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수영 '하마비'

금산금산 2016. 1. 13. 14:10

수영 '하마비'

 

 

 

 

 

조선시대 해군사령부 위엄에 걸맞은 '듬직한 크기'로 압도

 

 

 

 

 

 

 

 

 

▲ 수영성 남문과 하마비. 수영성은 조선시대 수군 주둔지였다. 남문 양쪽 석상은 이빨이 사납다. 언제라도 왜구를 물어뜯을 기세다. 남문 오른쪽 비석이 하마비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하마는 말에서 내리란 뜻.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걸 범마(犯馬)라 했다.

범마는 괘씸죄였다.

엄히 다스렸다.

매질하고 가뒀다.  


하마비는 궁궐문묘, 종묘, 향교, 서원, 거찰, 군부대, 충신의 재실, 고관의 묘 등지에 세웠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석은 아니다.

척화비처럼 포고문에 가깝다.

지키지 않으면 제재를 가했다. 

 

 


수영성 남문 오른편에 자리
국방 든든히 다진 영조 대
1731년 2월 이후 세워진 듯
국내 최대 하마비와 어금버금

 

 



부산 하마비는 네 군데 있다.

동래향교범어사, 양정 정묘, 그리고 수영사적공원 남문이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곳이라서, 범어사는 사찰의 격을 돋보이게 하려고,

정묘는 동래정씨 시조 묘소에 경의를 표하라고 세웠다.

수영사적공원은 수영성 사적지.

수영은 조선시대 해군사령부였다.

수영 하마비는 군부대 위엄을 상징했다. 

수영(水營)은 군사용어. 경상좌도 수군통제영을 줄여 좌수영 또는 수영이라 했다.

최고 책임자는 좌수사 또는 수사로 불렸다.

통영은 경상우도 수군통제영 줄임말이다.

수영과 통영은 일란성 쌍둥이쯤 된다.

군부대 주둔지답게 좌수영성은 동서남북 사대문 반듯한 석성이었다.


좌수영성은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다.

성문이 있고 성벽이 있다.

 25의용단이 있고 수군 깃발이 있고 좌수사 송덕비가 서른 몇 기나 있다.

수영야류며 좌수영 어방놀이며 수영의 전통예술을 보전하고 보급하는 수영민속예술관,

수영 역사가 일목요연한 수영사적원이 있다.

수영사적공원은 이 모두를 아우른다.


하마비는 수영성 남문에 있다.

남문은 무지개를 빼닮은 홍예문.

둥글다. 홍예문 양쪽 개 석상은 이빨이 사납다.

호시탐탐 엿보는 왜구를 언제라도 물어뜯을 기세다.

남문에서 스마트폰 나침반 앱을 켜면 동쪽을 바라본다.

제 자리가 아니란 얘기다.

수난을 겪었단 얘기기도 하다.

사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남문은 일제강점기 천덕꾸러기였다.

제 자리 뺏기고 수영팔도시장 인근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쓰였다.

수영초등이 1962년 광안동으로 이사 가면서 동문이 있던 지금 자리로 옮겼다.


'수령이하개하마비.'

수영사적공원 하마비에 새겨진 문구다.

수령 이하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엄명이다.

수령은 부정적인 용어로 알고들 있지만 옛날 옛적엔 목민관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을 수령이라 했다.

동래부사도 수령, 기장현감도 수령, 좌수영 수사도 수령이었다.

수령칠사(守令七事)는 목민관 책무였다.


수영 하마비는 듬직하다.

군부대 위엄의 상징답게 부산 다른 하마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듬직하다.

국 어디 내놓아도 앞자리에 든다.

엔간한 하마비 두세 배는 크다.

우리나라 하마비 가운데 가장 높다고 알려진 경북 영양 운곡서원 166㎝ 하마비와 어금버금한다.

부산을 대표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하마비로 치켜세울 만하다.


참고로 하마비는 전국 방방골골 퍼져 있다.

부울경 50기, 대구경북 58기가 있다.

이희득 저 '하마비를 찾아서1·2'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수영 하마비는 언제 세웠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좌수영성 건립 이후로 추정한다.

좌수영성 건립은 언제일까.

남문 왼쪽 벽면 각자가 단서다.

'신해2월 축(辛亥二月築)'이라고 새겨져 있다.

수영에는 1592년 임진왜란 이전 수군이 잠시 주둔했다가 1652년 현재 자리로 다시 이전했다.

고종32년(1895) 군제가 바뀌면서 기능을 상실했다.

수영성 하마비는 군부대 위엄의 상징답게 듬직하다. 한국 대표 하마비로 치켜세울 만하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신해2월은 언제일까.

1652년부터 1895년 사이 신해년은 1671년, 1731년, 1791년, 1851년이다.

1700년대 중반 고지도부터 사대문을 갖춘 좌수영성이 등장하는 걸로 봐서

1731년 2월로 짐작된다.

1740년 발간 동래부지 성곽 편에 좌수영성이 나온다.

'성의 둘레 9,198척 높이 16척으로 성내 우물 3곳이 있다.

' 임란으로 무너진 동래읍성을 다시 쌓은 해도 1731년이다.

당시 임금은 영조(재위 1724∼1776).

해군력 양성과 신무기 개발로 국방을 튼튼히 다졌던 군주가 영조다.


실화 한 토막!

상감 심부름을 가던 내시가 마음이 급해 범마했다.

내시를 가뒀다.

내시는 상감 명을 받들어 급히 가는 바람에 그리 됐다고 해명했으나

상감을 빙자한 변명이라 여겨 더 괘씸하게 다뤘다.

자초지종이 밝혀져 내시는 방면됐지만 가둔 자를 별달리 문책하진 않았다.

상감 권위보다 중시한 게 사회 질서였다.

우리 시대는 사회 전반에서 권위가 앞서는가 질서가 앞서는가.

하마비를 다시금 봐야 하는 이유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