라와 마을 사람들과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어울리던 빈빈은

마을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빌려 마을 사랑방을 열었다.

정부의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 지원금으로 세를 얻은 것이다.

공간은 빈빈이 얻었지만, 안을 채운 것은 주민들이다.

내부 청소와 수리, 집기와 비품 구매·기증 등을 주민들 스스로 해냈다.

문 입구에는 나무토막 문패도 손수 붙였다.

사랑방이 생기니 여기서 막걸리 파티도 열고, 영화도 함께 보고, 인문학 강의도 듣는다.

주민들은 15명 안팎의 농악단을 조직해 올해 대보름 잔치 때도 마을을 흥겹게 만들었다.

"주민들은 벽에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색깔이 바래면 더 보기 싫거든요.

그보다 저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그런 벽화들이 주민들과 찾아오는 사람들을 분리한다는 거예요.

이곳 주민들과 그들의 삶을 구경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거죠."

김종희 빈빈 대표의 얘기다.

 

안창 사람들의 살아온 역사와 삶의 결(인문)을 영상으로 기록해

다큐멘터리의 학습센터로 만들겠다는 것이 빈빈의 꿈이다.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삶과 마을에 대한 의미를 찾게 하려는 것이다.

며칠 전 '화이트데이' 때 사 둔 초콜릿을 슬며시 주머니에서 꺼내 놓던 박순식 씨는

"빈빈이 찾아오고 나서 주민들 사이에 정이 더 돈독해지고 얼굴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 같다"

고마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박희영 씨가 통장으로 있는 23통은 아래쪽 22통과 함께 안창의 마을기업인 오색빛깔행복공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자연 염색과 도자기 공방으로 마을 공동의 수익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생활과 문화가 사람들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네 이웃을, 마을을 사랑하라

부산 시민들에게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아파트 거주 비율이 60% 전후에 이르는 메트로폴리스 부산은 언제부터인가 이웃을 잃어버린 도시가 되었다. 훨씬 풍요로워졌지만, 더 외롭다.

다른 문화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부산의 개방적 정체성도 폐쇄적 주거공간이자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린 아파트에 갇혀 질식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안창마을처럼 이웃 공동체의 문화를 지키고 새롭게 꽃피우려는 곳이 적지 않다.

동구 범일 5동 매축지, 연제구 연산동 물만골과 연제공동체, 해운대구 반송 희망세상과

재반행복마을공동체, 북구 화명동 대천마을 등이 있다.

정부와 부산시도 도시재생을 결합한 마을 만들기를 정책 우선순위에 놓고 있다.

마을 만들기 활동가인 전중근 씨는 "예산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이 사는 마을에 애착을 갖지 않으면 마을공동체는 형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짧은 시간 성과를 거두려 하면 필패라는 지적도 많다.

일상에 바쁜 시민들이 자신의 마을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려면 끈질긴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 끈질긴 노력의 주체는 활동가들이다.

활동가들은 자본의 탐욕과 일부 주민의 욕망과 갈등 앞에 좌절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부산 곳곳에 자신이 자란 곳에서 마을 활동가들이 계속 성장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이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