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금산금산 2016. 2. 17. 21:18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구한말 대일 외교 관문이었던 부산의 위상 상징





▲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비각. 비석의 집인 비각이 특이하다. 전국에 몇 되지 않는 석조다. 귀하디귀한 석조 비각이라서 감고비는 우쭐대는 기색이 역력하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정식 명칭은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埋安感古碑)다. 유원은 '멀리 있는 것과 부드럽게 지낸다'는 뜻이다. 선생은 뜻이 여럿이다. 여기선 먼저 태어난 선조를 가리킨다. 각 관아 역대 관원의 성명과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선생안(安)이라 한다. 매안은 선조 신주나 물건을 묘소 앞에 묻는 걸 말한다. 감고는 오래 기억하는 것.
 
비석은 광무 10년 세웠다. 1906년이다. 광무는 고종 때 사용하던 연호다. 순종이 즉위하면서 융희로 바뀐다. 비석 터는 동구 초량동 개인주택 마당이었다. 건물을 지으면서 훼손 우려가 있자 2000년 9월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으로 옮겼다. 매안이라 한 만큼 문서나 물건이 땅에 묻혔는지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부산 초량 출신 북방 외교관 업적  
후손이 칭송 위해 1906년 세워  
건립에는 당시 대일 외교관 참여  

거북 대석에 학·구름 새긴 지붕돌  
국내 희귀한 석조 비각으로 보존 

유원각감고비는 비석 못지않게 비각이 특이하다. 지붕도 돌이고 기둥도 돌이다. 안내판은 '비각 전체가 석조로 조성된 것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고 한껏 치켜세운다.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려고 지은 집. 대개는 기와지붕과 나무기둥이다. 석조 비각은 대단히 귀하다. 경북 영천 유공영세불망비, 충남 금산 고경명선생비각 등 몇 정도다.  

고선생 비각은 1962년 세웠다. 정렬각이나 효자비각에 석조가 더러 있다. 귀하디귀한 석조 비각이라서 그런지 감고비는 은근히 우쭐대는 기색이다. 

우쭐댈 만도 하다. 비석을 받친 받침돌은 거북. 귀티가 난다. 거북 대석은 권력과 명성과 존경의 상징이니 왜 아니 우쭐되겠는가. 존경은 글쎄다. 권력, 명성과 달리 존경은 하늘의 무지개처럼 멀고 높으니. 거북목에 새긴 갈기 문양은 기품이 서렸다. 비석 지붕돌 개석에 새긴 학과 뭉게구름은 별유천지비인간이다. 학은 금방이라도 거북 등에 내려앉을 듯하다. 지금은 흐릿하지만 옮길 때만 해도 학의 입과 다리는 홍색, 깃털은 백·청색, 구름은 홍·청·백으로 채색돼 있었다 한다.

제액 양옆은 운문이 각자돼 있다. 여덟 구절 사언시다. 누누이 얘기하지만 제액은 비석 명칭이다. 비음에는 음기가 보인다. 산문 195자다. 비석을 건립한 내력과 목적을 밝힌다. 세운 사람과 글쓴이, 석공 이름을 함께 새겼다. 역시 누누이 얘기하지만 비음은 비석 뒷면, 음기는 비음에 새긴 글이다. 비석에 새긴 운문은 명(銘), 산문은 서(序)라 한다.  

음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라에서 사병산 아래 유원각을 설치하다.' 사병산은 네 병풍 산. 국경을 병풍처럼 두른 네 곳의 산이다. 군사조직이 있었던 국경도시 네 곳을 이른다. 함북 종성, 온성, 부령, 경흥이다. 유원각은 유원위(衛)를 말한다. 유원위는 행정과 군사를 도맡아 교린에 치중한 군사조직이었다.

유원각감고비는 조상 송덕비 일종이다. 수백 년 전 함북 유원위에 근무하면서 북방 교린을 도맡았던 선조의 음덕으로 자손들이 잘 되었으니 잊지 않겠다며 세운 불망비가 이 비석이다. 비석을 초량에 세운 건 교린에 종사했던 선조가 나고 자란 곳이 거기였기 때문이다. 비석에는 조상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글쓴이가 김건두라서 김 씨 성이라 짐작할 뿐이다.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조선시대 대일외교 창구였던 부산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징한다. 부산의 비석 가운데 유일하게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그럼에도 음기에는 여러 성씨가 등장한다. 김 씨뿐 아니라 박 씨도 보이고 정 씨, 이 씨도 보인다. 음기가 그 연유를 밝힌다. 선조의 옛 업적을 잊을 수 없어 '서로 함께 협의한 결과 여러 사람이 동의'하여 전각을 세웠기에 여러 성씨가 등장한다. 협의하고 동의한 사람들 성씨가 박 씨, 정 씨 등이다. 협의하고 동의한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부산에서 일본 교린을 담당하는 외교관이었다. 

이로써 감고비 건립 배경이 드러난다. 북방 교린에 종사했던 조상을 둔 집안과 일본 교린 징표가 필요했던 외교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세운 게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다. 그러므로 감고비는 조선시대 대일외교 창구였던 부산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상징한다. 안내판은 '(한일 교류의) 정치·사회·문화적 산물'이라고 평가한다.  

건립에 동의한 사람 가운데 최고위직은 박기종. 종2품 판리공사였다. 공사는 대사 아래 해당하는 외교관이다. 박기종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 문물을 접하면서 일본통이 되었다. 1839년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다대진과 절영도진 첨사, 부산항 경무관 등을 지냈으며 부산 최초 신식학교인 개성학교, 부산상공회의소 전신인 부산상무소를 세웠다. 철도왕으로도 불린다. 조선 곳곳 철로 부설에 나섰다. 1907년 타계했다.  

구포 토박이 윤상은은 박기종 넷째 사위다. 한국 근대경제 아이콘으로 여러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을 설립했고 학교 설립, 김해 맥도 개간,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이름 석 자를 남겼다. 1948년 대한민국 재무부 초대 전매국장을 지냈다.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 박사가 장남이고 애국지사 윤현진이 조카다. 윤현진은 안창호 이동휘 김구 김규식 여운형 신익희 이동녕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 핵심인물로 참여하다 29세로 순국했다. 장례는 상해 임정 국장으로 치렀다. 윤 지사 아버지는 부산시장 격인 동래부윤을 지낸 윤필은이다. 동래 동헌에 송덕비가 남아 있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전복채취 금지령 송덕비'부터 '동래부사 송덕비'까지

부산박물관 야외에 비석 14기



▲ 부산박물관 비석거리. 14기가 전시돼 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부산박물관은 부산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대표 박물관답게 건물 안과 바깥이 문화재로 넘친다. 비석거리는 건물 바깥 문화재의 향연이다. 거리 양옆으로 늘어선 비석들은 하나같이 귀하고 장하다. 길 걷듯 그냥 지나치면 몰라도 비석과 비석 안내판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지나노라면 하루해가 짧다.  
 
비석거리는 박물관 정문 안쪽 왼쪽에 있다. 전시된 것은 14기. 좌측에 5기, 우측에 9기다. 비석이 아닌 석각도 있고 비석머리만 있는 것도 있고 모조도 있다. 모조라 해서 실망할 건 없다. 진짜가 곁에 있으니. 진짜를 두고 모조가 있는 건 진짜 비석 글자가 해독 불능일 정도로 지워진 탓이다.
 
왼쪽 비석 시작은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 석조 비각이 사람 발길을 오래 붙잡는다. 부산의 비석 가운데 유일한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다. 다른 비석은 기껏해야 부산시지정 기념물이다. 그만큼 격이 높다. 다음은 열부 정려비, 동래 '인생문' 각석, 전복채취금지령 송덕비, 동래부사 유심 송덕비다. 유심 송덕비는 화려하고 웅장하다. 1740년 발간 동래부지는 동래부 7개면 모두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기록한다. 동래부사 직속상관인 경상감사로 승진한 덕분이리라. 고색창연한 인생문 각석은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 때 인생문으로 빠져 나간 사람은 다 살았다 해서 '사람을 살린 문'으로 전해져 온다.

오른쪽 비석은 다음과 같다. 사처석교비, 호천석교비, 서문외석교비, 동래부사 송덕비, 약조제찰비, 척화비, 동래남문비 모형, 남문비 이수, 남문비 진품. 앞 세 비석은 하천에 돌다리를 놓은 것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사처는 동래읍을 가려면 건너야 하는 네 곳이지 싶고 호천은 범냇골, 서문외는 동래읍성 서문 바깥이다. 비석거리에는 중간 중간 벤치가 있다. 비석 보다가 벤치에서 쉬고 비석 보다가 쉬고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간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 달이 금방 가고 한평생이 금방 간다. 동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