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단 선정비' 다대포 역사 담긴 비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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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공단 경내 선정비들. 선정비 가운데 가장 낮고 좁고 가는 비석이 한광국불망비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윤공단은 다대진 윤흥신 첨사를 기리는 제단.
윤 첨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과 맞서다 전사했다.
첨사를 기리는 제단과 비석은 윤공단 145계단을 다 밟아야 비로소 웅자를 드러낸다.
홍살문 지나 계단을 밟는 한 발짝 한 발짝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길.
죽음을 피하지 않아 영생을 얻은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윤흥신 첨사 기리는 제단에
길가 있던 비석 14기 옮겨와
영생으로 가는 길은 멀고 고달프기 마련.
쉬면서 가라고 몇 십 발짝 계단 오른편에 쉼터가 나온다.
쉼터 너머로는 꽤 많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원래는 사람 통행이 잦은 큰길가 세웠던 걸 1970년대 이후 도로확장 등으로 여기 이전했다고 안내판은 밝힌다.
1970년 윤공단이 조성되면서 그 이후 경내로 이전됐다는 말이다.
비석은 열네 기.
죄 선정비다.
첨사비가 다섯 기고 첨사가 겸직했던 겸감목관비가 세 기다.
조선시대 다대진에는 국가가 관리하던 말 목장이 있었다.
괴정 목마장도 다대진 산하였다. 목장 감독관을 첨사가 겸하기도 했다.
다대진 목장은 영도로 옮겼다가 송도로 옮겼다.
그 전통이 이어져 송도에 동물검역소인 혈청소가 있었고 지금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이 들어섰다.
선정비 가운데 최고 높은 관직은 병조판서.
병술년(1886) 가을 세운 것으로 비문에
'다시금 진영을 혁신하였네. 군사와 주민들 모두 소생하였네'라는 구절이 있다.
무슨 말인가.
조선의 관문 영도가 군사적으로 중요해지면서 1881년 절영도진이 들어서고 다대진은 1883년 폐진된다.
그러다 다대진도 중요하다는 조정 여론이 일어 1885년 복진되어 다대포는 이전 활기를 되찾는다.
당시 군 최고 실권자였던 병조판서 민응식을 기리는 선정비 문구 배경이다.
가는 길.
시내버스 2, 11, 96, 338, 1000번을 타고 다대푸르지오아파트 하차.
맞은편에 다대초등학교가 있다.
동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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