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사흘 동안 - 관노 철수와 매동 이야기
왜구 침입 소식에 성안의 평화는 삽시간에 공포로 변했다
일러스트=서상균 기자 |
- 지옥같은 긴긴 어둠이 걷히고 날이 희붐하게 밝아올 무렵
- 적병이 끊임없이 몰려와 성을 서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 "내 죽으면 가족을 부탁하네" "내 시신이라도 수습해주오"
- 전운이 덮치자 너나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시울 붉히고…
-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점점 거세게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매동은 엎드린 채로 슬며시 중앙의 단에 놓인 전패(殿牌)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그는 마치 임금의 용안이라도 훔쳐본 듯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걸레질을 계속했다.
관례대로라면 낼모레가 보름이니 부사는 응당 이곳을 찾아 향월궐배(向月闕拜)를 행할 터였다.
그러니 이곳 객사 소제야말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가.
어전이나 다름없는 상서로운 공간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를 알기에 부사 또한 이곳 소제만큼은 애첩 금섬에게 직접 맡기지 않았던가.
한데 무슨 생각으로 그에게 이곳 소제를 부탁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여 이곳의 일이 떠올라서 그랬을까.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 순절도'. 순절한 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군민들의 처절한 항전 내용을 고스란히 담았다. 한 화폭에 교전 장면을 효율적으로 담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의 조감법을 사용했다. |
신임 부사는 달포가 지나도록 부임하지 않았다.
성의 주문인 남문 앞에서 목을 빼던 향리들도 하나둘 작청으로 돌아갔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허연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웬 사내 하나가 서문으로 들어섰다.
서문을 지키던 포졸이 무슨 용무냐고 물었지만
사내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사내의 동정을 살피던 매동은 비질을 멈추고 사내의 동정을 살폈다.
그런데 사내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객사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놀란 그가 달려가 사내 앞을 막고 나섰다.
나으리, 외람스럽지만 향청(鄕廳)은 이쪽이 아니라 아래쪽이옵니다.
알고 있다!
사내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재우쳤다.
걸음새는 묵직했고 풍채는 크지 않았지만 당당했다.
매동은 재차 사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나으리! 이곳은 임금님의 전패를 모신 곳입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옵니다.
어허, 이놈이 감히?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매동이라 하옵니다만.
매동이? 아주 영특한 놈이로고, 내 너의 이름을 잊지 않으마.
부사는 정말 매동이란 이름을 잊지 않았다.
며칠 뒤 그를 불러 일개 방노(房奴)로 하여금 시노(侍奴) 노릇을 익히는 특전까지 베풀었다.
그러니 이곳 객사의 일을 어찌 그도 잊을 수가 있을까.
그새 해가 이우는지 실내가 어두웠다.
그렇다면 이제 조만간 훤한 달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성 안의 사람들도 미뤘던 마실을 나서곤 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 또한 철수 형의 집을 찾은 지 오래였다.
오늘밤 철수 형이나 찾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음이 바빴다.
집으로 향하는데 내아의 담 너머에서 매동아, 하는 조심스러운 소리가 났다.
마님의 몸종 만개 목소리였다.
그는 못 들은 척 부러 걸음발을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너한테 할 얘기가 있다니까! 할 얘기란 뻔했다.
부엌일을 하다가 벌어진 시시콜콜한 일이거나 아니면 애첩 금섬에 대한 험담이겠지.
그건 알면서도 걸음을 멈춰 늦춰 잡은 것은 성가시게 집까지 좇아올까봐서였다.
또다시 신여로 노인의 눈에 발각되었다가는 어떤 혼뜨검이 당할지 모른다.
여로 노인이 어떤 분인가.
관노 중의 우두머리이기 이전에 어린 그와 철수 형을 자식처럼 보살펴준 분이 아니던가.
여로 노인은 늘 그에게 당부했다.
너는 우리와 씨가 다르다, 네 아비가 미쳐 날뛴 것도 억울해서 그런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마라.
면천(免賤)! 이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던가. 아버지에겐 면천이 곧 명예 회복이었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상봉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면천의 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러니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그렇게 갈망하던 아버지의 소원을 여로 노인은 얻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얻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 늙은이가 성 밖에 나간들 무얼 하겠소?
그냥 하던 일이나 마저 하다가 죽도록 하여 주면 고맙겠소.
향리들도 그런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지금껏 관청지기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만개가 물 항아리를 든 채 허겁지겁 달려왔다.
꼴에 또 물 긷는 핑계라도 둘러댄 모양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재빨리 치마 속을 뒤졌다.
시장하지? 이거 나중에 너 혼자 먹어. 이거 훔친 거 아냐?
훔치긴, 너 주려고 안 먹고 아낀 건데.
너 자꾸 안채 주전부리에 손대다간 큰일 난다?
그런 건 걱정 마. 만개가 눈꼬리까지 휘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 있는 것을.
마당으로 들어서자 갓난애 우는 소리가 났다.
매동은 부러 헛기침을 했다.
작은방 뙤창문(방문에 낸 작은 창문)이 열리더니 철수 형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우가 기별도 없이 웬일인가?
그냥 잠도 안 오고 심심해서 왔죠,
뭐. 매동이 방으로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에 놓인 화선지가 눈에 띄었다.
또 그림 타령이우?
이게 제일 재밌는 걸 어쩌겠나.
근데 이건 통 못 보던 그림인데?
응, 그냥 간밤에 희한한 꿈을 꿨거든.
무슨 꿈인데 사모관대를 한 양반까지 납셨다우?
낸들 그걸 알아? 혹시 형이 면천해 장영실같이 되는 꿈 예시한 거 아니우?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구. 형이 못하면 안방에 누운 저놈이 할지 그건 모르지.
그러자 철수 형이 빙긋이 웃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먼 뒷날의 일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그나저나 형, 내일도 성 밖 둔전에 일하러 가우?
그게 곶감 들고 찾아온 연윤가?
부탁이우, 나도 같이 데려가주우.
부사 나리가 찾으시면 어쩌려고?
그거야 여로 노인한테 일러두면 되우.
그럼 나더러 호방한테 허락을 받아 달라?
매동이 고개를 세차게 주억였다.
일단 알겠네만 김상의 딸년 때문이라면 이쯤해서 마음을 접게.
나도 그러고 싶소, 근데 그게 안 되는 걸 어쩌우.
창수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미가 샘에서 낳았다고 새미란 이름을 가진 그녀.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반나절이 넘도록 보이지 않다니.
혹시 멀리 다니러 간 건 아닐까.
그녀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호미질만 하려니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령(令)' 자가 적힌 깃발을 든 포졸들이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뿐인가. 향청의 이속들까지 업무를 작파하고 성 밖으로 나도는 중이었다.
성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뒤늦게 낌새를 알아차린 철수도 허리를 펴고 불안한 눈을 하고 있었다.
부사의 말대로 왜구가 노략질하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니우?
암만 그래두 그놈들이 겁도 없이 여기까지 오려구.
근데 조짐이 이상했다.
남정네들이 괭이며 낫을 들고 성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구먼, 임자, 어서 들어가자구.
철수 형의 말에 갓난아기를 엎은 일손을 놓고 성으로 향했다.
서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포졸 하나가 긴장한 눈을 한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왜구가 쳐들어왔다네, 그 소식을 전하러 부산진성의 통인(通引)까지 급히 달려왔다네.
성 안은 생각보다 긴박하고 돌아가고 있었다.
말을 관장하는 구노는 편자를 끼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창노는 창노대로 무기들을 꺼내고 손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창망 중에도 인근으로 부사의 수결이 담긴 파발이 달려 나가고 몰려온 읍민들로 동헌 뜰과 그 앞은
그야말로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이럴수록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어서들 동청 밖으로 나가시오!
노회한 청지기답게 여로노인이 사람들을 동헌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부사로부터 령이 내려진 내막을 듣고 싶소,
우린 못 나가오! 그건 곧 알게 될 것이오, 그러니 동헌 앞에서 잠깐만 기다리시오.
매동과 철수도 여로 노인을 도와 사람들을 동헌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겨우 사람들을 몰아내고 동헌 문이 닫히자 여로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때 없이 화창한 날씨. 이런 훤한 대낮에 전쟁이라니, 나 원 참. 여로 노인의 말에 매동은 하늘 우러러 보았다.
여로 노인의 말처럼 전쟁이 났다면 하늘에 무슨 징조라도 보여야 했다.
한데 어제와 똑같은 해는 떠 있고 날씨는 화창했다.
그러니 이 변고를 그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
매동아, 하고 여로노인이 그를 불렀다.
예, 청지기 어른. 지금부터 너는 한시도 부사 나으리 곁을 떠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철수 자네는 객사를 방비하게,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자네도 알고 있지?
알다마다요.
통인의 말대로라면 진성을 함락시킨 왜구들이 이곳으로 몰려와야 했다.
하지만 밤이 늦도록 적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객사를 지키던 철수 형이 무료했던지 그가 있는 동헌으로 왔다.
야, 근데 놈들이 언제 온대냐?
형은 꼭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 같으우?
나라고 그걸 바라겠냐.
다만 생각 같아선 나라가 한번 뒤집어졌으면 해서 하는 말이지.
하긴 철수 형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우리 같은 천한 것들에게는 경천동지(驚天動地)만을 기다리며 사니까.
경천동지만 일어난다면 저 성벽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두지 못할 것이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
형은 막연히 면천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는지 모른다.
적어도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다면 자신의 피만큼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게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형도 이제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인근 고을의 수령들과 군사들이 속속 성안으로 모여들자 내아의 만개며 금춘이도 바빠졌다.
성의 수비를 놓고 동헌에 모인 수령들은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누군가는 문을 박차고 성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날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여태 보이지 않던 적병들이 남문 앞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적병은 끊임없이 몰려왔다.
몰려온 그들은 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활과 무기로 무장한 군인들과 남정네들이 적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엄청난 적군의 수에 두려움에 떨긴 매한가지였다.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 눈앞의 광경이야말로 꿈처럼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전운이 드리우자 부사의 표정 또한 어두웠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인근 초가집이 불타는 검은 연기가 성벽을 타넘자 아낙들은 일제히 울음보를 터뜨렸다.
삽시간에 성 안이 울음바다로 변했다.
총포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적병 둘이 일제히 성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성벽으로 다가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지만 그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사는 저 많은 적병이 한양으로 진군한다면 큰일이라면서 성을 고수하라고 독려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급창(及唱), 아니 매동아! 예, 하면서 그는 놀란 눈으로 조복으로 갈아입은 부사를 쳐다보았다.
넌 꼭 살아서 내 시신을 수습하거라.
나으리, 무슨 그런 말씀을?
혹여 내 목이 달아나거든 내 옆구리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부사는 몸을 돌려 객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매동은 객사 앞에 창을 쥔 철수 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
철수 형이 쥔 창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아우, 내가 어찌 되거든 우리 임자랑 아이 자네가 맡아야 하네.
나도 형한테 부탁이우, 나 죽으면 새미한테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죽었다고 말해주슈.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바라보면서 눈시울만 붉혔다.
객사 뒤편 정원루 앞에는 향교의 양반 셋이 서 있었다.
누각 위에 모신 것은 필시 향교에서 모셔온 공자의 위패일 터였다.
잠시 뒤 객실 안에서 부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하, 불충한 소신 마지막 인사 올리옵니다.
총민(聰敏)를 발휘하시어 부디 난세를 바로잡으소서!
이상섭 소설가
※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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