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영도 '송덕비'들

금산금산 2016. 2. 2. 21:06

영도 송덕비들

 

 

 

 

 

조선시대 해군부대와 국영 말목장 있던 영도 역사의 기록

 

 

 

 

 

▲ 영도에 주둔했던 조선 수군부대 절영도진과 관련된 영도 송덕비들. 영도여고 뒷길에 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영도 옛 이름은 절영도다.

여기에서 기른 말은 그림자가 끊길 정도로 빠르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지명 유래에서 짐작되듯 영도는 말 목장이었다.

조선시대 목장은 국영이었다.

국가가 관리하는 목장이 각 도에 있었고 감목관 또는 겸목관을 두었다.

도내 군에는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이 배정됐다.

군마다 군두(郡頭) 1명, 군부(郡副) 2명, 목자(牧子) 4명이 사육을 담당했다.

물론 꼭 그대로 한 건 아니었다.

약간의 편차는 있었다.

절영도 국마장은 다대진에서 옮겨왔다.

다대진이 부산진과 함께 군사적으로 중요해지면서 목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절영도에서 키운 말은 부산진과 다대진 군마로 보급되었다.

시간이 지나 절영도 목장 또한 송도 모지포로 옮겨야 했다.

다대진에서 옮겨온 마찬가지 이유였다.

정책 무게추가 남방에 실리면서 절영도의 군사적 비중이 높아졌다.

1881년 조선의 관문 영도에 절영도진으로 불리는 해군부대가 들어섰다.

 

 



1881년 영도에 해군부대 창설
1895년 폐진까지 부대장 13명
3명의 송덕비 현재까지 전해져

세금 줄이고 성곽 정비 칭송
폐진 위기서 구해낸 공도 기려

부대 창설 전 영도엔 국영 목장
주민 땅 목장터로 변경 등 폐해
목장 옮기자 '축마비' 세워 환영

 

 



해군부대가 들어선 직접적 요인은 일본이었다.

1876년 부산항이 개항되자 일본은 부산에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일본 해군 저탄창고 명목으로 1885년 청학동을 조차하였다.

처음에는 저탄창고 비축 석탄을 대마도에서 가져왔다.

대마도 운송보다는 현지 조달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본은 영도 산림 벌채허가를 청원하였다.

경상감사 윤자승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절영도는 조선의 관문이니 벌채 허가 대신 군부대 주둔 필요성을 역설했고 그대로 되었다.


절영도진 부대장은 첨사였다.

종3품 무관이 맡았다.

청일전쟁이 일본 승리로 끝나고 일본 주도로 군제가 바뀌면서 1895년 8월 폐진할 때까지 13명이 재임했다.

절영도진 첨사 재임기간은 평균 1년이었다.

서너 달 재임한 첨사도 있었다.


초대 첨사는 이정필이었다.

1881년 5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재임했다.

진남포 부사로 영전했다.

마지막 첨사는 박기종이었다.

1894년 8월부터 꼬박 1년 재임했다.

박기종은 근대 부산을 대표하는 풍운아다.

생애는 대학노트 한 권을 다 써도 모자란다.


영도 송덕비셋.

둘은 첨사 송덕비고 하나는 경상감사 송덕비다.

있는 곳은 영도여고 뒷길 마을버스 정류소 근방이다.

원래는 첨사영 소재지 영도 동삼동 중리 마을 안에 네 기가 있었다.

동삼동 동삼은 영도 동쪽에 있는 세 마을.

상리 중리 하리다.

주변 환경이 변하면서 2001년 10월 중리 바닷가로 이전하였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한 기가 유실되자 안전한 곳을 찾아 2003년 10월 이리로 옮겼다.

유실된 비석은 '겸감목관 임익준 청덕선정비'다.


임익준은 절영도진 3대 첨사다.

1883년 8월부터 꼬박 1년 재임했다.

세금을 줄이거나 면제했고 식량을 베풀었다.

양반 동네 서울 필동 사람으로 영도 봉래산 산 이름을 그가 지었다.

영선동 신선동 봉래동 청학동 작명도 그가 했다.

임 첨사 송덕비가 두 기였던 덕분에 하나는 유실돼도 하나는 남아 임 첨사를 기린다.

남은 비석 제액은 '행첨사임공익준영세불망비'. 을유년(1885) 3월 세웠다.

수영구 민락동 백산에도 송덕비가 있다.

절영도진 3대 첨사 임익준 송덕비. 영도 곳곳의 지명을 그가 지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신응균은 7대 첨사다.

서울 출신이며 그 역시 꼬박 1년을 있었다.

1886년 3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재임했다.

신 첨사 송덕비는 무자년(1888) 11월 군졸이 세웠다.

제액은 '행첨사신공응균영세불망비'다.

제액 양옆 도진승부(島鎭陞復)로 시작하는 4언시는 절영도진이 다시 승격되면서

부임한 신 첨사가 담장이며 성곽을 잘 정비해 고맙다는 내용이다.


나머지 한 기는 관찰사 이호준을 기린다.

1888년 9월 세웠다.

절영도진을 다시 승격시킨 공을 기린다.

절영도진은 폐진되기 이전 강등된 적이 있었다.

1883년 폐진된 다대진이 1885년 복진되면서 절영도진 위세가 떨어진 것.

절영도진 첨사 직함 또한 감하(減下)돼 정4품 좌수영 우후가 맡기도 했다.

우후는 부대 지휘관의 참모장쯤 된다.



경상감사인 이호준 관찰사가 장계를 올린 건 1887년 8월 15일.

절영도는 나라를 방어하는 요충지라고 강변했고 예전대로 복진된다.

복진되면서 사람이 늘어났고 사는 형편이 나아졌다.

이호준 송덕비 건립에 담긴 숨은 이야기다.


목장은 비리와 원성의 온상이었다.

주민 입장에선 몰아내야 할 기피시설 1호였다.

목장 말은 나라 것.

농작물을 짓밟는다든지 피해를 입혀도 벙어리 냉가슴이었다.

말을 다치게 하거나 병들게 하면 장형 70대, 죽이면 80대와 변상이었다.

비리와 횡포마저 극심해 원성이 자자했다.

임자가 있는 멀쩡한 땅을 목장 공한지로 속여 비일비재 가로챘다.

괴정에선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죽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오죽했으면 목장 옮긴 걸 기념하는 축마비(逐馬碑)가 곳곳에 세워졌을까. 멀

리서 보면 아름다웠을 풍광이 그 안은 썩고 곪았다.

옛 일만도 아니고 남 일만도 아니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관직보다 품계 높을 때 관직 앞에 '행(行)'으로 표기

 

 

송덕비에 새겨진 '행' 의미

 

 

 

▲ 관직 앞에 행(行)을 새긴 비석. 품계보다 낮은 관직일 때 행을 붙였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영도여고 첨사 송덕비는 행(行)으로 시작한다.

행첨사임익준이고 행첨사신응균이다.

행은 영도뿐 아니라 전국 각지 비석에 곧잘 등장한다.

임금이 신하에게 벼슬을 하사하는 교지에도 보인다.

행은 뭘까.

무슨 의미일까.
 


조선은 위계사회였다.

다른 시대도 그랬지만 조선은 더 따졌다.

사회 질서를 이루는 근간이 위계였다.

관직과 품계가 위계사회를 이끌었다.

관직은 정부 직제에 따른 직책이었고 품계는 계급이었다. 


관직은 뭐고 품계는 뭔가.

비유를 들자.

군에선 통상 중대장을 대위가 맡는다.

중대장은 관직이고 대위는 품계다.

대개는 품계에 맞는 관직을 맡는다.

중령은 대대장, 중위나 소위는 소대장 하는 식이다.


조선시대에도 관직과 품계는 맞아떨어졌다.

정3품 품계는 그에 해당하는 관직인 도승지나 대사간, 병마절제사 등을 맡았다.

그러다 차질이 생겼다.

벼슬자리는 그대로인데 사람이 넘쳤다.

벼슬을 주려고 해도 맞는 자리가 없었다.

한 단계, 또는 두 단계 이상 품계를 낮춰 관직을 줘야 했다.

그럴 경우 관직 앞에 행을 붙였다.

당사자도 행을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일종의 과시였다.

비석에 행자를 넣은 이유다.

품계보다 낮은 관직을 행직(行職)이라 했다.


행직 반대도 있었다.

품계보다 높은 관직을 맡는 경우였다.

정란 같은 정치사건에 공을 세웠거나 역량이 뛰어난 경우가 여기에 해당했다.

행 대신 수(守)를 붙였고 수직(守職)이라 했다.

대위가 소대장을 맡으면 행직이고 대대장을 맡으면 수직,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수직을 밝히면 낮은 품계를 까발리는 것.

그래서 수가 들어간 비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행수법은 행직과 수직을 아우른 인사법규였다.

품계와 무관하게 임명해 인사 적체를 해소하고 하급관리 사기를 높였다.

문제점은 있었다.

위계질서가 깨졌고 신분사회가 흔들렸다.

그럼에도 행수법은 우리 시대 곱씹을 만하다.

'앗, 뜨거워라!'

 공직사회가 정신 번쩍 차릴 불침이 될 수도 있겠다.

 


동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