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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비석] 다대포 '한광국 불망비'

금산금산 2016. 1. 20. 15:17

 다대포 '한광국 불망비'

 

 

 

 

 

차례도 제때 못 지낸 천민 설움 씻어준 조선시대 민권운동가

 

 

 

 

 

 

 

 

 

 

▲ 한국 민권운동의 상징 한광국불망비. 천민 신분 어민을 평민으로 격상시킨 다대진 아전 한광국을 기리는 비석이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포민(浦民)천민이었다.

상것이었다.

갯가 산다고 물질하며 산다고 사람대접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

짚으로 만든 허리띠와 머리띠를 했다.

정월 초하루 제사도 제 날짜 지내지 못했다.

양반상놈을 나누고 사농공상을 나누던 조선시대,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어디에도 반골은 있는 법.

신분 차별이 부당하다며 요로를 찾아다니고 또 찾아다닌 사람이 있었다.

그러기를 수삼 년.

마침내 어민을 천민에서 면제해 준다는 면천 윤허가 조정에서 내려졌다.

전국 포민들이 환호했다.

엽전 한 닢씩 모아 반골을 기리는 불망비를 세웠다.

한광국불망비는 그렇게 세워졌다.  

 

 


 
영조시대 다대진 아전 한광국
어민들 천민 신분 벗도록 노력
결국 1763년 면천 허가 받아내
어민들 100년 뒤에 비석 세워

 

 



한광국은 다대진 아전이었다.

다대진은 다대포에 주둔했던 조선시대 해군부대.

정3품 첨사가 다스렸다.

한광국 활동 시기는 영조 연간.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조선을 다스렸던 '할아버지 영조'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병역 부담을 줄였으며 실학에 호의적이었다.

탐관 색출에 공이 큰 어사 박문수를 총애했다.

어진 군주였기에 포민을 면천해 달라는 한광국 호소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였다.

한광국불망비는 둘.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고마운 마음이 그만큼 컸다.

하나는 다대포 윤공단 경내에 있고 하나는 윤공단 맞은편 원불교 다대교당 뜰에 있다.

비석 제액과 세운 연도는 다음과 같다.

진리한광국구폐불망비(1861년), 절충한공광국구폐불망비(1908년).

진리(鎭吏)는 다대진 아전, 구폐는 폐단을 바로잡음, 절충은 정3품 무신 당상관.

하급관리인 아전을 정3품 절충으로 격상했으니 과장이 심하다.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 그랬다.



윤공단 경내 불망비 음기 요약이다.

다대문화연구회 한건 회장 번역을 따른다.

전문은 한 회장 저서'다대포 역사 이야기'에 나온다.

한광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수차례 상경하여 물일 하는 사람들을 면천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마침내 건륭 28년(영조39, 1763) 조정의 윤허를 얻어내었다.

다대진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사또 망배 폐단을 못하도록 했다.

아울러 모든 구폐를 혁파한다는 명을 받았다.

그 은덕을 생각하며 이 언덕에 비를 세운다.

 '이 언덕'은 한광국 묘소 앞 언덕으로 해송아파트 자리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지금 자리로 옮겼다.

 

 


원불교 다대교당 뜰에 있는 한광국불망비. 1908년 각지 어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불망비 핵심은 사또 망배 폐단.

무슨 말일까.

천민이던 다대포 포민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신정다례를 정월 초하루에 지내지 못했다.

 하루 전날인 섣달그믐에 지냈다.

초하루 새벽 고을 수령에게 절(망배)하는 풍습 탓이었다.

조상보다 먼저 사또에게 절할 수 없어 하루 전날 신정다례를 지냈다.


한광국은 분개했다.

신분 차별, 인간 차별에 분개한 한광국은 다대포에서 한양까지 그 먼 거리를

 '아픈 몸을 이끌고 수차례' 찾아 부당성을 진정했다.

다대진부터 구폐하라는 조정 윤허가 떨어지자 봇물 터지듯 전국 포민이 면천 혜택을 받았다.

천민임을 나타내는 짚 머리띠며 허리띠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신정다례를 섣달그믐에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음기 말미에 세운 연도가 나온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유년 8월이다.

부산의 비석에 곧잘 등장하는 글자가 숭정(崇禎)이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로 1628년에서 1644년까지다.

명나라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마당에 명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데서 조선의 우직한 의리를 읽을 수 있다.

숭정 후 네 번째 신유년은 1861년이다.

조정 윤허가 떨어진 지 100년 후다.

100년이 지나서도 변하지 않는 고마움의 징표가 한광국불망비다.


세운 연도 다음 세 글자가 시선을 끈다.

포민립.

포민이 세웠다는 뜻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석을 세웠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지못해 세웠을 공경대부 귀부이수 송덕비보다 하급관리 방부원수 한광국불망비가 더 있어 보이는 이유다.

원불교 불망비 세운 연도는 융희 2년(순종2, 1908). 연도 다음에 '각포민개립'이라 새겼다.

각지 포민 모두가 세웠다는 뜻이다.

불망비 건립에 다대포를 벗어나 내남없이 동참했음을 엿본다.


한국 역사에 민권운동은 숱하다.

동학혁명이며 잊을 만하면 일어났던 민란도 따지고 보면 민권운동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좌절했다.

호남에선 성공한 민권운동 선구자로 김이수를 꼽는다.

섬사람에게 부과되던 과다한 세금 등 폐단을 고치는데 기여했다.

임금 행차를 가로막고 읍소했으며 뜻을 이루었다.

1791년 정조 때였다.

그 역시 훌륭한 민권운동가였지만 시대는 한광국이 앞선다.

한국에서 성공한 민권운동 최초는 누가 뭐래도 한광국이다.

 한국 최초로 성공한 민권운동가 한광국!

그를 기리는 비석이 다대포에 두 기나 있다.

한국 민권운동의 산실, 거기가 다대포고 우리 사는 부산이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