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이바구

[부산 도심 여행] '낭만풍경'- 천마산 해돋이길~아미동 비석마을~태극도마을

금산금산 2015. 3. 4. 20:53

[최원준 시인의 낭만풍경]

천마산 해돋이길~아미동 비석마을~태극도마을

 

 

 

다닥다닥 정겨운 '기찻집 마을'…골목골목마다 세월의 향기

 

 

 

 

 

 

산복도로와 산동네 여행에 나선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최원준 시인, 정훈 문학평론가, 주부 이순애 씨. 김동하 기자

 

 

 

 

 

'부산 도심여행'!~

시리즈는 부산 시민 가까이에 있는 명소를 필진이 일행과 함께 여행하고 정감 어린 필치로 여정을 그려냅니다.

독자와 함께 부산 풍경의 속살을 새롭게 체험해보려 합니다.

 

 

 



- 피난민 눈물 고인 산복도로
- 부산의 애환·정서 서린 공간

- 1세대 사진가 최민식 갤러리
- 무덤 위 터전 세운 비석마을 돌집
- 감천마을에 자리잡은 예술마당
- 모두 속살 엿보는 소중한 유산들


 

 

 

부산 서구 천마산 산복도로 해돋이길에 있는 명물 '돌집'. 최원준 시인 제공

마을버스를 타고 산복도로를 오른다.

산복도로는 '부산의 지붕'을 구불구불 타고 넘어가는 길.

한 구비씩 오를 때마다 골목사람들의 싱싱한 일상이 다가오고,

개구멍 같은 마을 골목어귀를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사이좋게 정겨운 곳.


버스는 끄덕끄덕 아미동 좁은 찻길을 숨 가쁘게 오른다.

한참 만에 아미골공영주차장 앞.

주차장 왼편으로 난 길을 따르면, 천마산 산복도로 해돋이길로 이어진다.

천마산 둘레를 이어 남부민동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그곳에서 산복도로 동행을 만난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과 문학평론가 정훈 씨, 주부 이순애 씨.

모두 반가이 안부를 묻는다.

"유난히 부산은 산복도로가 많습니다.

총연장이 65㎞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산을 '산복도로의 도시'라고들 합니다."

 

"그래요. 광복과 한국전쟁을 계기로 생겨난 산복도로는,

피난민들의 궁핍했던 유랑의 삶들이 눈물처럼 고여 있는 곳이죠."

 

"산복도로는 부산의 애환과 정서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산복도로를 부산을 대표하는 '정체성의 공간'으로 인식하잖아요."

 

 



■ 부산 정체성의 공간

네 사람이 산복도로를 함께 걷는다.

이 길은 천마산 산길과 바로 이어지는, 남부민 산복도로 위에 있는 산복도로. 향긋한 풀 내음과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참으로 싱그러운 곳.

산복도로 아래로 부산 풍경이 시원하다.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바다와 부산항, 영도다리 밑으로는 배들이 드나들고, 봉래산에는 흰 구름이 길게 걸려있다.

'행복마을 카페'에서 내린 커피 한 잔 마시며 여유로운 발걸음을 한다.

문득 '아미문화학습관'이 보인다.

이곳에 대한민국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 선생을 기리는 '최민식갤러리'가 있다.

갤러리에는 최민식 선생의 유품과 사진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부산의 산복도로와 마을들, 자연풍경, 곤고한 삶의 부산사람들 모습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갤러리를 나와 조금 더 걷자, 마을 어르신들의 경로당인 '송이, 덕이 사랑방' 간판이 보인다.

 "송이는 할매, 덕이는 할배 사랑방인가베…."

혼잣말에 평상에 앉은 할머니 한 분, "맞심더. 여서 하루종일 밥 논갈라 묵고, 거섶 심어 쌈 싸묵고 안하능교." 송이 사랑방이 2층인데 오르는 계단이 조금 가파르다.

"모친예 계단 조심하이소~."


사랑방 맞은편으로 "집이 기차처럼 일(一)자로 길어 기찻집으로 불렸다"'기찻집 예술체험장'을 지나자,

비석마을의 명물 '돌집'이 자리하고 있다.

돌을 자잘하게 깨어 3층으로 올린 집이다.

일행이 돌집에 관심을 갖자 마침 마실 나온 집주인 김동철 씨가 집 소개를 한다.


"우리 어른이 해방 후 이곳에 와서 사부작사부작 짓기 시작했으이 제법 됐구마는.

옛날에는 이 근처가 다 돌산이라 망치로 바윗돌을 조금씩 깨서 집을 지었다 카데."

33평이 조금 넘는 이 돌집에 김동철 씨와 아들 가족이 살고 있다고.

"어른이 동네 꼬마들 시키서 세숫대야에 돌멩이 한 대야를 가져오면 동전 한 닢씩 주고 했다 카더라고.

4살 때부터 이곳에 살았으이 벌씨로 60년이 넘었네. 내 나이 예순일곱이니…."

 

 

 

■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아미동 산상교회 주변에서 감천고개에 이르는 아미로 왼쪽 마을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1907년 일본인거류지역에 산재해 있던 공동묘지를 이곳으로 모두 옮긴 것. 총 넓이가 2만4000평 정도였다 한다.

"광복 후 일본 귀환동포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민이 이곳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임시 거처를 만들고

생활합니다. 그 때는 거적대기나 비닐, 루핑 등으로 비바람이나 막을 요량이었죠."

그렇게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비석마을'을 형성했다.

"묘지 규모가 3~7평 정도 되니, 집도 그 평 수 정도였겠죠? 공동묘지 위에 생활터전을 세웠기에

'삶과 죽음', '사람과 영혼'이 공존하는 공간이 형성되었던 겁니다."


"이 일대의 골목과 집 주변 곳곳에 묘지 비석과 상석의 흔적이 남아있던데요. 집의 주춧돌이나 댓돌로

쓰기도 하고, 오르막길 계단이나, 석축, 담벼락 등에 하나둘 비석이 박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요."

빗돌에는 '가문의 문양''대정(大正)', '소화(昭和)' 등 일본의 연호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오랜 세월에 글자가 지워져 흐릿하지만, 아직도 죽은 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된 빗돌도 남아있다.

최근 산상교회 앞 도로를 넓히면서 묘지의 원형과 다량의 비석이 발굴되었다.

'이들의 보존과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4명은 입을 모은다.

"아직도 이 마을에는 향을 사르며, 원래 집주인인 귀신의 왕생을 비는 집들이 있어요.

그들 모두가 참으로 기구하게 얽힌 인연들이죠."

 


■ 골목과 골목이 소통하는 곳

비석마을에서 감천고개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빽빽하게 집이 모인 계단식 마을이 펼쳐진다.

1955년 태극도 사람들이 보수동에서 옮겨오면서 '도인촌'을 형성하는데, 이것이 '태극마을'이다.

지금의 '감천문화마을'이다.

"감천은 원래 감내(甘川), 물이 좋아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흔히들 '기차마을'이라고 불렀죠.

밤이 되면 루핑집 창문으로 불빛이 비치는데, 멀리서 보면 따닥따닥 붙어 길게 이어진 집들이

'달리는 밤기차' 같아서 붙여졌답니다."



마을로 들어선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골목과 골목'이 만나고, 까꼬막의 '계단과 계단'이 만난다.

"골목은 가로로 '집과 집'을 이어주고, 계단은 세로로 '골목과 골목'을 이어줍니다.

그들이 만나 소통의 길을 만들고, 문화의 아름다운 마당을 만들죠.

그렇게 이 골목에 예술공간이 조화롭게 자리하여 문화마을을 형성한 것입니다."

"예. 부산 근대화의 유산인 산복도로와 산동네처럼, 부산의 과거를 오늘에 와서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 부산의 미래도 풍성하게 바뀌게 될 겁니다."

산복도로와 산동네를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어둠은 서서히 골목으로 내려앉고, 가로등 불빛이 하나씩 마을을 밝힌다.

좁은 찻길 옆으로 술추렴하는 구멍가게 몇 개, 골목사람이 하나둘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상호도 없이 '정자언니집' '돼지껍질집'으로 불리는 구멍가게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켠다.

마땅한 안주도 없어 달걀프라이 몇 개에 주인장이 먹다 건네준 포도 몇 알, 골목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 한 바가지를 안주 삼아, 산동네의 밤은 깊어만 간다.

그렇게 속절없이 순박한 사람들과의 통음은 계속되는 것이다.

 

 



문화공간 수이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