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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2 . 부산의 '기억'

금산금산 2014. 9. 19. 12:44

[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2 . 부산의 '기억'

 

 

'역사적 기억' 잊으면 문화도 미래도 꽃피울 수 없다

 

 

 

 

▲ 고려 시대 유적으로 부산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만덕사지. 강원태 기자 wkang@

 

"부산은 어떤 도시입니까?"

이 물음에는 부산 사람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이후로 자리 잡은 '제2의 도시'라는 위상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음을 이제 부산 사람들은 안다.

그렇다면 영화제가 열리고 명소 해운대가 있는 '축제의 도시'일까...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다!

해양도시로 국내외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관문의 도시', 과연 그럴까?

'오늘의 부산'을 말하지 못하는 현실은 바꿔야 한다.

답은 부산 사람이 찾아야 한다.

답을 찾자면 부산을 기억해 내는 것 말고 도리가 없다.

부산 곳곳에 흩어진 채 방치된 유물 유적들의 소리 없는 외침부터 들어야 한다.


■ 부산이었던, 이제는 부산이 아닌...

치미는 크고 화려했다.

치미는 기와지붕 용마루 좌우 끝에 올린 장식물로 삼국·고려 시대 때 궁궐이나 국찰급 사찰에 올렸다.

날개 일부만 남았는데도 길이 98㎝, 높이 40~51.5㎝, 두께 2.0~2.6m나 된다.

학계에선 황룡사지 치미와 거의 맞먹는 규모라고 본다.

시 지정기념물 만덕사지
황룡사·범어사급 대가람 추정
시민 다수 존재조차 몰라


치미가 발굴된 절터 역시 사찰 규모가 대단했음을 보여 준다.

법당(대웅전)이 있던 자리인 금당지만 해도 범어사 대웅전의 네 배 가까이 된다.

금당지로부터 서남쪽 150m 떨어진 길 아래에는 절 입구에 세우는 당간지주 1기가 나왔다.

그 밖에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을 넘나드는 많은 수의 유물도 나왔다.

그야말로 대가람이었음에 분명하다.


그 대가람은 현재 부산 북구 만덕동 36에 있지만 상당수 시민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바로 [부산시 지정기념물 3호]로 지정된 만덕사지다.

멀게는 통일신라, 가깝게는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될 뿐

언제 지어져 사라졌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앞으로 알 수 있을지는 더욱 미지수다.


만덕사지의 오늘을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1970년대 초 만덕 1터널 공사 당시 유물이 나오자

1972년 부산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 1990년, 1996년, 2001년 세 차례 발굴 조사 후 일부 복원이 이뤄졌다. 그 후로도 간간이 뜻있는 사람들의 복원 노력과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사실상 방치됐다.

부산박물관 앞뜰에 복원 전시 중인 만덕사지 삼층석탑. 강선배 기자 ksun@

 

만덕 1터널이 뚫리면서 절터 자체가 나뉘어져 버렸다.

당간지주가 절터에서 떨어진 채 남아 있고 절터에는 석축, 금당지 등 유적들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삼층석탑 등 만덕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부산박물관 등지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도로가 생기면서 만덕사지에서 분리된 만덕사지 당간지주. 강원태 기자

한때 화려한 부산의 일부였으나 오랜 세월 그 유적과 유물로부터는 부산을 읽어 내지 못했다.


■ 우리는 부산을 상상해 내지 못한다

만덕사지의 미스터리는 만덕사지만의 일은 아니다.

부산 사람이 기억해 내지 못하는 역사적 흔적은 곳곳에 숨어 있다.

영도나 기장 등 바닷가에 담겨 있던 '고대의 기억'은 그나마 빛을 본 편에 속하고

동래고읍성지 동평현성지 기장고읍성지 등 고려 유적을 비롯한 '중세의 기억'은 여전히 묻힌 상태다.

여기에 왜성이나 왜관, 봉수대 등 '조선의 기억'도 아직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부산의 기억'은 그렇게 끊어졌고, 사라졌다. 또 사라져 가고 있다.

만덕사지 유적을 꾸준히 연구해 온 최정혜 부산박물관 유물팀장은

"일본만 해도 왜관을 다시 복원해 놓고 있다. 하지만 부산은 가야 이후로 조선 중기까지 무엇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만덕사지만 해도 그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발굴만 하고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을 말하지 못할 때 오는 당혹감은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산을 상상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부산 사람 스스로 서울을 넘지 못하고,

다른 역사적 도시에 비해 보여 줄 게 없다고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부산이 문화로 피어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왜관의 역사를 다룬 장편소설을 준비 중인 배길남 소설가도 곤란을 겪고 있다.

왜관은 이미 사라졌고, 그 자료 역시 쉽게 구하지 못한다.

 배 소설가는 "1608년 기유조약을 맺고 두모포 왜관을 만든 이후로 300년 동안 한·일 간에 전쟁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왜관을 마치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잘못 알고 있다.

소설로 왜관의 진짜 모습을 보여 주려 하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왜관뿐이겠는가.

화려하게 꽃필 수 있는 부산 문화가 이미 발굴돼 방치돼 있거나

부산의 건물과 도로 아래 잠자는 수많은 유물 유적과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흩어져 있는 유물 유적마다 전문가 향토학자 등 몇몇 관련 있는 사람들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는 있다.

만덕사지의 경우 그 자리에 들어선 만덕사의 주지 박혜명 스님 같은 이들이 있다.

 

스님은 고려사나 불교 사전 등 문헌을 조사해 만덕사가 고려 말에 지어져 사라진 절이라고 확신하고 이를 알릴 책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다.

역사 흔적 발굴만 하고 방치
고대에서 근대로 건너뛴 부산
'중세의 기억' 되살리기 필요


하지만 일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산의 기억'을 되살려 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부산을 내일로 연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산 사람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말이다.

영화제나 마천루 같은 고층 빌딩, 대형 교량을 좇는 오늘의 현실도

어쩌면 그런 망각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돌려 말해 미래는 '오늘의 부산'을 어떻게 기억할까.

"사라질 것이다" 말한다 해도 100년 전 기억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우리 중 누가 아니라고 자신할 것인가.

채상식(사학과) 부산대 교수는

"부산의 역사는 고대에서 근대로 바로 넘어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에도 부산은 사람이 살던 곳이고 그럴듯한 역사가 있었다.

부산 사람이 부산에 산다는 자부심은 그 역사를 기억해 낼 때에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 부산을 기억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는다면 100년, 200년 후에도 부산 사람은

"부산은 어떤 도시입니까"라는 똑같은 질문 앞에 머뭇거릴 것이다.

김영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