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5-5>
[산복도로 숨은 보석 찾기]- 팩션:
천년 우물, '냉정(冷井) 샘'
그날 이후 꽃할배가 보이지 않고…냉정댁은 빨래를 헹구고 또 헹궜다
그림=박호·화가 |
- 젊을 적 남편과 사별하고
- 자식과 시동생들 돌보며
- 평생 희생만 했던 냉정댁
- 나이는 들었지만 멋있는
- 손풍금 할배에 마음 뺏겨
- 사춘기 같은 열병을 앓다
井 … 프롤로그
씻고 또 씻어 얼룩을 지우는 일이 어디 빨래뿐일까.
우리의 인생이 그와 같아서
팔목이 시리도록 거품을 일구어,
숱한 슬픔과 고통이 배인 빨래를 씻는다.
생에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을 씻어 본 적이 없는 이여,
흐르고 또 흘러서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고
냉정역 빨래터에서 해가 저물도록 내 몸이
한 방울 물이 될 그 곳을 그리워해 보자.
흐르는 물에 차마 흘려보내지 못할
때 묻은 영혼이라도 씻어보자.
井… 웃는 물, 착한 물
부산 사상구 주례2동 냉정샘.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kookje.co.kr |
천리 밖의 목마른 새들이 날아와 목을 축이고 간다는 냉정샘.
몸빼 차림인 냉정댁은 물비린내 나는, 햇빛 출렁이는 소(沼)에
두 발목을 담갔다.
냉정댁은 하얀 거품을 일구면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몸에 묻은 꽃할배의 냄새가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그렇지. 어젯밤 꿈속에 꽃할배가 나타났다.
"정말 찬물 마시고 정신 차려야 하는 기라. 내 나이가 몇 개고…."
그녀는 중얼거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어 겨울내의를 방망이로 두드려 빨았다.
빨간색 내의는 막내 시동생이 첫 봉급을 받아서 사 준 것이었다.
산그림자 내려앉은 물웅덩이에 구름 한 점이 떠돌고 있었다.
냉정댁은 엄광산 약수사 노스님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홍안지교 초상지로 약속지란 유서표풍(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絮飄風)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은 늙을수록 천해지고, 남녀의 약속은 버드나무 가지에 이는 바람같이 덧없다는 소리입니다.
즉 한마디로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물그릇 속에 비친 니 꼬락서니를 똑바로 쳐다보란 소리입니다."
눈빛이 물빛처럼 맑으신 노스님은 냉정댁의 마음을 훤히 읽고 말씀 하시는 것처럼 들렸다.
시동생과 아들이 있지만, 노후를 기댈 언덕이 아니었다.
어느 여자가 시어머니도 아닌 형수를 모시겠는가.
이혼을 밥 먹듯이 하다가 재혼한 아들의 여자는 기회만 있으면
"어머니를 모시려고 내가 결혼한 게 아니에요"라고 가슴에다 못을 박는 소리를 해댔다.
그래서 늘그막에 서로의 등이나 긁어주는 영감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井… 햇빛 냄새나는
물의 요정 같은 아이들이 우물가에서 야단법석이었다.
가야산 울울한 숲의 바람, 구름, 달빛, 별빛, 햇빛이 물감처럼 섞인 듯 천년샘은 신비로웠다.
냉정댁은 가지고 온 숯덩이를 우물 속에 동동 띄웠다.
이렇게 하면 '물할매'가 나쁜 물은 가져가고 좋은 물만 줄 것 같았다.
피라미 가재 붕어들이 옛날처럼 떼 지어 몰려올 것 같았다.
호호 깔깔대던 아이들이 놀다가 사라진 빨래터는 휴지 따위로 어지러웠다.
냉정댁은 청소를 하면서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만히 생각하면 냉정 우물이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린 셈이다.
물이 좋아 세워진 콩나물 공장에서 나온 돈으로 시동생 셋과 아들 하나를 공부시켜 장가보냈던 것이다.
냉정댁의 친정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녀는 열두 살에 쌀 한가마니에 팔려 남의 집 식모살이로 전전하다가, 또 밭 한 떼기에 팔려 시집 온 곳이
냉정마을이었다.
누가 고향을 물으면 냉정샘이라고 대답했다.
물 속에 사는 물고기처럼 냉정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井… 퍼내도 마르지 않는
깊은 우물 같은 사람이 있다.
곁에만 있어도 사랑이 샘솟는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해도 꿈이 샘솟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퍼내도 마르지 않는 냉정샘처럼, 평생 퍼주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냉정 샘터로 시집와서 만난 주례댁은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냉정댁에게 퍼준 사람이었다.
맞은편 빨래터에서 주례댁이 냉정댁을 몇 번이나 불렀으나 냉정댁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냉정댁에겐 흐르는 물에 빨래를 씻다보면 잡념이 멀리 사라지고 물 속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냉정댁 니 인자 귀까지 어둡나? 꽃할배는 아직 연습 안 나왔나?"
"니도 손풍금 장수 꽃할배를 좋아하는 가베?"
"호호호, 니 솔직히 말해봐라. 니 꽃할배한테 관심 있제?"
"뭐라카노? 남세스럽다. 나는 손풍금 소리만 좋아하는 기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냉정댁과 주례댁은 1945년생 닭띠 동갑내기였다.
박복하여 몇 년 차이로 남편을 앞서 보낸 청상과부들이었고 신랑과 물 한 그릇 떠놓고 맞절 끝내자마자,
물동이 이고 나왔다가 냉정샘에서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카메라가 귀한 그 시절 미군 병사 하나가 물동이 이고 있는 그들 모습을 찍어 준 후 그들은
흑백사진 한 장을 무슨 보석처럼 들여다보며 살았다.
그 흔해빠진 구리반지 하나 받지 못하고 호된 시집살이 한다고 신세 한탄하다가도, 나뭇잎만 굴러가도
배를 잡고 웃던 꽃시절부터 그들은 친구였다.
출렁거리는 물동이 이고 한 방울 물이라도 흘릴까봐 조심조심 걸어야 했던 그 냉정고개를 지나다니는
장꾼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부산장, 구포장, 동래장, 김해장으로 향하는 장사꾼들은 냉정 샘터에서 목을 축였다.
조선시대부터 물이 좋아 널리 알려진 냉정샘 주변에 그 많던 콩나물 공장과 막걸리 공장이 사라지고,
지금은 땅 밑으로 지하철이 다닌다.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천년우물 냉정샘은 그대로이다.
사람들은 오염됐다고 하지만 날마다 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냉정 샘물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합장하며 허리를 굽혀 우물 앞에서 절을 하는 냉정댁,
퍼내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냉정댁이었다.
井… 차갑고 뜨거운
바람에 실려 오는 손풍금 소리에 가슴이 막 뛰었다.
냉정댁은 잽싸게 빨랫감을 챙겨 문밖으로 나왔다.
빨래터에 당도하니 꽃할배가 손풍금을 챙겨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냉정댁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꽃할배에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냉정댁!" 하고 꽃할배가 불렀다.
사실 냉정댁은 꽃할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늘 할매들이 붙어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선상님의 손풍금 소리는 꽃보다 아름답습니더"하고 그동안 귀를 즐겁게 해준
그의 음악에 대해 고마움을 약간 부풀려 표현했다.
꽃할배는 미소를 지으며 "TV 드라마 '모래시계' 아시죠? 그 곡을 당신을 위해 연주해 보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냉정댁은 그 말에 가슴이 너무 벅찼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아름다운 풍금소리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그녀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었다.
그날 꽃할배와 냉정댁은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그는 벌어놓은 돈은 없지만, 회갑연, 칠순 잔치, 동네 아기들의 돌잔치, 결혼식에 초청이 되어 가면
웬만한 봉급쟁이 월급은 된다고 했다.
냉정댁에게는 나이가 들어도 멋진 분위기를 가진 꽃할배가 아주 근사하게 여겨졌다.
그는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려 했지만 그는 완강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에 찼던 자주색 전통 매듭의 손목걸이를 그녀의 손목에다 채워주었다.
중천에 뜬 보름달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井… 깊고 깊은
시간이 얼마나 흘러간 것일까.
오늘은 며칠인가.
냉정댁은 열이 펄펄 나는 몸으로 빨래를 하였다.
다 헹군 빨래를 또 헹구었다.
한길 우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맞는가 싶었다.
그날 밤 이후 통 꽃할배가 통 빨래터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이틀에 한번은 빨래터 쌈지공원에서 손풍금 연습을 해 온 꽃할배였다.
동네 할매들의 입소문에 의하면 꽃할배가 광안리 수변공원에서 손풍금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꽃할배에 대한 소문은 그리 좋지 않았다. 누구는 마누라가 젊은 총각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 했다. 또 누구는 세 번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했다. 냉정댁은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광안리 수변공원까지 찾아가 보았으나 그를 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井… 우물제 & 물할매 잔칫날
박호·화가 |
냉정댁을 주례댁이 흔들어 깨워도 그녀는 비몽사몽을 헤매고 있었다.
"이봐라. 냉정댁아! 일어나란 말이다.
드디어 꽃할배가 나타났단 말이다. 퍼뜩 일어나 봐라.
이럴 때 꾀꼬리 같은 니 노래도 들어보제이.
내 먼저 가서 기다리꾸마."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 샘터에는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 동네 아이들, 동네 할배랑 할매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모두들 무엇이 그리 흥겨운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졸졸 물이 흐르는 깨끗한 빨랫돌에 앉아 꽃할배가 연주를 하고 있었고, 신문사에서 나온 젊은이가
냉정 우물을 배경 삼아 손풍금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냉정 샘터는 며칠 사이 놀랍게 단장되어 있었고, 커다란 현수막에
'냉정 우물제, 빨래터 음악제'라고 적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냉정댁! 냉정댁!"하고 부르며 박수를 쳤다.
구포에 사는 냉정댁의 아들 내외도 보였다.
꽃할배는 손풍금을 안고 냉정댁 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냉정댁 손에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냉정댁은 악몽 같은 삶이 힘들었을 때 마음을 달래주었던, '앵두나무 처녀'를 불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어디서 날아오는 꽃잎이 눈처럼 휘날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건널목을 가로질러 기차가 흘러간 시간의 꼬리를 물고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井… 에필로그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이 무심한 길을 버리고
하늘빛 우물 속에 수초도 키우며
귀여운 아이 같은 붕어 떼를 키우며
억만년쯤 머무르다 흐르고 싶다
밤이면 별들이 내려와
꿈의 프리즘을 이루는
이 아름다운 우물가에서
그대 맑은 눈빛 하나 품고서
고요히 흐르는 거울이고 싶다
송유미 시인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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