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이야기 공작소 <15-2> [산복도로 숨은 보석 찾기]- 팩션-'흰여울 마을 사람'들

금산금산 2014. 8. 9. 10:54

이야기 공작소 <15-2>

[산복도로 숨은 보석 찾기]- 팩션-

'흰여울 마을 사람'들

 

 

노을이 깔리자 저 멀리 고깃배 불빛 사뿐사뿐

바다에 내려 앉고…

 

 

 

흰여울 마을길에 들어서면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선박들이 점점이 떠 있는 장엄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남항 외항의 묘박지이다. 흰여울 사람들에게 이곳 묘박지는 만남과 떠남의 일상 풍경이기도 하다. 이준욱 사진작가 제공

 

6·25가 끝나자 비탈진 언덕 위로
따개비 닮은 판잣집들이 들어서고
서서히 군집을 이루며 번져나갔다

푸른 바다와 해와 바람과 바위는
흰여울길 오가며 재잘대는 애들을
무럭무럭 푸른 나무로 키워냈다

무시무시한 태풍 '사라' 강타 땐
집 수십 채 무너지고 쓸려가고…
아비규환 속에서도 서로 위로
다시 일어서 가족처럼 오순도순
정·사랑 가득한 우주같은 동네다


   
흰여울마을의 층층계단

# 1

흰여울마을 앞바다에 비가 내린다.

수천 수만의 동심원이 파문을 일으킨다.

'휘이~' 한 줄기 바람이 비를 몰고 벼랑 위 언덕으로 올라간다.

투둑투둑…. 거미줄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에 빗방울이 흩어진다.

빗방울은 땅에 스며 들고, 낮은 곳으로 모인다.

어우러진다.

물줄기가 되어 콜콜 흐른다.

비탈을 만나 미끄럼을 탄다.

빨라진다.

물줄기는 한 마리 하얀 용이 되어 골목길에서 꼬리를 사리며 사라진다.

꼬리는 다른 골목길에 하얀 얼굴로 다시 나타난다.

부서져 내린다.

흰여울이다!

 

 

# 2 

 

부우-!

낮게 울리는 뱃고동소리.

영선은 이불속에서 눈보다 귀가 먼저 열렸다.

안개가 많이 끼었나부다.

벌써 몇 번이나 방문을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비몽사몽 꿈속에서다.

오줌이 마렵다.

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간다.

흰여울길 비탈진 언덕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바다를 보며 오줌을 눈다.

새벽 안개의 축축한 냉기가 엉덩이에 느껴진다.

안개 사이로 아슴아슴 배들이 보인다.

조금만 더 이불속에 있었으면 쌀 뻔했다.

동네방네 오줌싸개로 돌아다니며 소금을 얻어야 하는 것은 죽을 맛이다.

바지를 치켜 올린 영선은 돌아선다.

간밤에 내린 비로 길이 질척거린다.

검정고무신이 찰진 흙길에 달라붙었다.

발가락에 힘을 주어 고무신을 치켜보지만 잘 안 된다.

영선은 다시 용을 써 본다.

'쩌억-' 고무신이 땅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만 몸의 균형을 잃고 미끄러진다.

흰여울길 가에 서 있던 영선은 그대로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영선이 눈을 뜬 곳은 흰여울마을 인근에 있는 천막병원(고신의료원 전신)이었다.

 "괜찮니?"

북한에서 내려와 천막병원을 열고 의술을 펼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이 영선에게 말을 건넸다.

다행스럽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절영로변에 자리한 낡은 집(일명 바람아저씨 집)

# 3 

 

한돌은 외삼촌 '풍'이 일하는 천막병원에서 영선을 처음 보았다.

풍은 문을 연지 얼마되지 않은 천막병원에서 허드렛일을 도우고 있었다. 한돌은 외삼촌에게 놀러왔다가 정신을 잃고 아버지 등에 업혀 천막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아이를 봤다.

죽었나 싶어 호기심에 천막 안을 기웃거리다가

여자 아이가 깨어나는 것을 봤다.

똘망한 눈이 예뻤다.

한돌이 영선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대평동에서 흰여울마을로 이사를 한 날이었다.

 


한돌의 가족은 이북 피란민으로 6·25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송도 자갈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생활하였다.

이후 대평동 서쪽끝 폐선 야적장에 2평 반짜리 가마니 움막집을 짓고 살다가 화재를 만나

살던 집이 몽땅 불타 버렸다.

그리고 이곳으로 찾아들게 된 것이다.

영선은 한돌이와 또래로 보였다.

"아아아아, 안녕!"

 

말을 더듬는 풍이 영선에게 인사를 했다.

영선은 쪼르르르 어머니의 치맛자락 뒤로 숨었다.

한돌과 풍은 치마꼬리 뒤로 눈만 빼꼼이 내놓고 자신들을 쳐다 보는 영선을 보았다.

풍은 영선이 가져다 준 돌멩이로 땅에 선을 그었다.

선 위에 판자와 종이를 이용한 하꼬방(집)이 올라갔다.

따개비 닮은 하꼬방들이 비탈진 언덕에 군집을 이루며 번져 나갔다.

삶도 따개비처럼 척박했다.

남자들은 지게꾼으로 여자들은 간장공장, 성냥공장으로 일거리를 찾아 나갔다.

아이들은 구두통을 짊어졌다.


   
마을 내의 두레박샘

# 4

 

아이들의 점심 밥상은 어느 집인들 거의 예외가 없었다.

가파른 다랭이밭에서 캐 삶아 데친 시금치, 근대 나물 한 보시기가

쌀밥 그릇을 대신했다.

아이들은 나물을 간장 종지에 콕콕 찍어 먹고는 땔감을 하러 나갔다.

봉래산 나무로 아궁이에 불을 피웠던 탓에

봉래산은 금세 민둥산이 되었다.

아이들은 태종대로 갔다.

태종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흰여울길은 멀고도 가까운 길이었다.

태종대에서 땔감을 해 이고 지고 돌아올 무렵이 되면 아이들의 배에서는 '꼬륵, 꼬륵, 꼬르륵…'

'밥 달라'

소리가 회를 치기 마련이다.

그만큼이나 했으면 허기에 이골이 나거나 습관이 들만도 한데

이 놈들은 절대로 포기를 몰랐다.

그때, 치성바위가 아이들을 불러들인다.

배고픈 아이들의 허기를 채워준 것은 치성바위였다.

아이를 원하는 여인들이 치성을 들인 음식, 신께 바친 음식을 아이들은 맛나게 먹었다.

가난해도 즐거웠다.

형제, 누이 같은 친구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흰여울길을 오가며 길가의 풀을 뽑아 풀피리 불고 노래를 부르며 열을 지어 걸었다.



# 5

 

바다와 해와 바람과 바위는 아이들을 무럭무럭 푸른 나무로 키워냈다.

영선은 저녁이면 물동이를 들고 '연애골짝'을 향했다.

연애골짝은 봉래산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찻집 하나 마땅한 것이 없던 시절, 봉래산 골짜기 샘을 오고 가는 길목은 청춘남녀의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영선이 연애골짝에 물길러 가는 것은 동네 처녀들처럼 연애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봉래산 골짜기 초입에 있는 초록집 주인, 풍아저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얼마 전 아저씨는 한돌의 집에서 독립을 했다.

흰여울마을에서 태어난 한돌의 동생들이 줄줄이 자라 더 이상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큰 키에 마른 몸, 그리고 우수에 찬 눈빛이 영선은 무엇보다 좋았다.

어머니는 '풍'을 두고 '사람이 키만 멀거니 커 맺힌 데가 없고, 말도 더듬어 영 못쓴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평가는 믿을게 못되었다.

아버지를 고른 어머니의 안목을 본다면 그건 확실했다.

 


# 6 

 

붉은 노을이 하늘에 걸려 있다.

점점이 떠 있는 수평선 외항 묘박지의 큰 배에도 하얀 불빛이 초롱처럼 달린다.

바닷가 홍등가에는 휘황한 불빛이 피어난다.

한돌은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흰여울길의 익숙한 풍경을 보며 걷는다.

청춘들의 노랫소리가 노을을 타고 흰여울길로 올라온다.

취객의 소매를 밀고 당기는 아가씨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것만 갖다 주면 되죠?"

 

해녀 할매의 집에서 영선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한돌은 걸음을 멈춘다.

영선이 나오다가 한돌과 마주친다.

"아, 깜짝이야! 놀랬잖아."

"바닷가에 가나?"

"응, 해순이 언니한테…."

"뭐고, 그거 술안주 할 거 아이가?"

 

한돌은 영선이 들고 있는 조개바구니를 못마땅하게 본다.

"그렇겠지?"

 

뭘 다 알면서 물어보냐는 식이다.

"다 큰 가시나가 어디 그런 데를 들락거린다 말이고?"

"뭐 어때서?"

 

영선이 톡, 쏜다.

"어때서라니, 술 취한 놈들이 드글드글한데…."

 

한돌은 영선이 밤바닷가에 내려갔다가 행여 취객들에게 낭패라도 당할까싶어 걱정이다.

 


"누가 왔나?"

 

해녀 할매가 나온다.

 

"할매요, 담부턴 영선이한테 이런 심부름시키지 마이소!"

 

한돌이가 영선의 손에 있던 바구니를 홱 뺏어 돌아선다.

 

"성질머리하구는!"

 

영선이가 한돌의 등 뒤에 대고 쫑알댄다.

 

"할매, 죄송해요."

 

영선이 대신 사과를 한다.

 

"아이다, 내가 미안치. 근데, 영선아. 한돌이 저 아가 아무래도 니를 좋아하는갑다."

 "…."

 영선도 안다.

 하지만 바닷가를 내려가는 한돌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것은 풍 아저씨 뿐이다.

 

수평선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 뿜어내는 불빛이 아름답다.

 

"비가 올래나, 삭신이 쑤시네…."

 

해녀 할매가 영선의 옆에 서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린다.

 


# 7

 

 '태풍 '사라'가 상륙하고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피해가 없도록…. 지직, 지지직….'

 

영선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하꼬방 문틈으로 비바람이 들이치고 루핑집 지붕은 덜거럭,덜거럭, 요란한 소리를 낸다.

"안되겠어, 우리도 피합시다."

 

영선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집밖으로 나왔다.

흰여울길 아래의 비탈진 언덕에 일궈 놓은 다랭이밭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진 것이 보였다.

다랭이밭 옆에 지어진 수십 여 가구의 하꼬방들도 언제 무너질지 위태로워 보였다.

영선의 가족은 대피소로 갔다.

이미 일가친척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옮겨 갔다.

피란민들이나 의지가지 할 데 없는 사람들은 대피소로 모여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밤이 되자 비바람이 더욱 심해졌다.


"아저씨는?"

 

영선이 묻는다.

 

"오겠지."

 

한돌은 신경이 곤두선다.

언제부터인지 한돌은 외삼촌 풍을 보는 영선의 눈길이 남다름을 느꼈다.

그럴 때마다 한돌은 가슴이 답답했다.

대피소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소리, 지붕 날아가는 소리, 물건이 부딪쳐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영선의 눈은 불안하게 문을 응시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선은 가족들 모르게 슬며시 대피소를 빠져나간다.

'문디 가시나…'

 

한돌은 영선이가 어디를 가는지 알 것 같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모른척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 뿐, 몸은 이내 영선이가 나간 대피소 문을 밀고 따라 나간다.

거친 짐승같은 바람이 잡아먹을 듯이 한돌의 몸을 덮친다.

"영선아~!"

 

칠흑같은 어둠 속, 몸조차 가누기 힘든 비바람 속에서 한돌은 영선을 부른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영선아~!"

 

마을 전체를 집어 삼키는 바람소리는 한돌의 목소리도 삼켜버린다.

한돌은 비바람과 어둠을 헤집고 외삼촌 풍의 초록집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골목길 저 앞에 영선의 모습이 보인다.

한돌은 몸을 휘청거리며 영선에게 빠르게 다가간다.

그때, '휘이잉~ 휭~'. '우당탕, 탕탕탕탕!'

바람에 날린 루핑집 지붕 하나가 영선의 앞으로 날아든다.

 

한돌이 그대로 몸을 날려 영선을 부둥켜 안고 넘어진다.

날아온 지붕이 넘어진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까스로 지나 땅에 부딪친다.

산산이 부서진다.

땅에 흩어진 지붕 파편은 다시 세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른다.

세상은 비와 바람과 소리,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숨죽여 엎드려 바람이 지나가 버리기를 바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 8

 

아침이 왔다.

태양이 바다 위로 밝게 떠올랐다.

흰여울마을에 비치는 햇빛은 그 어느 때보다 청량했다.

가파른 언덕과 다랭이밭은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그 곳에 있었던 수십 여 채의 하꼬방들도 무너지고 흙더미에 떠밀려 사라졌다.

가파른 언덕은  벼랑이 되었다.

흰여울 사람들은 지붕을 새로 얹고 흙으로 덮인 길과 깨진 살림살이들을 쓸고 닦았다.

며칠이 지나자 마을은 평온을 찾기 시작했다.

영선은 흰여울길에 화덕을 피웠다.

한돌은 동네 아이들을 끌고가 바다에서 조개와 홍합을 한 가득 건져 왔다.

영선은 큰 솥에 물을 길어다 붓고 홍합을 삶는다.

멍석도 깔았다.

흰여울길에 선 한돌이가 동네 아이들을 부른다.

개똥아~ 후남아~  

 

흰여울길에서 부르는 한돌의 목소리가 흰여울마을로 퍼져 나간다.

흰여울길에서 부르는 소리는 흰여울마을 어느 곳에서든 다 들린다.

그만큼 작은 집들, 작은 동네다.

하지만 옹기종기 이웃으로 형제로 가족으로 살아가는 정과 사랑이 가득한, 큰 우주같은 동네다.

좁은 흰여울길이 왁자해졌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하나 둘 모여 들어 멍석에 둘러 앉는다.

웃음꽃이 피어난다.

큰 솥에는 뜨거운 김이 펑펑 솟아오른다.

영선은 솥뚜껑을 열고 홍합을 한 그릇씩 퍼 담아 사람들에게 안긴다.

모두 맛있게 먹는다.

영선은 분주함과 웃음 속에서 허전함을 느낀다.

풍아저씨는 어디있는 것일까. 무사하겠지? 무사하기만 하였으면….

 

그때였다.

껑충 큰 키에 마른 몸의 풍아저씨가 나타난 것은!

영선의 가슴이 불에 데인 듯 두근거린다.

'풍'이다.

"하 하 한돌아! 여 여 영 영선아!"

 

풍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소리친다.

 

"아저씨~"

 

영선이 손에 든 국자를 하늘로 치켜 들고 흔든다.

한돌은 먹던 홍합 그릇을 땅에 내려 놓고 이제 막 흰여울길로 들어선 외삼촌을 쳐다본다.

태풍 속에서 소식 없어 걱정했던 외삼촌이 무사해 반갑다.

그런데 풍 외삼촌을 바라보는 영선의 환한 얼굴이 괴롭다.

'문디 가시나, 내 마음은 몰라주고….'

 

영선은 가슴이 벅차다.

흰여울길,

장대 끝 빨래줄에 널린 하얀 빨래가 햇빛 속에 눈부시다.

김민수 시나리오 작가·스토리세상 '플랫폼' 대표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