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 안동네 '돌산마을'
고단한 삶에 누울자리 내준 무덤들…'산만디'(돌산마을의 옛 이름)는 生死가 한울타리
동네 골목에도 봉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문현 안동네 돌산마을. 이 마을을 유명하게 해준 벽화를 봉분이 감상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다. 사진 최원준 |
- 공동묘지였던 이 곳
- 50년 전부터 하나둘씩
- 둥지 튼 움막 ·판잣집
- 지금은 320세대로
- 나지막한 슬레이트집
- 대문 앞, 골목길 위에
- 번듯하게 누운 묘들
- 비집고 들어온 게
- 주민은 미안했던걸까
- 연고도 없는 묘들
- 벌초 하고 꽃도 가꿔
- 벽화로 새 단장 뒤
- 동화같은 마을 변신
"원래 이 마을 주인은 무덤이라. 옛날에는 여게가 공동묘지였으니까네.
묘지 옆에 사람이 하나둘 움막 짓고, 판잣집 올리고 살다가 만들어진 데가 이 돌산마을인기라."
부산 남구 문현1동 돌산마을.
전포동과 문현동을 잇는 전포고개 꼭대기, 일명 '문현안동네' 제일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돌산마을 초입의 구멍가게.
토박이 노인 몇이 마을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한 잔 술에 거나해질 무렵이었다.
"지금이사 제법 큰 마을이 됐지만, 30년 전쯤에는 몇 집 없었다꼬. 온통 무덤인데, 그 사이사이로 움막집이
슬그머니 들어와 살았다 아이가." "마을 이름도 없었어. 그냥 '산만디' '산 우(산 위)'라고 했거든.
모두 살던 데서 쫓겨나거나 갈 곳이 없어 이 무덤가에 들어앉았지."
기구한 마을 사연처럼 마을 이름도 기구하다.
산꼭대기에 있다 하여 '산만디', 공동묘지에 마을을 이뤄 '무덤마을',
최근에는 도시재생으로 마을 담벼락을 벽화로 꾸며 '벽화마을'….
총 250채 320여 세대 950여 명이 사는 돌산마을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지금도 80여 기 무덤이 마을 군데군데 불쑥불쑥 자리하고 있다.
아니, 마을의 집들이 무덤 사이를 비집고 군데군데 불쑥불쑥 자리 잡는 바람에 무덤이
오히려 그들의 터를 사람들에게 조금 내어준 셈이다.
이러구러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 돌산마을이다.
■ 조상의 묘처럼 소중하게
가옥의 출입문 바로 앞에도 무덤이 있다. |
그렇게 돌산마을은 시작됐다.
무덤은 무덤대로 집은 집대로,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한울타리에서 서로 품어주고 다독이며
신산했던 시절을 견디며 지내왔던 것이다.
골목을 따라 마을을 돌아본다.
고만고만한 슬레이트집이 푸른 물통을 이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좁은 골목은 가로 길과 세로 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어디로 가도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우리네 골목길의 전형을 보여준다.
집 울타리는 모두 허리춤이나 어깨 쯤에 걸쳐 있다.
집 안에서 무얼 하는지 훤히 보인다.
낮은 지붕과 낮은 담, 작은 대문과 작은 창문….
그래서 정겹고, 그래서 편안한 집과 골목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돌산1길로 내려가니 마을 곳곳에 무덤이 보인다.
골목이나 집 모퉁이 담벼락, 집과 집 사이 어디든 번듯하게 누워들 있다.
어떤 무덤은 대문 앞,
심지어는 좁은 골목 반을 차지하고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발자국 소리 들으며 안부를 묻는 무덤도 있다.
그중 몇몇은 집 울타리 안에 있다.
집과 사람과 무덤이 옹기종기 함께 살고 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집과 무덤은 아무 연고가 없다 한다.
그리고 그런 집이 제법 있다고도 말한다.
무덤 주위로 움막을 짓고 살다가 집을 늘리면서, 무덤을 안고 울타리를 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됐단다.
이곳 돌산마을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공존하는 공간, 우리의 삶과 죽음이 궁극에는
결국 '한자리'임을 깨치는 시간이다.
그 시공간 뒤로는 최근 준공한 부산국제금융센터(BIFC)가 끝없는 높이로 버티고 서 있어,
삶의 극명한 대비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무덤을 조상 묘처럼 소중하게 품고 산다.
명절 성묘하러 온 무덤의 후손에게 차 한 잔 내어주며 반기고,
후손은 무덤을 보살펴준 집주인에게 선물세트 하나 안기는 인정이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을사람들은 때가 되면 무덤에 벌초도 해주고 화단도 꾸미며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
■ 국화꽃 동백꽃 울긋불긋
돌산마을 벽화가 파란 지붕들과 어우러진다. |
그러고 보니 마을 곳곳에 한창 국화와 동백꽃이 흐드러졌다.
화단에도 울타리에도, 무덤가에도, 빨갛고 노랗고 흰 꽃이
다사로운 햇볕 속에 울긋불긋하다.
골목마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뒹군다.
돌산3길.
벽에 기차 벽화가 그려진 집에서 정남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다.
이 마을의 산증인인 할머니는 돌산마을 생활만 반세기를 넘기고 있었다.
"내 나이 올해 팔십인데, 서른에 이곳으로 왔구마는. 벌써 50년이 지났네.
남편과 두 아들 데리고 이곳에 터를 잡았는데,
그때 이 삐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어.
우리가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왔을끼라."
밀양 무안사람으로 남편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남편이 손바닥만 한 터에 나무피죽을 주워와 판잣집을 만들었는데, 집이라고 지을 줄이나 알았나?
하늘이 보이고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아이가. 나무쪼가리 이어붙인 집이 꼬깔처럼 생겼다고
'꼬깔집'이라 캤지. 고~생, 고생, 여게 들어와서 한 고생은 말로는 다 몬한다."
"그래도 정정하시네요. 한 10년은 젊어 보입니다."
"인자 죽을 날짜 봐 논 늙은이한테 무신 소리고."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만면에 웃음이다.
집 마당에는 커다란 동백나무 붉은 꽃이 할머니 웃음처럼 흐드러지고, 가마솥 두어 개 걸어놓은 단아한 집에
할머니는 혼자 이 마을과 함께 곱게 늙어가고 있었다.
근처 '팔구경로당'에서 할머니들을 만나 잠시 이야기 나눈다.
돌산마을이 지금처럼 커진 것은 1980년대 중반.
많은 분이 이즈음 이 마을을 고향 삼았다 한다.
86년 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전후한 즈음이다.
"그때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먼 집 몇 채가 들어서 있었다 아이가.
하루에도 서너 채씩 안 보이던 집들이 보이는기라. 88올림픽 때쯤에 제일 많이 들어왔을 꺼로?"
이들은 국제적인 행사로 온 나라가 들떠있을 때, 이곳 공동묘지 땅에 힘겨운 몸을 내려놓았다.
■ "아이고 말도 마라, 고생 그 고생"
나무와 나무 사이에 움막 형태 집들이나 판잣집이 대부분인데, 짓기도 수월했지만 눈에 잘 띄지가 않아
하루 만에 뚝딱뚝딱 이 마을 주민이 되곤 했다고.
"불법건축물이라고 불이익을 받진 않으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라~! 사흘들이로 구청이다, 동사무소다 해서 공무원들이 집을 뿌수러 왔다 아이가.
집 뿌수고 나면 자슥새끼들 붙잡고 울기도 많이 울었구마는."
"공무원들이 여름에는 집 뿌수러 안 와. 꼭 겨울에 와서 뿌수구마는.
엄동설한에 집 뿌수고 나면 어디 갈 데가 있나? 그때 생각하면 징그럽고 참 기가 차지."
어떤 할머니는 그즈음 30여 번이나 집이 철거당하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무덤마을이 오늘의 벽화마을로 대변신한 것은 2008년.
'문현 안동네 벽화거리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마을 전체를 알록달록 원색의 벽화로 꽃단장했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성냥팔이 소녀….
낯익은 동화 속 주인공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마을 사람의 마음을 녹였다.
원빈, 김혜자 주연의 '마더' 촬영지로도 알려진 돌산마을이 벽화마을로 변신하자,
관광객이 몰려드는 유명 벽화마을이 됐다.
벽화골목을 지나 다시 구멍가게로 들어선다.
아직 술추렴 중인 동네 어른들이 권하는 막걸리 한 잔 받아든다.
따뜻한 난로의 훈훈한 열기가 사람 기분을 푸근하게 한다.
삼겹살을 굽고, 꽁치김치찌개가 끓어 넘친다.
곧이어 걸쭉한 노래 한 자락 나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그렇게 구멍가게의 모든 것이
원만구족해지는 시간.
창 너머 겨울 저녁을 데우는 노을이 붉게 물이 든다.
돌산마을에 따뜻하고 편안한 밤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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