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6-5>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하루 알쏭, 하루 달쏭-
'남구 광선대' 이야기
"아들아, 사실 엄마는 신선이었던 널 보살피러 지상에 내려온 선녀란다"
일러스트= 서상균 |
엉뚱한 말을 하는 어머니를 병상에 두고 일터로 나섰다
그 옛날 신선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노닐었다는 이 계곡
색다른 기운의 이 돌은 예사롭지 않은 것임에 분명했다
마침내 돌을 뽑아올리는 순간 오색구름 치솟나 싶더니
백발 수염의 노인이 나타나 다짜고짜 큰소리로 외쳤다
"이놈아! 인간계 온 지 얼마됐다고 친구 얼굴도 잊어먹나"
바람 한 번 피운 적이 없는데 남편이 죽은 지 십 년 뒤에 남편의 아이를 뱄다면 누가 믿을까.
그런데도 마미는 내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렴처럼 어김없이 당부하곤 했다.
예수나 부처처럼 귀하신 몸이시니 함부로 몸을 훼손하지 말라고.
마미의 말대로라면, 난 저 우주의 누군가의 영적인 힘에 의해 이 지구라는 별로 왔고,
인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하지만 내겐 예수나 부처처럼 베풀 사랑이나 자비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간직했더라면 여친이 이유 없이 떠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설령, 설령 말이다.
마미의 말대로 절대자의 뜻으로 가난한 성씨 집안의 외동으로 태어나게 했다고 치자.
그러면 삼십 년이 가까운 지금쯤은 자신의 계시를 드러내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아직 수험서만 뒤적거리게 하고 있으니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난 확신하고 있다.
마미가 자신의 바람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나를 속인 것이라고.
그렇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에게 구라를 치던 마미가 입원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것이다.
병명은 대퇴부 골절상.
사실, 마미는 외동아들인 이 몸을 위해 불철주야로 불고기식당에서 주방 일을 수행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설거지를 끝내고 서둘러 퇴근하기 위해 그릇을 첩첩이 쌓아둔 채 주방으로 내달리다가
바닥에 놓인 불판을 보지 못하고 밟고 말았다.
그 바람에 마미는 엉덩이살을 아직 식지 않은 석쇠 위에 무서운 속도로 주저앉혔고,
그 여파로 대퇴부에 금이 가고 심지어 뼛조각까지 끄집어내야 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마미의 소식을 들은 나는 놀란 가슴을 안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래도 내 유일한 혈육이니까.
한데 나보다 빠른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식당 단골손님 박 씨였다.
박 씨는 건축업에 종사하는 홀아비로 일찍부터 마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박 씨는 뻑하면 인부를 떼로 몰고 와 비싼 소고기를 시켜먹곤 했다.
간혹 식당 주인이 연말이나 단체손님이 올 때면 나를 파출부처럼 호출해 일을 시키곤 했는데,
그때도 밤늦게까지 죽치고 앉아 있던 이가 박 씨였다.
그런 박 씨였으니 음료수 한 박스를 쥔 채 나보다 먼저 병원으로 달려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미가 박 씨에 대해 무심하다는 게 문제였을 뿐.
1952년 부산 남구 문현동에서 바라본 광선대(점선). 처음으로 공개되는 광선대 옛 사진이다. 바다 건너 맞은편이 영도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
박 씨는 짬만 나면 병원을 들락거렸다.
처음엔 나는 그를 은근히 경계했다.
그런데 한두 마디 말을 섞다보니
흥부처럼 후덕한 마음씨를 가진 위인임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마미의 수술과 입원기간이 길어지면서 졸지에 우리 가족의 생계
또한 궁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수험서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 없어 하루는 병원 벤치에
앉아 박 씨에게 그만 속내를 내비치고 말았다.
박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박씨'를 물어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뭐 별거 없다카이.
그냥 계곡 주변 정리 정도라고 생각하몬 돼.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 일당도 불고기집의 두 배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해서 당장 출근하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다음날, 박 씨가 일러준 대로 작업현장을 찾았다.
현장 앞에는 광선대 일대 하천정비공사라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공사장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그런 현장의 책임자가 박 씨임을 알자 갑자기 그이가 달라보였다.
포클레인은 벌써 계곡 안에서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마 저 포클레인이 무거운 바위를 들어 조적공에게 건네면 조적공은 돌의 모양에 따라 위치를 선정해
계곡 양쪽 축대를 자연석으로 쌓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초보자인 내가 할 일은 그저 박 씨의 말대로 계곡에 흩어진 쓰레기를 주워 모으거나 시키는 대로
현장의 잔일거리나 심부름하면 끝이었다.
나는 하릴없는 사람처럼 계곡을 돌아다니면서 페트병이나 짜부라진 맥주 캔,
혹은 찢어진 검정비닐봉투 등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바위틈에 끼어 있는 생수병을 발견했다.
일당을 생각해 성실함을 보이려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마치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계곡 안으로 전류가 흐를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뭐가 몸을 이런 반응을 하게 만든 것이지?
다시금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보았다.
그랬더니 역시 팔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돌 사이에 낀 생수병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얀 반점들을 발견한 건 샤워를 하기 위해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팔뚝뿐만 아니라 온몸 곳곳에 하얀 반점들이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얼룩의 정체를 알고 싶어 거울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반점들은 마치 여름 하늘의 구름송이처럼 옮겨다 놓은 것처럼 무늬가 다양했다.
그렇다고 가렵다는 느낌도 없었고 아무런 증세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염된 쓰레기를 온종일 만진 것이 피부 알레기 반응을 일으킨 것일까.
그럴 만도 했다.
나야말로 지금껏 궂은일을 직접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해서 바디 클린저까지 양껏 샤워 타올에 풀어 온몸을 박박 문질러댔다.
하지만 하얀 반점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 그제야 이상한 돌 생각이 났다.
저녁에 마미의 병실을 찾았을 때에는 돌 생각마저 잊고 말았다.
한데 마미가 내 팔뚝에 돋은 흰 반점들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꼭 부여잡는 것이 아닌가.
난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됐다.
얘야, 사실은 말이다. 네게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역시, 하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미가 숨긴 비밀이야 뻔할 터였다.
지금껏 숨겨놓은 내 출생의 비밀을 자백하거나 아니면, 박 씨와 난 그렇고 그런 사이란다 하는 고백 정도겠지.
한데 마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엉뚱해도 너무 엉뚱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 엄마는 선녀였단다, 너를 지금까지 보살피는 임무로 지상에 내려왔고.
아, 마미. 제발 그 따위 개나 물어갈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이제 저도 어린 아이가 아니잖아요, 하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병상에 누운 마미에게 매몰찬 말을 내뱉을 순 없었다.
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이거였다.
어머니, 그냥 딴생각 좀 하지 말고 푹 쉬기나 하세요!
집에 돌아와 모처럼 잡티 하나 없는 꿀잠을 잤다.
덕분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콧소리마저 절로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출근을 위해 서둘러 욕실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혹시 밤 사이에 반점이 가라앉기라도 했나 싶어 거울 속의 몸을 살폈다.
반점들은 여전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크기가 커졌고 깊이 또한 심해졌다고나 할까.
특히 심장 주변의 반점들은 서로 엉켜 마치 커다란 구름송이를 가슴 위에 얹어놓은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내일쯤이면 사람이 구름으로 변하는 거 아냐? 하지만 나는 이내 킥킥거리고 말았다.
불길함이 되살아난 건 현관문 앞에 섰을 때였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려 거울을 보는 순간 까만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어, 눈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대로라면 작업장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시력은 멀쩡했고 모처럼 얻은 일자리를 하루 만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현장을 결심한 것은 그 이상한 돌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자넨 시방 여게 일하러 왔나, 신선놀음 왔나? 박 씨가 나를 보자마자 흰소리를 쳤다.
딴에는 막일하러 온 주제에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눈에 뭐가 나서 그래요, 작업엔 전혀 지장 없으니까 걱정하진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난 지렛대를 챙겨 돌이 있던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박 씨가 뒤에서 걱정스레 혀끝을 찼다.
허, 이거. 조적공 신사 한 분 탄생하셨구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돌을 향해 걸었다. 돌은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가까이 가자 우선 면장갑부터 찾아 꼈다.
그런 다음 요리조리 돌아가며 돌의 모양새를 다시금 살폈다.
그러던 중 일반 자연석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하단부의 모서리가 깨지긴 했지만 그건 분명 인위적인 흔적이 남아 있는 돌이었던 것이다.
뭐랄까. 새의 날개 무늬 같은 거랄까.
아니, 구름의 문양? 아무튼 뭔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돌임이 분명했다.
자료에 의하면 이곳 일대를 광선대라 부르게 된 것도 지형상 푸른 바다와 영도의 봉래산이 보이는 풍광이며
펑퍼짐하게 생긴 형세가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는 전설 때문이라지 않던가.
그런 연유로 진시황 때 서불(혹은 서시라 부르기도 함)이 불로초를 찾아 이곳까지 다녀갔고.
그가 남긴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표지석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 옆에 서 있었다고 하잖은가.
그렇다면 이 돌은 필시 그들과 연관된 것인지 모른다.
신선들이 이 계곡에서 천도복숭아를 씻어 먹고 멱을 감았을 것이니까.
파묻힌 돌을 들어 올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흔들리긴 하는데 버티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게 영락없이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오기로 덤벼들 수밖에. 매달리길 얼마나 했을까.
드디어 묻힌 바닥까지 드러난 순간 어디선가 향내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
난 재빨리 냄새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위는 온통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눈앞으로 오색구름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가 싶더니 호통 소리가 났다.
역시 때가 되니 알아서 잘 찾아오는구나, 이놈아!
옷자락은 구름처럼 바느질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얼굴의 수염은 하얀 수초처럼 나풀거렸다.
노인은 뉘신데 초면에 다짜고짜 놈이라 부르세요?
어허허, 이놈이 정말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먼.
이놈 환천성! 환천성이라니요?
내 이름은 성환성인데요?
이놈 보게, 인간계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친구 얼굴까지 까맣게 잊어먹다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은 쥐고 있던 지팡이로 내가 파놓은 돌을 쳤다.
그러자 눈앞에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뭉개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타고 있었다.
어떤 노인들은 학을 어깨에 태운 채 환하게 웃고 있었고
어떤 이는 오색찬란한 꽃들이 만발한 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고 있기도 했다.
이곳이 도대체 어디에요?
자네가 살던 곳이지,
어디겠는가.
내가 살던 곳이었다고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혀 낯선 곳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도화 핀 골짜기와 그 옆의 오두막. 그 집에는 둘도 없이 마음이 통했던 친구 자미성이 살았었다.
그럼 혹시 자네가 자미성?
허허, 이제 생각나는 모양이구먼. 그제야 모든 일이 오롯이 생각났다.
선녀를 너무 흠모하자 상제가 질투하여 두 사람을 갈라놓은 일이며,
자신이 선녀를 따라 인간계로 내려온 사실을.
그제야 선녀의 행방이 궁금했다.
혹시 자네 선녀가 어딨는지 아는가?
그건 자네 하기 나름이지.
하기 나름이라니?
생각해보게, 절간의 스님이나 성당의 신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던가?
그러면?
그렇다네, 사랑을 베풀 때마다 사랑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그 진한 안개도 노인도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곁에는 얼굴 가득 걱정이 엉겨 붙은 박 씨뿐이었다.
혹시 싶어 돌이 있던 곳을 살폈다.
이상한 돌마저 보이지 않았다.
박 씨 아저씨! 거참, 박 씨 아버지라 부르면 누가 잡아간대?
아, 농담할 생각 없다니까요.
여기 있던 돌, 어디가 치웠어요?
돌이라니, 난 자네가 보이지 않아 올라왔을 뿐인 걸?
박 씨가 나보다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섭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정보산업진흥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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