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6-7>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신선대 - '최치원' 이야기
'여기가 정녕 천하절경을 뽐내던 신선대란 말인가'
오랜 만에 속계를 찾은 고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러스트 = 서상균 기자 |
그 옛날 풍류를 즐기던 곳
해안의 절벽은 깎여나가고
푸른 송림도 하얀 백사장도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사라져
알 수 없는 구조물만 곳곳에
하나 둘씩 속계에 발을 끊는
仙人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소년은 돌탑에 돌을 얹었다
할아버지를 낫게 해주세요
간절하게 몇 번이고 빌었다
착한 기도가 절박한 눈빛이
고운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옷속의 비약을 꺼내 들었다
고운(孤雲)은 잠시 망연자실했다.
분명 신선대인데 신선대가 아니었다.
벗들과 풍류를 즐기며 오가던 해안절경들이 다 깎여나가고 섬 주위로 뭔지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솔밭도 보이지 않고, 맹뭍 비알(비탈의 방언)도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 해 여름엔가 신선대(神仙臺)라고 커다랗게 새겨두었던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혜산의 말처럼 세월 탓일 수도 있었다.
시간은 집채만 한 바위도 흔적 없이 삼켜버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꼭 세월 탓만은 아니었다.
속인들의 힘이 자연을 무너뜨리고 필요에 따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고운은 이제야 선계의 사람들이 속세에만 다녀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인들은 갈수록 자연을 벗삼아 주유할 땅이 사라진다고 푸념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고운은 그것이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면 혜산은 답답하다는 듯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운을 나무랐다.
자네는 보질 않아 모른다네. 방식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자네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던 신선대에도 한 번 가 보게. 이미 옛 풍경이 아닐세. 혜산은 언젠가 그곳에서 풍류를 즐겼던 기억을 되새기며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고운은 입을 다물었다. 보지도 않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신선대로 향한 것이었다.
이른 새벽의 서늘한 바람이 도포자락을 들치고 지나갔다.
고운은 땅에 발을 딛고 싶어 칭얼거리는 백마의 갈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옛 시절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누군가는 솔바람 속에서 해금을 뜯고 누군가는 퉁소를 불었다.
유하주(流霞酒) 술독은 아무리 마셔도 줄어들지 않았다.
가끔 나무꾼이 허기진 배를 안고 나무 하러 왔다가 한 잔 얻어 마시고는 맛에 취해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기쁨 속에서 고운은 가슴에 응어리졌던 속계의 일을 서서히 잊어갔다.
고운은 경문왕 8년(868년),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러 갔다가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후 공직생활을 했다.
신라로 돌아온 것은 885년이었다.
고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웠다.
국정은 문란하기 짝이 없었고, 골품제는 고운의 길을 막았다.
그 와중에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경륜을 뜻대로 펼치기란 어려웠다.
고운은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칠 수 없는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현실의 일은 다 마음 같지 않고 마침내는 부질없었다.
고운은 관직을 버리고 산천을 주유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많은 곳을 돌아보았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 그 외에도 함양, 옥구, 해운대 등 세상에 좋다고 소문난 곳은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신선대는 그때 돌아본 곳 중 하나였다. 울창한 송림과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눈부신 백사장, 말을 거는 듯 끊임없이
자그락대던 자갈밭,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던 기암절벽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선했다.
그 속에서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녹아내렸고 마침내 한 소식을 얻었다.
그러자 세상이 다 평화로웠다.
고운은 생각에서 벗어나 백마의 옆구리를 찼다.
여기까지 왔으니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오르곤 하던 데나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마가 고운의 마음을 알고 히힝- 반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무제등을 향해 발을 내뻗었다.
불그스름하게 하늘을 물들이는 여명 속에서 백마의 흰 갈기와 고운의 도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눈부시게 빛났다.
재영은 신선대 숲길을 오르다가 구름 사이로 무언가 언뜻언뜻 휘날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상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 숲길을 오를 때마다, 신선을 만나 할아버지 병을 낫게 할 약이나 한 병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이다.
피란시절부터 용당에 살았던 할아버지는 어릴 때 나무하러 신선대에 갔다가 신선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동무들하고 나무 하러 산에 갔는데 어디선가 딩가딩가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거라. 그때는 다들 찢어지게 못살 때라
산에서 노래하며 놀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풍악소리가 참 오묘하고, 웃음소리는 영롱해서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지.
우리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 나는 대로 갔어. 그러자 갑자기 소리가 뚝 그치더니 하얀 학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저만치 하늘로 날아가는 기라. 집에 와서 얘길 하니 신선들이라카대. 조금만 더 빨리 갔으면 신선을 만나보는 긴데
아쉽게도 뒷모습만 봤다 아이가."
그 얘기를 들은 후부터 재영은 신선을 한 번 만나봤으면 하고 바랐다.
이젠 그 바람이 더욱 간절했다.
신선들은 영원히 산다 했으니 할아버지도 오래 살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걱정이었다.
재영은 오늘도 할아버지가 빨리 낫기를 바라면서 돌탑에 돌을 쌓으러 가는 길이었다.
돌탑은 무제등 입구에 있었다.
언젠가 할아버지와 갔다가 본 것이었다.
그때 재영은 왜 저기 돌탑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람들마다 마음속에 소원이 다 있는 기거든. 그 소원이 간절했던 어떤 사람이 저기다 첫돌을 올려놓았겠지.
그러면 또 다른 소원이 있는 사람이 그 위에 돌을 쌓고, 또 쌓고, 쌓고… 그래서 사람이 사는 데는
어디든 저런 돌탑들이 있는 기라. 지성이면 감천인 법이거든."
할아버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을 어디에나 잘 갖다 붙였다.
언젠가 또 무제등에 올랐을 때, 재영이가 발아래서 하역작업이 한창인 감만 부두를 굽어보다가 나중에 저 부두를 움직이는
최고 높은 사람이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도, 해군사령부를 내려다보면서 해군사령관이 되겠다는 말을 했을 때도, 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사내는 포부가 커야 하는 법이라며 지성이면 감천이니 꼭 될 거라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그때
재영이가 진실로 가장 바랐던 일은, 지금 살고 있는 움막 같은 집을 떠나 오륙도가 바라보이는 높다란 아파트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망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던지, 재영이 그 말을 하자 할아버지는 대꾸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재영이 할아버지의 병을 어서 낫게 해달라고 돌탑 앞에서 빌게 된 것은 할아버지의 말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석 달째 누워 있었다.
지난 겨울부터 감기를 자주 앓더니 이번 봄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재영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아직 잠 든 할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잘 다녀 올게요라고 말한 뒤 신선대로 향했다.
세상에 피붙이라곤 할아버지뿐인데 혹시 돌아가실까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재영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을 하고 재영을 할아버지께 맡긴 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생활비는 부쳤다 말았다 했다.
할머니는 이 년 전, 시장 근처에서 노점상을 하다가 갑자기 뛰어든 트럭에 치어 돌아가셨다.
그때만 해도 재영은 그 일이 얼마나 큰 불행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젠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마저 잃을까봐 겁이 났다.
재영은 부지런히 걸었다.
지난밤 내린 이슬에 촉촉이 젖은 황톳길이 편안했다.
먼동이 희붐하게 트고 있었다.
무제등의 풍경도 도무지 예전 같지 않았다.
혜산의 말로는 신선대 가운데서 그래도 제 모습을 지닌 데라고 해서 기대를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고운이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랐던 장소도 뚜렷하지 않았다.
선명한 것은 무제등 한가운데 백운포와 유엔기념공원 가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뿐이었다.
고운은 백마에서 내려 저 멀리 보이는 풍경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태종대도 보이고 조도와 승학산, 천마산도 보였다.
그 사이로 우뚝 솟은 다리가 보이고, 부두도 보였다.
고운은 하나 둘 속계에 발을 끊는 선인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이런 세상에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도 힘든 법이다.
그래서 선계에 드는 선인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고운은 오랜만에 내려와 마주한 속계의 풍경이 안타까워서 미간을 찌푸린 채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때, 아래쪽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어린 아이의 발소리였다.
고운은 잠시 망설이다 백마를 돌아보았다.
"너는 먼저 가거라. 난 이곳에 좀 머물렀다 갈 테니…."
백마는 맑고 큰 눈으로 고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언제 다시 오면 되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내가 부르면 오너라. 소리 없이 떠나도록 해라. 아이가 놀라지 않게."
백마는 목소리를 죽인 채 몸을 낮추었다가 돋움발로 힘껏 뛰어올랐다.
갈기를 휘날리며 긴 다리로 허공을 박차고 오르는 백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재영은 무언가 하늘을 바람처럼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금세 아득해졌다.
분명 무언가 지나간 듯 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군본부에서 뜬 헬리콥터인가 했지만 만약 그게 떴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몹시 궁금했지만 재영은 이내 궁금증을 접고 돌탑 앞에 섰다.
숨이 턱에 차 아직 숨이 가빴다.
재영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간절한 마음으로 돌탑을 올려다보았다.
그새 소원을 빈 사람이 더 있었는지 돌탑이 좀 더 높아진 듯했다. 재영은 눈을 감았다.
병석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에 할아버지는 숨소리가 좀 더 낮았다.
재영은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재영은 치미는 불안감을 누르며 올라오면서 길가에서 주운 돌들을 주머니에서 꺼내놓았다.
돌탑 주변에는 더는 돌이 남아 있지 않아 눈에 띄는 대로 주워온 것이었다.
재영은 돌탑 위에 돌을 한 개씩 쌓았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발돋움을 하고도 돌 쌓기가 쉽지 않았다.
재영은 돌을 올려놓으며 한 개 올릴 때마다 소원을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님, 우리 할아버지 빨리 낫게 해주세요. 나랑 오래 살게 해주세요. 내가 커서 효도하게 해주세요."
재영은 혼자 만든 기도말을 몇 번씩 되풀이했다.
고운이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열 살이나 되었을까.
남루한 옷차림이지만 용감하고 영민하게 생긴 아이였다.
말소리는 또렷하고 낭랑했다.
재영은 마지막 돌을 올려놓은 뒤 두 손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모으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고개를 들고 돌아섰을 때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한 노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영은 멈칫했다.
지금까지 이 시간에 누가 올라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재영은 자신을 향해 빙그레 웃고 있는 노인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참 특이한 모습이었다.
눈썹과 수염이 희고 길었다.
수염은 땅에 닿을 정도였다.
옷차림도 TV에서 본 옛날사람 같았다.
웃는 모습은 아주 인자했다.
노인의 몸에선 은은하게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드는 향기였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노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고운이 그 모습에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맑고 깊은 웃음소리가 신선대에 가득 울려퍼졌다.
재영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런 웃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할애비가 맘에 드느냐?"
고운의 물음에 재영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향기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해지며 두 발이 허공에 뜨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아프시냐?"
노인의 말은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불현듯 이 할아버지가 신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영은 가슴이 떨렸다.
"네, 오늘 아침엔 숨소리가 더 약해졌어요. 좀 도와주세요."
재영이 옷깃이라도 잡을 듯이 고운의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그 간절한 눈빛이 화살처럼 고운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신선대에 다시 온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다.
고운은 망설이지 않고 도포자락 안에 매달고 다니던 비약(秘藥)을 꺼냈다.
인간에게 불멸을 선사할 수는 없었다.
아이가 혼자 살 힘을 가질 때가 언제일지 가늠해야만 했다.
고운은 약병을 높이 쳐들었다.
재영은 슬그머니 고운의 도포자락을 움켜쥐며 혼자 중얼거렸다.
할아버지 말이 맞았어. 지성이면 감천인 법이야.
재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인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정보산업진흥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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