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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 <16-2>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 칠점산-'거등' 이야기

금산금산 2014. 9. 20. 11:05

이야기 공작소 <16-2>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 칠점산-'거등' 이야기

 

 

창칼로 강토를 넓히지 말고 음률과 예로 세상을 다스리시라

 

 

 

그림=서상균 기자

 

 

- 낙수 강심에 떠 있는 일곱 개 섬
- 소나무와 삼나무 푸른 그림자가
- 강물에 거꾸로 새겨져 흘러가니
- 선계로다…신선이 살 만하도다

- 참시가 거문고를 스르릉 울리자
- 지저귀던 새들이 소리를 멈추고
- 흐르던 강물마저 귀를 기울였다
- 거등도 생황의 관음으로 답하니
- 천지 음양의 증거가 여기 있구나

- "쇳덩이 녹여 밭 가는 쟁기 만들고
- 죽창 끝을 잘라 피리를 만드시오
- 태자님, 부디 곧은 음률 펴시오"

 

 

먼 곳의 새 소리가 아득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환청일까.

가물가물하는 의식을 잡았다 놓쳤다 혼몽 속에 빠져 있던 거등(居登)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힘겹게 뜨인 눈으로 시녀의 얼굴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수로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나,나를… 이,일으켜…다오."

시녀가 거등의 겨드랑을 끼어 몸을 일으켰다.

"차, 창을…여,열어라."

궁궐 외성 위로 드러난 무척산 위로 흰 구름 두어 점 동동 떠가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기러기 떼가 꾸룩거리며 줄지어 날아갔다.

'내가 오늘 서천서역으로 가려나 보다.'

중병으로 자리를 보전한지 이제 이태, 더는 이승에 대한 미련도 없는 터였다.

모처럼 정신이 든 마당이니 후사를 처리해야 할 것이었다.

"태,태자와 주,중신을…부르라."

수내관이 태자 마품(馬品)과 종정감(宗正監), 천부경(泉府卿), 사농경(司農卿)을 부르러 고꾸라지듯 달려갔다. 거등의 망막 위로 숱한 얼굴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아버지 청예(靑裔) 수로(首露)의 강건하고 냉엄한 얼굴, 어머니 허씨 황옥(黃玉) 태후의 근심스런 표정,

그리고 아우 거칠의 이글거리던 눈빛….

아라의 아리땁던 아미도 눈앞인 듯 선명했다.

참시(始)의 형형한 눈빛도 오래 머물렀다.

거등은 허당으로 곤두박질치듯 60년 전의 추억으로 빠져 들어갔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 남아 있는 칠점산. 원래는 7개의 수려한 봉우리가 있었으나 6개는 사라지고 하나 마저 군부대 안에 감춰져 있다. 국제신문 DB

거등의 아비 청예는 요동 고구려 옆의 소국 황룡국(黃龍國)의 왕자였다. 수만 명의 철갑 기마대를 앞세운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멸망한

나라였다.

구사일생 도망쳐 수백 기의 기마대를 이끌고 험준한 산맥을 넘고

아리수를 건너 따뜻한 남쪽 가락(駕洛: 지금의 김해)에 닿은 것은

열다섯 살 때라고 했다.

"이곳이야말로 왕업을 일으키기에 족한 곳이다!"

넓은 벌과 바다를 본 청예는 그곳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무엇보다 청예를 가슴 벅차게 한 것은 산야에 지천으로 묻힌

철광석이었다.

쇠는 돈이자 권력이었다.

철기 무기를 갖춘 수만 명의 기마대를 키울 수 있고

덩이쇠를 왜와 중국에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청예는 인근의 아홉 부족을 하나하나 정벌해 갔다.

숱한 철광석을 가졌음에도 아직 청동무기밖에 가지지 못한 토족들은 황룡국의 철갑기마대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청예는 토족을 여섯 개의 큰 부족으로 다시 묶었다.

청예는 나라를 열고 국호를 금관가야(金官伽倻)라 하고 스스로 [수로(首露)]라 일컬으니

'여섯 가야의 으뜸 왕'이란 왕호였다.

청예 수로는 나라가 안정되자 황룡국에 배를 보내 옛 정혼자 허황옥을 불러와 혼인했다.

황옥은 아들 열 명을 낳았다.

맏이가 거등이었고 둘째가 거칠이었다.

연년생인 거등과 거칠은 크면서 외모와 기질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거등이 어미를 닮아 키가 껑충하고 얼굴이 갸름했으며 섬세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다면

거칠은 아비를 닮아 완강한 어깨와 두꺼운 다리를 가졌으며 거칠고 호승심이 강했다.

청예 수로는 아이들이 예닐곱 살이 되면서부터 작은 활과 칼을 주었다.

"나라 주변에 온통 거친 적들뿐이다.

게다가 장차 고구려에 원수 갚음을 하려면 너희들은 무예에 밝아야 하느니라."

거칠은 활을 쏘고 말 타기를 즐겼지만 거등은 무예조련이 힘겹고 싫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악(樂)이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생황(笙簧)의 화음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태자가 되고서도 그는 밤낮없이 생황을 끼고 살았다.

아비 청예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만승의 수레를 거느려야 할 군왕이 될 녀석이 좀스럽게 악기 따위가 뭐냐."

그러나 거등은 아비의 눈을 피해 생황을 불고 또 불었다.

제 입김이 바뀌어 흘러나오는 그 오묘한 화음을 들을 때마다 그는 황홀했다.

열일곱에 이르자 그의 생황 솜씨는 국중 제일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었다.

거칠은 씩씩한 가야의 전사로 자라났다.

열넷에 이미 크고 작은 전장터를 아비를 따라 누비더니 열여섯엔 서라벌의 탈해왕과의 전투에서

가야가 대승할 적에도 공을 세운 터였다.

판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거칠은 이따금 태자궁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호젓이 누대에 앉아 생황을 부는 형을 쏘아보곤 했다.

그 눈길엔 분노와 질투가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거등은 황옥을 찾아갔다.

"소자는 태자 자리를 거칠에게 물려주고 생황이나 불며 살고 싶어요."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너는 아홉 동생을 가진 맏이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단다. 아버님께서 너를 태자로 세우신 것도 다 뜻이 계신 것이니 생황은 잠시 잊고 강건한 제왕이 되는 데 힘 쓰거라."



그를 지켜준 것은 태자전의 시녀 아라였다.

총명한 얼굴, 윤기를 내며 출렁거리는 긴 머릿결,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토족 출신의 처녀였다.

그녀는 턱을 괴고 눈을 반짝이며 거등의 연주를 들었다.

"태자님의 생황 소리는 아름답고도 슬퍼요. 평생 이 자리에서 태자님의 연주를 듣고 싶어요."

거등은 아라의 검은 눈동자을 들여다보며 슬며시 웃기만 했다.

아라가 거등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할 소식을 가져온 것은 본가에 휴가를 다녀온 다음이었다.

"태자님, 낙수(洛水: 낙동강)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강 한가운데 칠점산(七點山)이란 일곱 개의

작은 섬이 떠있대요. 그곳엔 홀로 거문고를 타는 신선이 사는데 이름이 참시선인(始仙人)이라지요.

300년 전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구하러 보낸 서불(徐市)의 삼천 동남동녀 중의 하나라고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거등은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뛰어난 거문고의 고수가 숨어 있었더란 말인가.

 거등은 즉시 시자를 칠점산으로 보냈다.

그러나 시자는 혼자 돌아왔다.

"그자가 '내 소리를 듣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찾아올 일이지 내가 찾아가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거등은 시자와 아라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들은 낙수 물길을 따라 하루 낮, 하루 밤을 걸어 도착했다.

문득 눈앞이 트이더니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세 갈래의 하구가 바다로 쏟아지고 있었는데 아득한 강가엔 흰 모래가 신기루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심에 떠있는 일곱 개의 섬은 비취 구슬 목걸이와 같았다.

섬에 자생한 소나무와 삼나무의 푸른 그림자가 흘러가는 강물에 거꾸로 떠 있었다.

비췻빛 안개에 감싸인 그 섬들은 이름만 듣던 이상향이었다.

거등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선계로다! 과연 신선이 살만한 곳이로구나."

그들이 쪽배를 타고 섬에 닿았다.

숲그늘에 흰빛이 어른거리더니 문득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서른쯤이나 되었을까, 흰 바지에 도포를 걸쳤는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키가 크고 아침햇살처럼 빛나는 얼굴을 가진 자였는데 아무렇게나 동여맨 머리칼이 바람에 펄럭였다.

"누구기에 남의 거소를 함부로 어지럽히는가?"

"그대가 참시선인인가? 나는 가야국의 태자 거등이라 하오만…."

그자는 비로소 눈빛을 풀고 웃어보였다.

"마침내 오셨구려. 내 그대의 생황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였소."

두어 식경이 지난 후 거등과 참시는 강물이 흐르고 백사장이 펼쳐진 소나무 그늘 밑 반석에 마주 앉았다.

참시가 먼저 거문고를 스르릉 울렸다.

이윽고 술대가 거문고 줄을 튕기자 현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음률은 지상의 그 어떤 언어로도 옮길 수 없는 소리였다.

오장육부가 저릿저릿해지는 소리였다.

지저귀던 새들이 소리를 멈추고 숲속의 짐승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흐르던 강물마저 멈춰 서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등이 화답했다.

흐느끼는 듯한 생황의 투명한 관음(管音)이 거문고 소리를 감쌌다.

두 소리는 가을 들판의 푸른 이내처럼 서로를 휘감아 돌았다.

혹은 물가에 선 암수의 사슴이 서로의 주둥이를 맞대고 비비는 것 같기도 했다.

천지에 음양이 있다면 참시의 거문고와 거등의 생황소리가 그 증거라 해야 할 것이었다.

거등과 참시는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그들은 시간을 잊고 연주에 빠져 들어갔다.

해가 지고 달과 별이 떴다.

거문고 현 위에 얹힌 참시의 흰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였고 거등의 손가락도 열일곱 개 죽관의 구멍 위에서

거친 말처럼 내달렸다.

문득 아라가 백사장 위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월궁의 항아와도 같았다. 푸른 달빛에 젖은 강물이 속살거리며 바다로 흘러갔다.

그날 이후로 거등은 틈만 나면 아비의 눈을 피해 칠점산으로 갔다.

거등은 산 어귀에 아담한 정자를 지어 초현대(招賢臺)라 이름지었다.

참시는 신선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신선이 아니랄 수도 없었다.

300년 전 서불을 따라온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조상이었다.

무력을 앞세운 진시황의 학정에 반발한 참시의 7대조는 남해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이곳에 남았고

대대로 연단술 따위 선술을 익혔다고 했다.

그들은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새 음률을 만들었다.

백성들에게 그 평화의 음률을 들려줄 날을 꿈꾸기도 했다.

참시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하곤 했다.

"거등 태자님, 칼과 창으로 숱한 목숨을 짓밟아 강토를 넓히지 말고 음률과 예로 세상을 다스리는

참 수로가 되시오. 창고마다 가득 쌓인 쇳덩이를 녹여 밭을 가는 쟁기를 만들고 날카로운 죽창의 끝을

잘라 피리를 만드시오."

거등은 자신이 수로가 되어야 할 까닭을, 그리고 수로가 된 다음 해야 할 일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몇 차례나 지나갔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그 날도 초현대에서 거등은 참시와 연주에 심취해 있던 참이었다.

휙 하는 쇳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곁에 있던 아라가 갑자기 거등을 덮쳤다.

짧은 편전(片箭)이 아라의 가녀린 목줄기를 깊숙이 꿰고 있었다.

붉은 피를 폭포처럼 흘리며 아라는 누마루에 쓰러졌다.

참시가 거문고를 내던지고 곁에 있던 죽장을 집어 들었다.

싸악 하고 지팡이 속에서 칼날이 빠져나왔다.

"웬 놈이냐!"

다시 비 오듯 화살이 쏟아지더니 검은 옷에 복면을 한 괴한 십여 명이 소나무 숲에서 쏟아져 나왔다.

참시가 칼을 들어 그들 중에 두어 명을 베어 넘겼다.

참시의 팔에서 한줄기 피가 배어나왔다.

참시는 우두망찰 서 있는 거등에게 외쳤다.

"뭘 하고 있소! 빨리 피하지 않고…."

 

거등은 정신없이 시자의 손에 이끌려 섬 기슭의 조각배로 달려갔다.

배를 타며 돌아보았을 때 참시가 흰 옷에 선혈을 물들이며 쓰러지는 모습이 망막에 잔상처럼 새겨졌다.

쩌렁쩌렁하는 참시의 마지막 외침이 귀청을 파고들었다.

"태자님, 부디 곧은 음률을 펴는 수로가 되시오!"



안석에 기댄 거등은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 이만하면…오래…살았지."

그날의 일은 거칠의 짓이었다.

아버지 청예 수로가 군사조련을 하다 낙마하여 세상을 떠나자 가병을 몰아 궁궐을 점령하고

자객을 칠점산으로 보낸 것이었다.

황룡국 시절부터 아비를 모셔온 오랜 신하들의 힘을 빌려 거칠을 몰아내던 그 옛날의 참극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서로를 살육하던 반란군과 진압군들의 단말마….

참시와의 약속만 아니었다면 거등은 나라를 거칠에게 주고 목숨을 끊었을 것이었다.

붙잡혀 온 거칠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자 나머지 동생들은 머리를 깎고

지리산으로 출가했었다.

그 모든 일들이 억겁 전의 일인 것처럼 아득했다.

시녀에게 생황을 가져오게 한 거등은 떨리는 입술로 취구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러나 헛바람만 새어나올 뿐 생황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 옛날 칠점산에서 참시와 연주하던 가락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달빛 젖은 백사장에서 춤추던 아라의 빛나던 얼굴도….

생황이 무릎 위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입을 벌렸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나를… 참시와 아라에게 데려갈… 극락조는… 어디메쯤 와 있느냐….'


강동수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정보산업진흥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