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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공작소 <16-4>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신선 '신선 프레시' 신선!-영도 봉래산에서

금산금산 2014. 10. 4. 09:25

이야기 공작소 <16-4>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신선 '신선 프레시' 신선!-영도 봉래산에서

 

 

신선은 갖가지 모습으로 우리 곁을 맴돈다, 옛 약속을 지키려…

 

 

 

 

일러스트= 최해솔·카투니스트

 

 

"총각, 우리 내기 하나 안 해 볼랑가? 내가 문제를 낼테니…"
"좋지예, 제가 이기면 할매가 수박 두 통을 사셔야 합니더"
"그랴, 맞춰봐. 요 동네가 왜 신선동이라 일컫는지 아는가"
"어…, 그라이까… 옛날 신선이 살았다고 神仙洞이 됐지예"
"틀렸어,새 아씨를 모시는 새 동네라고 新仙洞인 된거야"

 

할머니는 점점 아줌마·아가씨로 변해가며 말을 이어갔다
"모두 절하라."

경상좌수영 부산진첨절제사 정발이 낮고 강하게 호령하자

뒤에 섰던 부산진 소속 300여명의 관리, 군사들이 한꺼번에 손을 모으고

당집 앞에 차려진 제사상에 절을 올렸다.

첨사 정발도 병사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정발은 자신의 꿈에 나타났던 가녀린 여인을 다시 떠올렸다.

"날 위해 사당을 지어주시면 군마는 무병장수하고

장차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될 때 태평무사 하게 될 것입니다."


왜군이 들이닥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시절이었다.

군마가 죽어나가며 이송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바로 잡는 구실이 필요했다.

사당을 짓는 것에 대해 미신을 따르는 거냐며 따져 묻던

동래부사에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병사들은 들으라. 이곳 절영도의 군마가 죽어나간 것은 벌써 수 년 간의 일.

이 어찌 천운의 탓으로만 돌릴 일이랴?

내 하늘의 뜻을 기려 탐라국에서 온 칠원성군 아씨의 당집을 지었으니 군마는 마땅히 살아있어야 할 터.

이제 남은 것은 천재가 아닌 인재뿐이라. 앞으로 군마 뿐만 아니라 모든 군수품의 관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

만약 사사로이 군의 재산을 쓴 것이 발각된다면 그는 죽음으로 그 죗값을 치르리라!"

부산진첨사 정발의 추상같은 선언에 가슴이 뜨끔한 이도 있을 것이고, 시원한 이도 있을 것이었다.

아씨당이 들어선 이후 군마의 죽음은 사라졌으나 임진년의 왜란은 많은 사람을 죽게 한다.

절영도에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이라 사람을 태평무사 하게 해준다는 말이

공중에 떠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신선(女神仙)은 지금까지 영도 신선동(新仙洞)에 남아 그 옛날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사람들에게 갖가지 모습으로 현신하면서….



영도 봉래산 정상부에 걸린 허연 구름이 마치 신선이 산다는 전설 속의 봉래산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국제신문 DB

"신선 신선 프레시, 신선! 신선한 과일을 싼 가격에 드립니다."

트럭 뒤에 달린 스피커가 소리 높여 과일을 사라고 외쳤다.

그러나 뜨거운 여름날의 골목은 한산하기만 할 뿐, 스피커와 경쟁하는

매미 소리만 속절없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과일 장수 영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길을 잘못 들어왔나…?"

담배 생각에 주머니를 뒤졌지만 담뱃갑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버지와 말다툼 하느라 본가에 놓고 온 게 분명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영수는 트럭에서 내려 바로 앞 슈퍼로 향했다.

하지만 두 발짝도 못가 유리창에 붙은 글을 발견하고는 한숨을 한 번 더 쉬고 말았다.

'급한 용무로 2시간 뒤에 엽니다.'

"오늘 하는 일마다 와 이렇노…? 쯧!"



날도 더운데다 속에서 열이 나자 이마에 땀방울이 저절로 맺혀 올랐다.

손부채를 하며 무심결에 고개를 들자 아버지처럼 고집스러워 보이는 봉래산이 눈에 들어왔다.



"아, 미치겠네. 돈만 준비하면 됐지, 와 말도 없이 가게 계약을 한단 말이요?"

"씰 데 없는데 채리는 것 보다 백배 낫다."

아버지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지만 말씀은 입술보다 더 무겁고 완고했다.

"내가 봐놘 데가 있다 안하요? 친구 얘기도 거기가 괜찮다고…."

"이 자슥아, 친구는 무슨 친구? 니가 영도 나가서 친구한테 사기를 몇 번이나 당했더노?"

아버지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자 영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이, 이번에는 진짜 아니라니까 와, 와 사람 말을 못 믿소?"

"시끄럽다. 이번에는 내 말 들어라. 니 지금까지 트럭장사 못 면하는 것도 영도 할매가 밉봐서 그런 기다."

영수의 눈에 불이 번쩍 났다.

저 놈의 영도 할매 소리….

"내 영도 살기 싫다고 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라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는 영수의 귓가에

 '저, 저 자슥…!'하는 아버지의 탄식이 흘러들어왔다.



"보소, 총각, 쩌어기 수박 하나 우째 하요이?"

봉래산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탄식을 깨는 부름이었다.

깜짝 놀란 영수가 돌아보자 사람하나 나올까 말까한 샛길에서 할머니 한 분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굽은 허리에 주름살이 가득한 할머니는 수박을 손가락질 하는 중이었다.

아침나절 돌아다닌 지 두 시간 만에 나타난 손님이었다.

영수는 얼른 땀을 훔치고 수박을 쓰다듬었다.

"아, 이거는 팔천 원이고, 이거는 만 원입니다."

"워매, 우째 그리 비싸댜? 쩌번에 팔러 온 사람은 삼천 원짜리도 팔던디…."

"아따, 할매, 그런 거는 비닐하우스에서도 따로 빼난 기라요. 짤라 묵으면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기라요."

"그랴도 이건 너무 비싼디?"

"할매, 나도 진짜 마진 빼고 파는 기요. 8천 원짜리 이것도 마트가면 만 원 넘게 받는 깁니더."

내미는 수박을 살펴보던 할머니가 귀를 대고 손가락으로 통통 튕겨보았다.

"흐음, 참말로 소리가 좋기는 하네? 근디 총각 예전에 나 본 적 없는가? 낯이 익네."

"그래요? 하하, 내가 어디서 많이 봤단 소리는 한 번 씩 듣지요. 수박 이거 살 거지요?"

"진짜 신선한 거 맞지라?"

"아따, 할매, 속고만 살았나? 이거, 이거. 오늘 아침에 내가 직접 갖고 온 거라요."

할머니는 그제야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신선동에서 신선하다 했으니께 맞겄지.

 총각, 여그 신선동서 거짓부렁하믄 산제당(山祭堂) 옆에 사는 아씨가 잡아간당께."

영수는 그때서야 자기가 신선동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계약해 놓았다는 가게가 있는 동네였다.

싫다면서도 무심결에 운전대를 이쪽으로 돌린 이유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만 원을 받고 이천 원을 넘기던 영수는 할머니의 수다에 왠지 모를 호기심이 솟아났다.

"신선동서 신선…? 아따, 할매 말장난도 잘 치요. 요새 아아들 말로 랩퍼 해도 되겠소."

"신선동서 신선이 뭐가 장난이여? 총각이 영도 사람이 아니구마이."

"야아? 우리 아버지가 영도 사는데요? 나간 지 좀 되서 그렇지, 내도 얼마 전까지 영도 살았소."

"보랑께, 영도 살았잖어. 분명히 나하고 본 적이 있다니께?"

방금 산 수박을 받을 생각도 않고 다른 수박을 두드리던 할머니가 싱긋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그라믄 총각, 우리 얼굴도 아는 사이에…, 우째? 내기 하나 안 해 볼랑가?"

쏴아아, 갑자기 봉래산 위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더위가 한결 가시는 탓에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개 짖는 소리도 없이 골목은 조용한데 영수의 귀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간질거리듯 들려왔다.

"문제 하나 낼 테니께 틀리면 한 통 그냥 주고…, 맞히면 내가 수박 두 통 사고."

눈을 뜨자 할머니의 얼굴이 한결 젊어진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굽었던 허리도 조금 펴진 것 같았다.

더위 탓에 눈이 어질한가 싶은데 할머니가 다시 물어왔다.

"우째…, 내기 할 자신이 없어?"

영수는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 누가 시킨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지요, 내가 이기면 할매가 수박 두 통을 사고."

"그랴, 그랴. 총각 시원해서 좋구면. 홀홀홀. 내가 문제 낼 테니까 잘 들어 보랑께.

 여그 요 동네가 우째서 신선동인가?"

"어…, 그라이까…."

영수의 입이 빨리 떨어지지 않았다.

눈이 또 슬며시 감겨왔다.

아까부터 눈이 자꾸 감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할머니의 말은 쏙쏙 귀에 들어왔다.

"왜? 모르는가? 영도 살았담서 그것도 몰러? 호호호."

할머니 웃음소리가 더 젊어졌다.

아니야, 지금 그게 문젠가? 마수걸이를 꽁으로 하면 하루를 망친단 말이다.

청학동, 영선동, 봉래산, 영도 할매….

진시황이 불로초 찾으러 온 데가 봉래산이란 말도 들었고, 삼신산이 영도 봉래산하고 저어기 영선산하고…, 또 하나는 뭐라고 했더라?

그건 그렇고 이건 전부 신선 얘기하고 관련 있는 거 아니냐? 아, 왜 이렇게 눈이 감기지?

"어…, 그라이까…. 옛날에 신선이 살았다고 영도 천지가 신선들 사는 데로 도배가 된 거 아이요?

이 동네도 신선이 살았다고 신선동이겠지요. 신선할 때 한자 그대로 신선동(神仙洞) 아입니까?"

그래도 들은 건 있기에 영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더 큰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틀렸어, 틀렸어. 수박 한 통 얻게 생겼네."

영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할머니는 이제 할머니라 부르기에 어색할 정도로 젊어져 있었다.

"이 동네가 자네 눈에는 마뜩찮아 그렇지, 새 아씨를 모시는 새 동네란 말이야.

말 그대로 여자 신선이라고, 새로운 신선이 있는 동네. 신선동(新仙洞)이란 말이지."

그 와중에도 할머니는 자꾸 젊어져 이젠 아줌마도 아닌 아가씨의 모습으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영수야, 옛날에 네가 길 잃고 우리 집에 왔을 때가 생각나니? 그때도 똑같은 문제에 틀리더니…. 호호호!"

영수는 자기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낯익다는 걸 느꼈다.

또한 점점 작아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깨달았다.

"할매, 아니, 아줌마, 아니, 누나, 내 인자 누나가 누군 줄 알겠어요."

영수의 목소리는 이미 어린 아이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그럼 아버지가 찾아왔을 때가 기억나니?"

"…."

무언가 아련한 기억만 떠오를 뿐 막연함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둑한 무렵 자신을 업고 가던 아버지의 땀 내음이 떠오를 뿐이었다.

길 잃은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는 아씨당 툇마루에서 어린 것을 찾자 커다란 가슴에 그를 꼭 품었었다.

"아이고, 아씨요. 아들래미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자슥아, 다시는 니를 안 이자 묵는다. 애비가 아무리 못나도 니는 끝까지…."

점점 뚜렷해지는 아버지의 땀 내음이 영수의 눈시울을 점점 뜨겁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의 말다툼과 '저 자슥이…'하던 아버지의 탄식이 옛 추억과 섞여 영수의 가슴을 아프게만 했다.



"어어어, 아버지, 어허허헝…!"

두 손을 들며 아버지를 찾던 영수는 차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날이 저무는지 노을이 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리둥절한 영수가 유리창을 내리자 아주머니 하나가 말했다.

"아저씨, 장사는 안하고 자면 우짜노? 저기 수박하고 토마토 어떻게 해요?"

"아, 예예. 작은 건 팔천 원에 큰 거는 만 원입니다."

"아저씨, 저도 수박하나 봐 주세요."

마침 아기 손을 잡고 가던 색시도 아주머니 옆에 서서 수박을 두드렸고,

슈퍼 문을 드르륵 연 슈퍼주인도 트럭에 실린 과일을 살피기 시작했다.

 

"신선 신선 프레시 신선, 신선한 과일을 싸게 드립니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말을 들은 아주머니 한 명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저씨, 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는 법을 아네. 신선동이니까 신선해야지."

그 말에 주위에 섰던 손님들이 깔깔 웃어댔다.

아까는 없던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몰려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영수의 트럭에 실린 과일은 삽시간에 동이 났다.

"저기 아줌마, 여기서 산제당하고 아씨당이 멉니까?"

"아니요,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되요. 당집 두 개가 거의 붙어 있어요."

"아아, 예. 고맙습니다."

 

 

마지막 손님에게 길을 물었던 영수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영수의 옆자리에는 팔지 않고 남긴 만 원짜리 수박 세 통이 놓여 있었다.

아직도 생생한 꿈속의 누나, 아니, 아줌마, 아니, 할머니,

아니, 아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나머지 한 통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수박 안주에 시원한 맥주라도 대접하며 아버지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봉래산 자락의 공기가 영수의 이마를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배길남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정보산업진흥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