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16-6>
[신선(神仙)한 부산]- 팩션:
시인과 신선- '겸효대 이야기'대 이야기
바둑이나 두며 놀고 먹고, 백수와 신선은 닮은 점이 참 많긴 하네만…
카투니스트= 최해솔 |
"저도 신선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선이 될까요"
"백수생활처럼 무위도식, 그게 신선이지 신선이 별겐가"
"그런 신선 말고 영생불멸의 비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방법을 안다고 모두 되는 것은 아니네, 문제는 수양이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자가 어찌 신선이 될 수 있겠는가
제 아무리 수련해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어렵다네"
한 삼십여 년 전 범어사 아래 동네에 '상촌'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총각으로 살았는데 금정산에서 신선과 같이 놀았다는 이야기가 풍문으로 전해온다.
금정산에 신선이 있었다니?
호랑이 담배 피울적 이야기도 아니고 요즈음 세상에 신선이 살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허풍이 심한 것 같다.
그것도 금강산이나 하다못해 지리산 정도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큰 대도시 주변 뒷산이라 할 수 있는 금정산에 신선이 살았다니….
정신이 나간 자의 헛소리이거나 허황된 소설가 원고지 장수나 채우려 쓴
쓸데 없는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로 딱일지 모른다.
아무튼 상촌이 거의 매일 무거운 바둑판을 등에 지고 범어사 능선 너머 계곡까지 가서 신선과 바둑을 뒀다고
했고, 그 스스로 신선이 되기 위해 태백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보면 마냥 풍문으로만 무시해 버리기엔
뭔가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당시 상촌은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했지만 남들은 할일 없어
그냥 놀고먹는 한심한 백수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상촌이 신선을 만난 것은 더운 여름이었다.
평소 자주 가던 범어사 주변 계곡이었는데 그곳은 별다른 할일 없는 그가 거의 매일 산책하는 코스였다.
산책을 하다 더우면 계곡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그날도 날이 몹시 더워 옷을 다 벗어던진 뒤 계곡물로 뛰어들었다.
시원한 물에 더위를 식힌 뒤 기분이 상쾌해진 상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솜털 같은 구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고, 듬성듬성 파란 하늘이 흰 구름과 대비되어 너무 기분이 좋았다.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다 문득 건너 편 바위 옆에 정말 신선 같은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그래서 눈을 몇 번이고 부볐다.
헛것이 아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현실이었고, 실체가 있었다.
상체가 조금씩 흔들거리며 뭔가를 읊조리는 것 같았다.
상촌은 옷을 입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가까이 가서 확인해 보았다.
분명 사람이었다.
"신선 구경 처음 하는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가 신선이다 는 것을 확신했다.
그의 소리는 정말 신선의 음성이었다.
상촌이 신선의 음성이라고 판단한 것은 그가 여태 들어왔던 사람들의 말소리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말소리는 입의 움직임과 소리의 울림이 같은 동선인데 비해 그의 말은 그것이 따로였다.
입 쪽의 움직임이 별로 없으면서 소리의 울림은 굵고도 맑았다.
그것은 마치 산메아리처럼, 계곡 어디에선가 울려나는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소리였다.
그래서 그 소리가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라 착각을 할 정도였다.
호랑이를 처음 봐도 바로 호랑이임을 알아보듯이 그의 말소리 하나만이라도 그가 신선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 신선이 계실까요…."
상촌은 자신도 모르게 댓구를 하고 말았다.
앗차, 신선 앞에서 실례를 한다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옛날에 있었던 신선이 요즘이라 해서 없을 리 없네. 적어도 신선이라면 천 년 세월은 쉽게 넘기는 법이거늘…."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신선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흰 수염과 흰 머리는 물론이고
얼굴에서 빛나는 광채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시다면 어째 여태까지 모습을 보이시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신선의 시대가 있는 것이네."
"신선의 시대라뇨?"
"요즈음 같은 태평성대."
"아니,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요즈음보다 살기 어려운 시대는 없다고 하는데 태평성대라뇨?"
"배가 불러 하는 소리들이지. 많이 먹어 병드는 인간들은 있어도 못 먹어 죽는 사람은 없다.
유사이래 이처럼 배부른 시대가 있었는가?
하다못해 자네 같은 백수도 삼시세끼 밥 걱정은 하지 않지.
이런 세상이 태평성대가 아니고 무엇이 태평성대인가?"
"배부른 돼지보다 가난한 철학자가 되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신선이 필요한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이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먹지 않거나 적게 먹는 신선이 필요한 시대라는 말일세."
"저는 별로 많이 먹지 않습니다."
"백수는 신선과 닮은 점이 많지."
상촌은 시중에 떠도는 신선과 백수의 공통점을 머리로 샘해 보았다.
소식 한다, 무이 사상에 근본을 둔다, 주위 환경과 흠뻑 동화된다, 시간 개념이 없다,
외부인과 접촉을 잘 하지 않는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고 돈과 거리가 멀다 등등.
자신이 백수이면서도 그 말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실례지만 연세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허허…. 실례는 실례지. 시집 못간 노처녀에게 나이 묻는 것과 신선에게 나이 묻는 것은 같은 것이네.
사실 나는 내 나이를 잘 모르네. 하지만 한 700여년 전에 저기 건너 배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지.
그때 겸효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지. 그래서 지금도 그곳을 겸효대라고 하더구먼 허허허.
그때 정추라는 자와 바둑도 두고 술도 하고 자주 어울렸는데, 제법 풍류를 아는 친구였지….
그 친구는 당시 권력자인 신돈을 탄핵하다가 죽을 뻔 했으나 이색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좌천되어
이곳 동래 현령으로 부임했다네. 그 당시 그 친구 외에도 제법 풍류를 아는 시인묵객들이 더러 있었네.
그때 정추를 비롯한 몇몇은 내게 신선이 되는 비법을 배워 제법 오래 살았다네.
다만 그 핵심의 이치를 깨닫지 못해 백 살을 넘기지는 못했지만…."
"저에게도 그 비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직 그대와는 그만큼의 유대가 없네. 그것이 쌓인 연휴에나…."
"그럼 매일 여기에 오면 뵈올 수 있습니까?"
"나를 만나려면 바둑판을 가지고 이곳에서 기다리게…."
그리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말 신선처럼 사라졌다.
다음 날 상촌은 귀하다는 피나무 바둑판을 구해서 어깨에 매고 그 자리에 가서 기다렸다.
계곡물이 흐르는 바위 위에 바둑판을 깔고 한쪽 발목은 시원한 계곡물에 담글 수 있도록 그야말로
신선도 그림이 나올 법한 좋은 자리를 만들어 기다렸다.
술을 좋아할 것 같아서 막걸리와 안주까지 준비했다.
잠시 뒤 정말 그 신선이 나타났다.
"바둑을 어떻게 두는가?"
치수를 묻는 것 같았다.
상촌은 넉 점을 깔았다.
"아무리 고수라도 넉 점 이상은 접은 적이 없습니다."
상촌에게 유일한 재주가 있다면 바둑이었다.
제법 이름이 있는 고수라도 넉 점을 깔고 둔 적은 없을 만큼 바둑을 잘 뒀다.
그렇게 해서 매일 한 차례씩 바둑을 뒀다.
결과는 상촌이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승부는 늘 미세했지만 상촌이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수의 깊이도 알 수 없었다.
신선은 몇 점을 더 접어라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역시 상촌이 딱 두 집을 졌다.
상촌은 복기를 하지 않고 돌을 쓸어담으면서 여태 벼루었던 말을 했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바둑이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네…."
"바둑이 아니라 신선이 되고 싶습니다."
"백수와 신선이 닮은 점이 많다는데 그대는 거의 신선이 아닌가?"
"제발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놀고 먹고 이런 곳에서 바둑이나 두고, 시간 나면 시도 쓰고…. 그게 신선이지 신선이 따로 있는가?"
"저는 이런 신선은 싫습니다. 무릉도원의 천도복숭을 먹는 것처럼 무얼 먹어야 합니까?
하다 못해 백 살까지만이라도 사는 양생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상촌은 애원했다.
"신선이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야."
"방중술이라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인간 육체의 모든것을 통제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도를 깨달아 신선이 되는 술법이지.
하지만 내려오면서 퇴색되어 육체적 쾌락을 위한 방중술이나 사람을 현혹시키는 방장술,
요괴나 기괴한 현상을 일으키는 방술 등으로 변질되어 권할 것이 못 되네."
"그럼 바른 술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 방법은 가르쳐 줄 수 있네만…. 방법을 안다해서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네. 정추와 그 친구들이 신선이 되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네. 문제는 수양이지…."
"명심하겠습니다."
"전호흡 같은 축기법을 통해서 몸 안에 소주천이나 대주천 그 이상으로 점점 넘어가면 환허행(還虛行)이라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이 같은 경지는 수련자와 우주가 일체화가 됐다는 것을 말하네.
한 마디로 영원불멸이야. 선도수행을 위해 필히 수련해야 하는 것은 축기법이다.
축기법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팔단금 같은 도인법이나 태극권 같은 기공, 가장 중요한 호흡법,
호흡법도 앉아서 하는 좌식, 서서 하는 입식, 누워서하는 와식, 숨쉬는 방법에 따라 문식, 무식, 역호흡법 등등 천차만별이네.
음식을 통한 벽곡법 등등도 있고. 이런 축기법을 통해서 단전에 기를 모으면, 단전이 뜨뜻해지면서
열감을 느끼는데…. 소주천 단계만 와도 당당히 인선(人仙)이라 불릴만 하며, 수련 단계에 따라서
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 위에서 말한 환허행이라는 단계에 오르면 더이상 인간이 아닌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단계에 까지 수련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야…."
그때 등산복 차림의 아가씨 너댓 명이 저만큼 건너편 길로 가고 있었다.
신선은 이야기하다 말고 그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등산 온 학생들인가 봅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시지요."
신선은 여전히 여학생들쪽만 묵묵히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수련을 하겠습니까?"
신선은 아가씨들이 나무들 사이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도 그 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 더
이상 신선이 되는 수련법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다.
도를 통한 신선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했다.
하기야 신선이 있으면 선녀가 꼭 있었다.
또한 선녀는 하나 같이 미인이었다.
신선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선녀가 그렇듯 미인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신선도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상촌에게는 양생법을 알아내는 것이 더 다급한 문제였다.
"수련이란 뭘 의미합니까?"
"신선 세계에도 경계가 있고 급이 있네. 그 급은 수련의 차이야.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었지만 시체를 남겼네. 신선이 되는 방법 중에서 시체를 남기고 영혼만 신선이 되는 것은 아랫단계로 보네.
흔히 중국 민간신앙에서 8선이라 하는 존재들은 다 실존하는 인물들이지. 그 중 조국구는 판관 포청천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을 맡았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도를 깨달아 신선이 되었네. 그리고 신선이 된 후에 가끔씩 민간에 나타나 사람들을 구해주고 신통력을 보이고 왕중양을 가르쳐서 전진파를 만들게 도와 준 신선이 여동빈이네. 부처를 불조(佛祖)라고 하고 , 여동빈을 여조(呂祖)라고 하기도 하네. 그대는 왜 신선이 되고자 하는가?"
"저는 어릴 때부터 줄곧 왕따를 당해 사람 사귀는 것이 두렵고 귀찮습니다. 사람들과 교류하면 의견충돌 같은 것도 두렵고…. 교류를 안하니깐 쓸때 없이 말하는게 없어서 편하고 좋습니다. 편하고 자유롭고 하고 싶은 것 맘대로 하고…."
"그래서 백수는 신선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신선이 되기는 어렵네. 세상과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어찌 신선이 될 수 있는가? 그대가 제 아무리 섭생법이니 양생법으로 수련을 한다 해도 먼저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없으므로 신선이 될 수 없네. 다만 수명을 몇 년 더 늘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신선은 사라져 버렸고, 상촌은 더 이상 신선을 보지 못했다.
그 뒤 상촌 역시 시 쓰기를 포기하고 세상과 화합을 이루는 마음 수련이 필요하다며
태백산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명호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정보산업진흥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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