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백낙주' 비문 족자
요산도 칭송했던 독립투사, 지금은 비석조차 훼손된 채 방치
▲ 1967년 5월 20일 백낙주 의사 비석 제막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 사진. 가운데가 백 의사 3남 백삼욱 선생이다. 대연동 못골 뒷산에 세웠던 비석은 현재 매장된 상태다. 백낙주 의사 유족 제공 |
"이 족자를 기증하려고 왔습니다."
지난달 초순 초로에 접어든 부부가 금정구 남산동 요산문학관을 찾았다.
나여경 사무국장이 건네받은 폭 50㎝ 족자는 둘둘 말려 두툼했다.
붓글씨가 달필인 한지를 표구한 족자 제목은 '고(故)세창백낙주선생비문'이었다.
'이걸 왜 요산문학관에 기증하지?'
의문은 3m나 되는 족자를 다 풀고서야 풀렸다.
족자 끝자락에 비문을 쓴 이가 요산 김정한 선생이었다.
비문을 쓴 날자는 1966년 5월 11일. 일제강점기 절필을 선언한 요산 선생이
단편 '모래톱이야기' 발표로 활동을 재개하던 무렵이었다.
요산은 꼭 써야 할 글 말고는 가능하면 쓰지 않았다.
더욱이 저명인사 자화자찬 비문 청탁은 단호하게 고사했다.
요산이 비문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족자는 관심을 끌었다.
어쩌면 이 세상 하나뿐일지도 모를 요산 비문이었다.
비문의 주인공이 어떤 생애를 살았기에 그 깐깐하던 요산이 비문을 다 썼을까.
항일운동 이름 날린 백낙주 선생, 타계 후 부산서 사회장
1967년 겁립한 묘비에 요산 김정한 선생이 비문 작성
현재 아파트 단지 인근 흙더미에 묻혀 흔적 찾기 어려워
'일월은 자연의 등불이요 지조와 유덕은 인간의 광명인저.'
비문의 주인공은 족자 제목에 나온다.
백낙주다.
세창은 호다.
세창 백낙주를 기리는 비문은 첫 구절부터 영탄조다.
일월과 지조, 유덕으로 비문의 주인공을 칭송한다.
비문 중반에 주인공 생애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평북 정주 출신으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만주로 망명해 항일구국운동을 펼쳤다.
만주 봉천에서 다섯 명에 불과한 결사대를 이끌어 일본총영사와 친일집단 보민회장 등 30여 명을 사살했다.
이후 체포돼 17년간 옥고를 치르다 광복되면서 풀려났다.
비문 주인공 백낙주 의사는 1888년 12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65년 12월 동구 범일동 자택에서 영면했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조선독립단에 가입했다.
군자금 모집과 지방단 조직, 왜적 토벌에 종사했다.
1921년 보민회 조직강화 순회강연에 나선 일본총영사 일행과 전투를 치러 열세임에도 전원 사살하고 30여만 원과 총기류, 시계, 가방 등을 노획했다.
이때부터 백호대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를 도모한 김구 현상금 20만 원이 지금 돈으로 20억 원인 걸 감안하면
백 의사 30여만 원은 조선독립군 생명줄과 같은 거금이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이 쓴 독립투사 백낙주 의사 비문을 옮긴 족자. 요산문학관 제공 |
군자금 확보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1926년 일행 셋과 국내로 잠입해 의주 정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기도 했다.
1927년 일본 관헌과 변절자에 대비해 몽골로 잠시 피신했다.
1928년 만주 경흥 무순 출장 중 변절자 공성환의 밀고로 같은 해 5월 허벅지 대퇴부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12월 만주 봉천에서 신의주로 압송돼 1심에서 사형, 2심과 3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마포와 서대문,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되면서 출옥했다.
출옥 즉시 백 의사는 고향 정주로 간다.
1945년 8월 24일 서울역에서 고향으로 가는 북행열차를 탄다.
고향에는 지아비 행방을 대라며 고문을 당해 '팔 병신'이 된 부인과 세 아들이 있었다.
거기서 경찰서장으로 있다가'젊은 김일성' 우상화가 노골화되자
사상범을 죄다 풀어주고 1948년 4월 단신 월남해 부산 범일동에 정착한다.
아버지 뒤를 이어 단신 월남한 셋째아들 삼욱과 동거한다.
광복동지회와 3·1동지회 부산지회장을 지낸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된다.
1965년 12월 영면한다.
향년 78세였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렀다.
1966년 총무처 차관 주재 제3회 회의 안건에 '백낙주옹 사회장 보조비를 일반회계 예비비 지출' 항목은
백 의사 사회장이 국가 주도였다는 걸 의미한다.
1959년 타계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사회장 이후 부산에선 처음 거행된 국가 차원 사회장이었다.
김현옥 부산시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았고 정일권 이효상 김종필 박순천 윤보선 제씨가 이름을 올렸다.
영결식은 1966년 1월 10일 중구 남일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렸다.
봉안소는 중앙동 옛 시청 앞 시공보관이었다.
대연동 못골 뒷산 언덕에 안장했다.
선영으로 쓰려고 사둔 언덕이었다.
요산 비문 묘비는 1967년 5월 20일 제막식을 가졌다.
유해는 1975년 8월 8일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묘비는 현재 땅에 반쯤 묻힌 상태다.
국립묘지로 이장되자 유족은 묘비와 제단을 땅에 묻고 1천여 평 묘역을 광복회에 기증했다.
조립식 가옥 40여 채 광복촌이 조성돼 어렵게 사는 애국지사와 유족을 돌봤다.
그러다 아파트 붐이 일면서 1990년 전후 개발업자에게 팔렸다.
대연그린아파트와 동남아파트가 그 자리다.
백 의사 묘터는 아파트 옹벽으로 절반쯤 잘렸고 흙이 씻기면서 비석은 절반쯤 드러난 상태다.
광복70주년 풍악소리 떠들썩했던 우리 사회 민낯이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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