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5-3>
[산복도로 숨은 보석 찾기]-
팩션: '행복 찾기' 버스투어
우리는 위만 보고 살아왔어, 그게 이곳에 여행 온 이유야
'부산의 지붕'을 달리는 산복도로 투어버스. 부산의 근현대사 애환을 돌아볼 수 있는 감성이 숨쉬는 투어 코스다. 부산 동구청 제공 |
둘이서 데이트 할 때도 아름답고 멋진 곳으로만 다녔고, 나쁘지 않은 음식만을 먹으며
서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로만 자신을 보여 주었지.
나는 알았어.
나의 뿌리는 높은 곳에 있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걸.
그래서 어쩌면 이것이 둘이서 만나는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르겠어.
우리 위에 놓여 있는 풍경보다 우리 아래에 놓여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지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몰라서 이곳을 택한 거야.
1년 전 부산 초량동 산복도로 청마 유치환 우체통에서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를 받았을 때, 지금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하고 말해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너를 보내지 않았기에….'
이렇게 쓴 내용 중 선택이란 것은 그날 함께 한 여행이었다.
지금부터 1년 전은 빛보다 더 많은 어둠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사귀던 여자 친구가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만나도 신선감 없이 시무룩해져
관계가 위태로워져 있을 때였다.
둘 사이의 이런 상태를 눈치 챈 친구가 치유법으로 소개해 준 것이 함께 여행을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 보다는 멀리 남쪽으로 가라는 것이다.
집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여자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더 신뢰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개해 준 것이 부산역 앞에서 출발하는 산복도로 버스투어였다.
그 버스를 타면 더 많은 생각과 얻을 것이 많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뭐 우리들 사이에 끼어있는 암울한 안개를 걷어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러나 그 친구가 권할 때는 어느 정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믿었다.
"임마, 그냥 이별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녀 와!"
그래 이별여행.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날렸다.
KTX 타고 부산에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자고.
그녀도 선뜩 나의 제안에 동감을 표시하였고, 1년 전 토요일
그녀와 함께 오전 7시 부산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여행은 남자보다 여자를 더 들뜨게 만드나보다.
아니면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별여행이라 생각하고 나왔기에 더 홀가분한 마음이었나 보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평소보다 표정이 밝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상냥스러웠다.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산에 도착하는 동안 둘 사이에 나눈 대화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폰으로 자신의 세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제 겨우 출발인 걸 뭐.
부산역 광장 오른 편에서 출발하는 산복도로 투어 버스 앞으로 갔다.
버스는 미니 버스였다.
사전에 예약해 둔 시간에 맞게 도착하여 기다리는 버스에 그녀와 함께 올랐다.
그녀는 의아해했다.
덮개가 없는 근사한 부산 투어버스에 오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작고 초라한 마을버스 같은 차에 오르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디로 가는데?"
처음으로 그녀가 물었다.
"응, 우리가 가는 곳은 서울이야. 조금 둘러서."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한 곳으로 데려 간다고 해도 투정 부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 이미 나를 지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이해하기로 했다.
이별여행이니까.
이 여행이 끝나면 안타깝더라도 우린 원점 이전의 지극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겠지.
버스를 타고 7~8분 정도 달린 뒤 도착한 곳은 매축지라는 곳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공간으로 골목을 만들고 붙어 있는 집들은
골목길에서 바로 집 안으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난한 생활을 가리기 위한 작업들이 시작되고 있는지 벽면에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오래되어 낡고 퇴색된 그림도 있었다.
골목은 골목을 낳고 집은 집을 감추었다.
이런 곳에서도 삶이 이뤄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그녀는 의외로 진지한 표정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이었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언제 우리가 생각이나 해 볼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인가?
여기에서 이웃의 진실을 엿본다는 생각이 밀려 왔다.
사람 냄새 나는 이곳에서 그녀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다시 시간에 쫓긴 버스가 승객들을 불렀다.
버스를 타고 다시 15분 여.
도착한 곳은 안창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좁고 구부러진 골목들과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간간이 오가는 할머니들이
지극히 평화스런 모습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높은 이 골짜기에 오리불고기 식당이 많았다.
오래 전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여 이 마을에 특화 업종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식당들은 이 마을 사람들보다 외지인에게 인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 마을 초입에도 어김없이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을 둘러 도착한 곳에 행복공방이 있었다.
방문객들도 도자기 작업과 천연 염료로 염색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모여 염색과 그릇을 만들고 있다.
일행은 시간 관계상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공방에서 투어객들에게 선물하는 손수건을 챙겼다.
곱게 염색된 손수건은 행복이 담긴 수건이라 했다.
그런데 내게 하필 손수건이람. 이것도 운명인가?
"손수건 선물은 이별을 뜻한다지?"
내가 물었다.
"응, 그래."
안창마을에서 나와 다시 구불구불한 도로를 달렸다.
투어버스가 작아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조금 뒤 고개 하나를 넘고 나서는 망양로 즉 산복도로 본선에 들어선 순간
탁 트인 전망에 부산항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투어버스 안 사람들이 탄성을 발했다.
그녀도 나를 돌아보며 참으로 여행을 잘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이다.
나는 밖의 풍경들보다 밝은 그녀 표정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꼭 껴안아주고 싶었다.
전망도 물론이거니와 작은 집들이 엉켜 있는 산동네 풍경들이 스쳐 갈 때마다
고개가 절로 돌아가며 지나간 풍경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모습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저런 곳에다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 의문이 아파트만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슴에 물결무늬를 새겼다.
출렁거리는 생의 물결이 아닐까.
부산 초량동 산복도로 전망대에 있는 유치환 우체통. |
다음에 닿은 곳은 청마우체통이었다.
건물 옥상이 주차장이 되어있는 특이한 풍경과 붙어있는 건물 옥상에 빨간 우체통과 주사위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옥상 아래는 [청마 유치환] 시인을 기리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으로 내려갔다.
시인의 방에는 시가 걸려있고 넓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부산항 풍경은 그대로 200호쯤 되는 대형 그림액자가 되었다.
맺혔던 가슴이 탁 뚫렸다.
유치환 시인이 이곳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청마가 시조시인 정운과 나눈 행복한 편지를
누구나 써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청마 우체통이 있을까?
'나는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내가 지금 그녀에게 꼭 써 보내고 싶은 내용이었다.
우리는 시인의 방에서 엽서를 썼다.
1년 후에 배달되는 엽서를 자기 앞으로 쓰란다.
지금 나의 생각이 일 년 후에 어떻게 나에게 전달될 것인지. 아, 고민이 된다.
무엇을 쓸 것인가?
옆을 보니 그녀도 유리창 저쪽 끝에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
일행과 함께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일 년 후에나 들려오겠지.
기다리자. 사랑은 기다리는 일이므로.
"뭐라고 썼어?"
그녀가 궁금했는지 먼저 물었다.
"내가 물으면 넌 가르쳐 줄 수 있겠니?"
행복한 우체통을 떠나 5분 쯤 되는 거리에 '이바구 공작소'가 있었다.
그곳에서도 전망은 끝없이 터졌다.
사람들이 높은 곳에 사는 이유를 알겠다.
막힘없는 곳에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 떠올랐다.
가난하고 척박했던 과거 이 높은 곳에 살았던 사람들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져 전시되고 있다.
사진 속 지붕 아래에서 따뜻한 손들이 나올 것만 같다.
사는 이야기도 새록새록 묻어 날 것만 같다.
그런데 사진 외에는 딱히 볼거리가 없다.
이바구 공작소에는 이바구가 없다는 게 탑승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 5분쯤 비탈 층계를 내려가니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유명한 168계단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뻗은 골목 끝에 위치한다.
내려가는 중에 낮은 담 위에 쳐져 있는 녹 슨 철조망과 유리병을 깨뜨려서 꼽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까?"
혼자 말처럼 그녀가 물었다.
"아마도 행복이란 물건이 아니었을까."
"행복?"
전망대는 중간쯤에 위치해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시야를 선물한다.
어쩌면 부산역과 부산항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 의미 깊은 공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투어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그녀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김민부가 누구죠?"
그녀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혹시,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 주오~' 이 노래 알어?"
"알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가곡이잖아."
"그래, 그 노래 가사를 쓴 시인이지."
"그런데 그분 시는 많이 보지 못했는데."
"일찍 요절했어. 서른 한 살인가?"
"그래서 그 노래가 더 절절하게 들리는구나."
"기다리는 마음, 참 아름다운 마음이지. 우린 늘 기다리며 사는 거지."
"…."
"우리 여기서 커피 한 잔 하고 버스에서 그만 내리자. 내 할 얘기가 끝났으니까."
"할 얘기가 있었어. 그게 뭐지?"
"오늘 풍경들 속에서 스스로 답을 구해 봐."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넌 왜 이곳을 여행지로 택했지?"
그녀는 오늘 투어하는 내내 그 의문에 사로잡혀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말해 주었다.
부산하면 이름난 곳이 참 많지.
해운대, 태종대, 자갈치, 범어사, 을숙도 등등.
그런 곳은 아름다운 풍경만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지만 가슴에는 남지 않아.
이곳은 사람들과 어우러진 낮은 풍경들이 가는 곳마다 삶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지.
우리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지.
우리는 위만 보고 살아 왔어. 둘이서 데이트 할 때도 아름답고 멋진 곳으로만 다녔고,
나쁘지 않은 음식만을 먹으며 서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로만 자신을 보여 주었지.
나는 알았어.
나의 뿌리는 높은 곳에 있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있다는 걸.
그래서 어쩌면 이것이 둘이서 만나는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르겠기에
우리 위에 놓여 있는 풍경보다 우리 아래에 놓여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지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일지도 몰라서 이곳을 택한 거야.
그리고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오늘 네가 본 풍경 속에 다 담았어.
읽고 해석하는 것은 네 자유이고 네 능력이야.
와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함께 해서 행복했어.
그녀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커피만 홀짝거렸다.
커피 맛이 어땠는지? 쓴 맛으로 기억될 것인지 단맛으로 기억될 것인지는 그녀 외에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바쁘게 부산 산복도로 버스투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1년 전 그녀가 쓴 편지가 내 편지와 함께 나란히 걸려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곁에 있다. 일 년 후에도 이 의미가 달라져 있지 않기를 바래. 행복을 찾아줘서 고마워~ ^^'
강영환 시인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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