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박물관 '약조제찰비'
잘나가던 조선이 남긴 역사의 죽비소리… "늘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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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박물관 비석거리에 있는 약조제찰비. 조선통신사와 대마도주가 맺은 다섯 가지 금지사항을 새긴 비석으로 국제무역항 부산의 위상을 보여준다. 1683년 세웠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무역항이다.
부산에 외국 무역선이 드나든 것은 강화도조약으로 3포가 개항한 1876년으로 알고들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세종 때 이미 조선과 대마도 왕래 무역선 수와 무역량을 제한하는 약조를 맺었다.
그때가 1443년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무역이 단절됐다가 1607년 수정동에 일본인 거류지 왜관이 들어서고
1609년 국교를 맺으면서 부산항은 다시 열린다.
다시 열린 부산항에 대마도 무역선이 입항한 건 1611년 9월.
그때부터 잡아도 부산항 역사는 500년이 훌쩍 넘는다.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는 500년 훌쩍 넘는 국제무역항 부산의 위상을 보여준다.
호사다마였다.
좋은 일에는 마가 끼게 마련이었다.
위상이 높아지자 탈법과 불법이 늘어났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지켜야 할 것을 약정하고 이를 어기면 엄히 다스리겠다는 경고가 필요했다.
그 경고가 약조제찰비였다.
제찰은 제도로 금한 문서나 게시. 약조제찰비는 조선과 왜가 제찰 엄수를 약조하고
이를 돌에 새겨 천명한 포고문이었다.
1683년 8월 세운 포고문
조선-왜 간 5개 금지사항 새겨
밀거래·위조 동전 유통 등
왜인 범죄에 단죄 의지 담아
당시 조선의 위상 보여주는 유물
이후 역사 볼 땐 엄중한 경고문
금지사항은 모두 다섯 가지.
'부산금석문'에 원문과 해석이 실려 있다.
간추리면 이렇다.
왜관 경계선 바깥에 함부로 나오지 말라,
왜인에게 돈 빌리지 말라,
밀매매하지 말라,
조선 관리는 왜인 때리지 말라,
범죄를 저지른 조선인과 왜인은 모두 왜관 문 바깥에서 형을 집행하라.
비음에 제찰비 건립 연도가 나온다.
계해(1683년) 8월이다.
의문이 생긴다.
어떤 폐단이 어느 정도였기에 제찰비까지 세웠을까.
근본적 이유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였다.
수급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조선에 의존하던 생필품이 태반이던 왜는 원하는 게 늘 넘쳤다.
반면 조선은 선을 그었다.
원하는 것 다 들어주면 한도 끝도 없겠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밀무역이 싹텄고 부정과 비리가 가지를 쳤다.
예를 들면 이렇다.
동래부사 어진익이 1675년 11월 조정에 올린 장계를 보면
왜가 요구한 물품은 녹두가루 300근, 붉은 개가죽 100령, 마른 대구 1천 속 등이었다.
반면 조선이 허가한 양은 녹두 200근, 붉은 개가죽 50령, 마른 대구 500속 등이었다.
부족한 양을 채우는 한 방편이 밀거래였다.
이런 예도 있다.
1676년 8월 일이다.
왜가 무역하기를 요구한 건 호두 100섬, 잣 30섬, 마른 대구 300속, 대추 10섬이었다.
통역관 등이 타일러 마른 대구는 100속을 줄였고 호두와 잣, 대추는 절반으로 하였다.
그래도 수량이 과다해 호두는 30섬으로, 잣은 10섬으로 줄여 무역을 허락했다.
조시(朝市)와 개시(開市) 폐단도 컸다.
왜관에선 매일 아침 시장(조시)이 섰고 한 달 여섯 차례 오일장(개시)이 섰다.
아침 시장 조시는 수문 밖에서 열렸다.
일본인에게 생선과 과일, 채소 따위를 팔았다.
조시에선 조선인 남녀노소 누구나 장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왜관이 남자의 세계란 것.
어리고 예쁜 여자 물건이 잘 팔렸다.
남정네가 내다 파는 물건은 찬밥신세였다.
나중엔 아낙 장사치만 드나들었다.
동래부사 권이진은 어채(魚菜)를 파는 게 아니라 여자를 판다고 한탄했다.
개시에선 1678년 통용된 상평통보를 본뜬 위조 동전이 유통되었고 허가받지 않은 잡인이 시장을 드나들었다.
나라의 비밀이 팔리기도 했다.
제찰비를 세운 1683년에는 왜관이 용두산 일대 있었다.
1678년 수정동에서 옮겨왔다.
수정동 왜관이 좁고 방파제가 부실하다며 왜가 밤낮으로 떼쓰는 바람에 옮겨 주었다.
제찰비는 용두산 왜관에 세웠다.
한문과 일본어 각 한 기였다.
한문 제찰비는 출입문 격인 수문(守門) 안에 세웠고 일본어 제찰비는 왜관 경계선에 세웠다.
수문은 어딜까.
부산시와 부산대가 공동 발간한 '부산고지도' 책자에 답이 있다.
거기 실린 '왜관도'에 수문 형상과 위치가 또렷하게 나온다.
왜관도는 채색 그림지도로 1783년 부산 화가 변박 작품이다.
왜관 바닷가에 수문이 있고 문을 나서면 왜관 돌담을 따라 해안길이 기다랗게 이어진다.
부산민학회 주경업 회장 저서 '부산학, 길 위에서 만나다 2'에도 수문이 언급된다.
'왜관 둘레에 6자 정도 높이로 담(석축)을 쌓고 일상용의 출입문 수문과 정례의식 출입문인 연석문, 그리고 사망한 왜인을 대마도로 보낼 때 사용하는 부정문(不淨門, 水門, 無常門)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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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화가 변박이 1783년 그린 '왜관도' 일부. 오른쪽 중간쯤에 수문(동그라미 안)이 보인다. '부산고지도' 227쪽 |
왜관도에는 감시초소 격인 복병(伏兵)이 보인다.
왜관 바깥 동·서·남 세 방향에 각각 두 군데 있고 북쪽 복병은 왜관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금 복병산 자리에
한 군데 있다.
남일(南一) 복병, 동이(東二) 복병, 북(北) 복병 하는 식이다.
중구 대청동 광일초등학교 전신인 남일초등 교명 유래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제찰비를 세운 근거는 계해제찰이다.
1683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과 대마도주가 다섯 금제조항을 맺은 조약이 계해제찰이다.
국제무역과 관련한 조약은 몇 가지 더 있다.
세종 때 맺은 계해조약(1443)이 있고 일본 재교역과 조선통신사 출범을 알리는 기유조약(1609)이 있다.
그리고 계해제찰(1683)이다.
어느 조약이든 칼자루는 조선이 쥐었다.
조선의 위상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역사는 참 어렵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리 가는가 싶으면 저리 가고 저리 가는가 싶으면 이리 간다.
잘 나가다가도 한순간 곤두박질친다.
조선의 위상이 높았던 때 세운 약조제찰비.
깨어 있지 않으면 어깻죽지를 내려칠 것만 같은 역사의 죽비가 약조제찰비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약조제찰비' 5항의 의미 "조선의 법으로 왜인을 다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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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역 '전객사별등록(1)' 표지. 부산시사편찬위에서 발간했다. 전객사는 외국 사신 접대 등을 맡았던 정부 부서다. |
'범죄를 저지른 조선인과 왜인은 모두 왜관 문 바깥에서 형을 집행하라.'
약조제찰비 다섯 번째 조항이다.
언뜻 보면 '문 바깥'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왜관 안에선 형을 집행하지 말란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방점은 '모두'에 있다.
조선인과 왜인이 공범인데도 왜관 책임자는 범왜(犯倭)를 이리 빼돌리고 저리 빼돌렸다.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조항이다.
전객사란 조직이 있었다.
조선 시대 예조에 속한 정부 부서다.
외국 사신 등의 접대를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연도별로 날짜별로 기록을 남겼다.
'전객사별등록'이 그것이다.
부산시사편찬위에서 부산사료총서로 발간하였다.
거기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제찰비를 세운 이후 기록이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유추는 가능하다.
1709년(숙종35) 5월과 6월, 7월 기록을 보자.
동래부사 권이진이 장계를 올렸고 조정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나온다.
이렇다.
초량 여인이 왜인과 간통했다.
간통인데도 왜인에겐 죄를 묻지 못했다.
죄상을 묻는 예조의 서계 접수를 왜관은 거부했다.
접수는커녕 제 나라 법을 칭탁하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유배 보낸다며 범인을 대마도로 빼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권이진은 탄식한다.
예조 서계 접수 거부는 범왜를 같은 법률로 적용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죄인을 대마도로 보내어 치죄한다는 건 믿을 수 없다.
이는 조선 조정이 모욕받는 것이다.
마을 여인을 속여서 간통한 죄인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훗날 폐단을 금단할 수 없다.
조정은 주먹을 불끈 쥔다.
범왜를 조선인과 동률로 적용하라.
왜의 간사하고 방종한 버릇을 막아라.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섬나라 일본.
인성은 바뀌기 어렵고 국민성은 더욱 바뀌기 어렵다.
동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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