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부산,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 5. 부산의 혼
임진왜란 이후
400여 년간 이어져 온 저항정신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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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분들의 영령을 모신 충렬사 본전. 강원태 기자 wkang@ |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그
접점에 자리 잡고 있다. 대륙의 문화가 해양으로 향하고 해양문화가 대륙으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두 방향의 문화는 교차했다. 그렇다 보니 두 문화는
서로 수용하고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갈등도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왜구와의 충돌, 임진왜란, 개항기 일본인과의
갈등, 일제강점기 등 다양한 사건이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는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할 정도로 동래와 부산 사람들의 저항은 강렬했다. 그리고 그
저항의 한가운데는 늘 민초들이 있었다.
■ "민초들의 저항정신이 부산 정신"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 오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해 소오 요시모도, 마쓰우라 시즈노부 등이 거느린
왜군의 조선정벌대 제1군 1만 8천700명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곧바로 동래성으로 쳐들어왔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해 동래 군민들은 왜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맞서 싸웠다.
하지만 중과부적. 결국, 동래성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이때 겨우 목숨을 건진 군민은 천에 하나둘이었다.
부산도시철도 4호선 공사 때 발견된 동래성 해자의 유적은
동래성 전투의 치열하고 처절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400년을 훌쩍 넘겨서도 칼자국이 선명한 깨진 두개골, 곳곳에 널린 칼과 화살촉.
그때의 유물은 임진왜란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동래성 전투·항일 독립운동
4·19혁명·부마항쟁·6월항쟁…
역사에 큰 역할 지금은 보이지 않아
문화 발신지·지역 주권 회복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저항정신
가마골향토역사연구원 주영택 원장은 "동래성 전투에서 백성들이 똘똘 뭉쳐 왜적과
맞서 싸운 것이야말로 바로 부산 정신이요, 부산의 혼"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동래성 전투로부터 40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지만, 여전히
부산 사람들의 가슴속엔 송상현 부사와 동래성 군민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자리 잡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고 얘기했다.
■ 저항정신, 충렬사에 오롯이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분들의 영령을 모시고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린 곳이 있다.
바로 충렬사이다.
지난 1일 충렬사(동래구
충렬대로)는 비교적 한적했다.
하지만 경내는 이미 꽃의 천국이었다.
곳곳에 동백꽃, (자)목련, 모과꽃이 반겼다.
나무 아래 떨어진 수많은 붉은 동백 꽃송이.
부산진성과 동래성 전투에서 죽어간 관군과 민초들의 죽음으로 중복돼 다가왔다.
100개의 계단이 3단에 걸쳐 나뉜 계단을 올라가면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분들의 영령을 모신 충렬사 본전에 이른다.
충렬사에 봉안된 신위는 모두 93위(位).
본전에는 수위에 동래부사 송상현 공,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 다대진첨사 윤흥신 장군의 3위가 있고,
배위에 16위, 종위에 70위가 있다.
특히 종위 중에는 '수영 25의용인'의 위패가
돋보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부산성이 함락되고 정발 장군이 순절했다는 소식에
수영성의 책임자인 경상좌수사 박홍은 겁을 먹고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수영성 하급민들은 분개하고 한탄하며 왜군에 대항하다 사라져 갔다.
이를 기리는 위패이다.
안타까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 민초들의 저항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를 비롯해 당시를 기억하기 위한 그림을 통해
그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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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순절한 금섬 등 여성을 모신 의열각. 강원태 기자 wkang@ |
본전 아래 의열각에는 동래성에서 기왓장으로 왜적과 싸웠던 두 의녀, 송상현 공과 정발 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 애향 등 여성의 위패(4위)도 봉안돼 있다.
충렬사사무소 김만택 주무관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하신 순국선열의 넋을 모시는 데 있어 위로는 부사, 군수, 첨사를 비롯해 아래로는 노비까지 누구든지 모두 그 충절을 기려 모신 것은
다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징이다"고 말했다.
■ 항일 독립·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임진왜란의 저항정신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항일 운동 가운데 1940년에 일어난 항일학생운동(노다이사건)은 전국적으로 사례가 드물다.
일제의 통제가 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산의 혼이 살아 있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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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저항 정신은 항일독립운동,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부산민주공원 모습. 정달식 기자 |
이러한 저항의 역사는 해방 후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6월 항쟁 등 민주화운동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독재정권에서 요구되는 획일화와 통제는 부산 사람들의 저항 정서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 등 주체들도 다양했다.
부산민주공원 김광수 관장은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이 되는 해, 부산 시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민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민주공원을 조성한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 지금 부산 정신은 어디에
그렇다면 임진왜란-항일독립운동-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온 부산의 정신은
지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지금 부산 정신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저항 정신을 이어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던진다.
부산대 사학과 김동철 교수는 "임진왜란 동래성 전투처럼 저항 정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런 부산의 정신이 쇠퇴했다. 특히 특정 정치인 한 사람의 행동 때문에 바뀌어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민주공원 김 관장 역시 "면면히 저항정신을 이어 왔으면서도 현대에
이르러 그 자부심과 긍지를 온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부산의 정신을 포용에서 찾기도 한다.
포용과 저항은 상반되는 개념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부산이 비록 생존을 위한 저항은 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교류와 평화도 놓치지 않고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부산의 자산을 시대에 맞게 승화시켜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문화평론가 이지훈 씨는 "지역 주권을 요청하고, 부산이 당당한 문화의 주체지, 발생지가 되는 것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요구되는 부산의
저항 정신"이라고 말했다.
정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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