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성~ 영가대 옛터~두모포왜관 터
"자성대 있는 이 작은 동산 , '부산'이란 지명 여기서 따온거죠"
부산 범일동 자성대공원.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은 좌천동의 증산(위쪽 점선)이 아니라 이 봉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아래쪽 점선이 2003년 복원한 영가대. 원래 영가대가 있던 터(●으로 표시)에서 옮겨왔다.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 |
- 좌천동 뒷산 '증산'서
- 유래됐다는 설 많지만
- 사료 등 따져볼 때
- 지금 자성대공원이
- 조선 때 '釜山' 유력
- 범천 하구가 옛 부산포
- 임란 전 부산진성
- 봉생병원 쪽에 위치
- 임란 끝난 뒤 자성대로 옮겨 가
늦가을의 낙엽 냄새가 진하게 밴 11월 하순, 필자는
동아대 이민아(산업디자인학과 4) 박지원(철학과 2) 이도은(신문방송학과 2) 학생과
부산진성, 영가대 옛터, 두모포왜관 옛터를 찾았다.
부산 동구에 속하는 이 일대는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왔을 때 처음 전투를 치른 지역이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일 외교 및 무역을 관장하던 두모포왜관이 있던 곳이다.
자성대공원으로 불리는 산 정상부에 섰다.
박지원 학생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釜山'(부산)이라는 주장이 있는 걸로 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요. 최근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인 '문물연구' 25집(2014년)에 '부산포와 부산진성의 공간적 위치분석'(심봉근 전 동아대 총장)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여기 보면 이곳이 행정지명에 나오는 釜山이며, 이 산을 둘러싼 성이 부산진성이라는 것이지요."
■ 과연 '증산'이 부산 지명 유래일까
자성대 주변 부산진성을 묘사한 '사로승구도'. |
"어떤 근거가 있는 건가요?". 지원 학생이 묻는다.
"그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釜山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 성종
즉위년 1469년에 보이는 것이 처음이며, 고려시대부터 富山(부산)으로 썼다는군요. '동국여지승람' 등은 釜山浦(부산포)라는 지명은
가마(솥)과 같은 모양의 산 아래 있어 붙인 명칭이라 합니다.
그러면 釜山이라는 곳이 어디냐는 것이죠?
동구 좌천동 뒷산인 甑山(증산)이라는 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나,
이 명칭은 임진란 때 왜군이 이 일대에 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을 축조했다는 기록에 처음 나옵니다.
즉, 증산은 '증성이 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증산성 축조 뒤에 생긴 명칭임에 분명해 보이며,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우리나라 남해안에 왜인이 축조한 성(왜성)을 증산성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좌천동의 증산은 釜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임진란 이전에 제작된 책 '해동제국기'에 실린 '동래부산포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1474년 예조좌랑 남제가 삼포(제포·부산포·염포) 지도 3매를 이 책에 첨부해 올린 것인데,
'동래부산포지도'에는 부산포를 중심으로 주변 관청과 강, 산, 섬이 잘 나와 있다.
내부에는 동래현을 비롯해 동평현, 영청, 부산포왜관, 절영도 등을 표시했다.
"영청은 동구 좌천동 봉생병원 주변에 있었지요. 주목할 것은 그림 중앙에 있는 현재의 자성대공원과 범천
하구를 중심으로 지도를 그렸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문헌자료에서 말했듯이 '釜山 아래가 부산포'라 한다면 당시 부산포에는 지금의 자성대공원 말고는 주위에 산이 없었으므로 자성대공원이 곧 부산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지요."
임진란 이후 1663년 제작된 부산의 '목장성지도'도 있다.
이 지도를 보면 현재의 자성대공원에 '釜山'이라고 글자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위에 설명한 '동래부산포지도'에 나타난 부산을 다시 뒷받침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釜山은 자성대공원이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고, 부산포는 그 바로 아래
범천 하구 일대에 있던 항구였다고 할 수 있다.
■ 부산진성은 어디 있었나
영가대를 찾은 이민아 이도은 박지원 씨, 조해훈 시인(왼쪽부터). 백한기 선임기자 baekhk@ |
그러자 동행한 이민아 학생이
"그러면 부산진성은 정확히 어디인가요?"라고 이어 묻는다.
"앞서 소개한 논문은 부산진성의 위치도 설명합니다.
'부산포지도'에서 영청을 지금의 봉생병원 주변으로 그린 걸로 볼 때
임진란 전에는 이곳에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정공단 위쪽 증산 정상부까지 부산진성이 자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초기의 부산진성은 현재의 정공단을 경계로 그 아래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해안선을 바다에서 볼 때 자성대공원에 가려 시야에서 차단되는
계곡부나 저지대였을 것으로 추측되지요."
성곽학자이기도 한 동아대 이동주(고고미술사학과) 교수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조선 전기의 연해읍성이나 수군진성이 전방의 바다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즉 바다에서 조망이 은폐되는
계곡부를 택한다는 입지조건이 고려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이듬해 2월 왜군은 좌천동 뒷산과 범일동 자성대공원 아래 해안선을 잇는 위치에
이른바 범천증산성을 축조한다.
왜군이 물러가자 조선은 1606년 범천증산성 가운데 범천 하구 부산포왜관 주변의 증산성을 일부 고쳐
부산진성으로 활용한다.
이성린이 그린 '사로승구도'(1748년), 진재 김윤겸(1711~1775)이 그린 '영가대' 등 임진란 이후
지도나 지리서에서 하나 같이 자성대 주변을 부산진성으로 표시한 것은 같은 의미다.
부산진성의 평면 형태가 일반적인 타원형이나 원형 또는 방형이 아니고 다각형인 것은
이 성이 앞서 세워진 증산성의 성벽을 일부 이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성대공원 주변 성곽은 부산진성의 지성이 아니고 임란 이후 부산진성이 있던 곳이다.
■ 400년 전 이름이 버스정류장에
"요점을 정리해봅시다. 첫째, 釜山이라는 우리 지역 지명의 기원은 좌천동 뒷산인 증산이 아니고
임란 이후 조선말까지 부산진성이 있던 범일동 자성대공원이라는 겁니다.
둘째, 부산진성은 임진란 이전에는 현재의 봉생병원 동북쪽 해안 저지대에, 임진란 이후에는
현재의 자성대공원 주변에 각각 있었습니다."
이동주 교수에게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묻자 그는 "부산의 정체성을 밝히고 부산 지역사를 바로잡는
것이어서 아주 중요하다. 조선시대의 원도심은 당시 부산포가 있던 범천(동천) 하구의 현재 범일동 자성대공원 주위였으므로 부산의 원도심 재생 차원에서 현재의 자성대라는 명칭을 본래대로 부산(釜山)으로
복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부산진성 복원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산진성에서 나와 성남초등학교 뒤쪽 철로 변에 있는 영가대 옛터에 들렀다가 두모포왜관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도은 학생이 "두모포왜관은 어떤 곳이었나요?"하고 묻는다.
"학자 김동철 양흥숙 장순순 등의 논문을 보면 조선 전기 삼포에 왜관이 설치됐지만, 1547년 부산포
왜관으로 단일화됐다가 임진란으로 국교가 끊기면서 왜관이 모두 폐쇄됩니다.
임란 이후 국교 재개 교섭 과정에서 영도에 절영도왜관이 1601년 생기고, 1607년 지금의 동구 수정동
인근에 두모포왜관을 설치해 옮깁니다.
두모포왜관은 1678년 지금의 용두산공원을 중심으로 초량왜관이 완공되면서 옮깁니다.
왜관은 조일외교와 교역의 통제공간이었습니다.
초량왜관은 1876년 근대 개항까지 존재하였지요.
임란 후 부산에 왜관을 설치한 것은 지도상 부산 위로는 왜인을 올려 보내지 않겠다는 정책인데,
임진란을 겪고서야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지요."
터벅터벅 두모포왜관 옛터를 걷는데, 버스정류장 표지가 '고관입구'라고 적혀 있다.
초량왜관이 신관이었으니, 두모포왜관은 고관 또는 구관이라 했다.
그런데 거의 400년 전 명칭이 지금도 남아있다니. 부산이라는 공간은 시간을 넘어선 수백, 수천 년 역사가
끌어안고 뒤섞이며 늘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곳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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