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강선대' 비석
둑 무너질 때마다 다시 쌓은 선인들의 강단진 삶 오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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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대 정문. 금방이라도 신선이 내려올 듯한 현판 글씨가 일품이다. 강선대 안에는 당산이 있어 매년 제사를 지낸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강선대는 신선이나 선녀가 내린 곳.
목욕하며 쉬어 갔다는 전설이 따라다닌다.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탐하려 남정네가 오며가며 곁눈질하는 곳이기도 했다.
남정네 없는 곳이 없으니 방방곡곡 강선대 없는 곳이 없었다.
부산에는 사상구 덕포동에 있다.
도시철도 2호선 덕포역 1번과 3번 출구 사이 공원 같은 곳이 강선대다.
덕포 옛 이름은 덕개.
포구 순 우리말이 '개'다.
언뜻 보면 오늘날 쓰지 않는 사어 같다.
그러나 웬걸이다.
현대 와서도 흔히 쓰인다.
개펄 갯가 갯낚시 갯바위 등등이다.
포구 옛 이름은 현재 쓰는 한자 지명 한글 뜻에다 개를 붙이면 열에 아홉은 맞다.
부산진구 전포는 밭개, 거제 외포는 밖개 하는 식이다.
덕개는 언덕이 있는 포구.
덕포동주민센터 인근 바위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황포돛대 포구가 덕포였다.
송덕비 3·효자비 1기 전해져
조선 후기 사상·사하에 큰 비로
둑 복구에 인근서 수천 명 동원
공사 총괄 동래부사 공덕 칭송
전염병 걸린 아버지 구한 효자
단아한 비석 세워 효심 기려
덕포동 강선대는 지금도 바위가 일품이다.
장정보다 덩치 큰 풍채 좋은 바위가 방패인 듯 병풍인 듯 강선대를 에워싼다.
선녀는 저 뒤로 돌아가서 옷을 벗으리라.
욕망은 참을수록 얻는 게 많은 법.
바위 뒤를 들여다보려는 욕망 지그시 누르고 한 방향으로 가노라면 얻는 게 있으니
그게 조선시대 고풍스런 비석들이다.
강선대 비석은 넷.
셋은 송덕비고 하나는 효자비다.
송덕비 셋은 기리는 사람 다 달라도 비석 명칭은 다 같다.
모두 축제혜민비(築堤惠民碑)다.
둑을 쌓아 백성에게 혜택을 줬다는 뜻이다.
비를 세운 연도는 오래된 순으로 이렇다.
건륭53년(1788), 숭정기원후 4임진년(1832), 숭정기원후 4신축년(1841).
다대포 한광국 불망비에서도 언급했지만 숭정은 명나라 연호로 1628년에서 1644년까지.
1644년 이후 네 번째 임진년이 1832년이다.
4신축년도 마찬가지다.
강선대 송덕비는 둑을 쌓을 때마다 세운 비다.
길게는 50년, 짧게는 10년 터울이다.
사상과 사하는 낙동강 하류라 홍수 피해가 막심했다.
1788년 비석은 이 지역에 처음으로 둑을 쌓은 것을 기린다.
그 둑이 무너져 50년쯤 지날 무렵 다시 쌓았다.
1832년 비석은 그것을 기린다.
둑이 또 무너져 또 다시 쌓고 세운 비석이 1841년 비석이다.
송덕비들은 애초 덕포동 경부선 철로변 큰길에 있었다.
주민 손현재 선생과 주민대표들이 훼손을 우려하여 1971년 이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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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구 강선대 비석들. 홍수 피해가 막심했던 사상 지역에 둑을 쌓은 동래부사를 기리는 송덕비가 셋이고 아버지 목숨을 구한 효자비가 하나다. 우리보다 앞서 부산에 살았던 선조들의 강단진 삶을 증명하는 비석들이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둑 공사를 관장한 이는 동래부사.
송덕비 주인공도 그들이다.
이경일(1787. 2∼1788. 9)과 박제명(1831. 2∼1833. 6), 이명적(1839. 1∼1840. 6)이다.
괄호 안은 재임기간이다.
이경일 부사는 파직당했고 박제명 부사는 임기가 차서 바뀌었고 이명적은 사임했다.
이경일 부사 파직은 동일 사안을 두 번이나 조정에 들먹인 죄였다.
양식을 확보하고 운반하는 벼슬아치인 운량도감 폐해를 상소했다가 여의치 않자
국가 비상사태 대비 부서인 비변사 비국에 다시 들먹였다가 직에서 쫓겨나고 잡혀갔다.
세 비석은 뒷면에 한문이 가득하다.
할 말이 그만큼 많았다.
세 비석 음기를 시대 순으로 간추려 스토리텔링하면 다음과 같다. (전문은 '부산금석문' 참조.)
사상과 사하면은 홍수 피해가 심해 씨를 뿌려도 여의치 않고 인가가 물에 잠겨 지탱하기 어려웠다.
이경일 부사가 도임해선 그러한 민정을 살피고선 둑 쌓는 부역을 각 면에 하달하고 공사를 진행했다.
모라촌 뒤에 키(어릴 때 이불에 오줌 누면 뒤집어썼던) 모양으로 석축한 게 270발, 덕포리 큰 바위 일원에 350발 등 모두 4천520발에 이르렀다.
그때가 건륭53 무신년이었다.
10리 안 5천여 마지기 논 등이 혜택을 입었다.
무신년 제방이 갑술년(1814) 큰물로 무너졌다.
인근 고을에서 장정을 모았다.
기장 500명, 양산 700명, 김해 800명, 동래 6천800명이었다.
1832년 2월 12일 모라 뒤쪽 방축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무너진 곳은 메우고 헐린 곳은 돋우어 3월 16일
주례 사목포에서 공사를 마쳤다.
10여 리 7천 발의 둑이 바다를 막는 성처럼 우뚝 서서 바다는 밀려가고 땅이 다시 열렸다.
보리농사라도 짓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기해년(1839) 큰물로 10리 긴 둑이 또 무너졌다.
사면(沙面) 한 면이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이명적 부사가 도임한 다음해 봄 이웃 읍 장정 2천600명과 동래읍 5천 명을 동원하였다.
3월 초하루 공사를 시작하여 26일 끝내었다.
강자도(綱子島) 둑이 또 침몰해 새로 쌓았다.
둑이 우뚝 솟아 바다를 밀어 내니 그 피해가 없어졌다.
토막상식!
조선시대 동래를 중심으로 동쪽이면 동면, 서쪽이면 서면이었다.
면이 커지면서 각 면마다 상하를 두었다.
동상면 동하면, 서상면 서하면 등등이었다.
면이 더욱 커지면서 동래에서 유일하게 상중하로 나뉜 면이 있었으니 거기가 낙동강을 낀 사면이다.
사상면 사중면 사하면이었다.
효자비는 강선대 비석 맨 왼쪽에 있다.
낮고 낡은 방부원수(方趺圓首)지만 단아한 해자 제액에 기품이 넘친다.
제액은 '효자구주성지각.'
1740년 발간 동래부지 29조 효자효녀 항목에 언급된다.
전염병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목숨을 구하였다.
만력 경술년(1610)에 효행이 알려져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는 내용이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기리려고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강선대 비석은 강단진 삶의 유산이다.
둑을 쌓고 또 쌓아 큰물과 맞서던 강단진 삶이 여기 있고 제 손으로 제 몸에서 피를 내던 강단진 삶이 여기 있다. 우리보다 앞서 부산에 살면서 사상 사중 사하로 이어지는 낙동강의 번영을 일구었던 선인들의 강단진 삶,
그 증좌가 강선대 비석이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문화재 아닌 문화재' 사상 강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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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강선대 바위와 바위에 새긴 글씨들. 박정화 사진가 제공 |
강선대는 풍광이 빼어났다.
조선팔도 곳곳에 강선대가 있었다.
지금도 인터넷에 강선대를 검색하면 여러 지역에서 강선대가 뜬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인해 도심에 강선대가 남은 곳은 드물다.
한 지역에 강선대가 두 군데 있는 곳은 더욱 드물다.
그런 곳이 과연 있겠나 싶을 정도다.
대도시에 강선대가 두 군데 있다면 그 자체로 문화재급이다.
사상구 강선대는 그 자체로 문화재급이다.
상하로 나뉘어 강선대가 두 군데나 있다.
도시철도 덕포역 강선대를 상강선대라 하고 사상초등학교 뒤편 강선대를 하강선대라 한다.
강선대 일대는 지금은 차가 씽씽 달리는 도로이고 학교가 들어선 뭍이지만
낙동강 제방을 쌓기 이전에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주민들 생계 수단도 어업과 농업이었다.
옛 지명은 상리와 하리.
나이 지긋한 토박이들은 옛 지명을 즐겨 쓴다.
강선대마다 당산이 있어 각각 할배당산과 할매당산으로 불린다.
토박이 모임인 진선회(津船會) 주관으로 매년 제사를 지낸다.
강선대와 관련한 일화 하나.
사상구 주례동 좋은삼선병원 구정회 이사장은 대학 다닐 때 교내문학상에 단편소설이 당선된 문학청년이었다.
문화 마인드가 남달라 사상문화원 무보수 원장을 10년이나 맡았다.
원장으로 있으면서 팔소매 걷어붙이고 펼쳤던 사업 하나가 '강선대를 문화재로!'였다.
문화재급임에도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게 아쉬웠다.
대학에 타당성 용역을 맡기고 시에 탄원서를 냈다.
주민들은 문화원에 박수를 보냈다.
2%가 모자랐던지 문화재로 지정되진 못했지만
사상구 강선대는 주민들 마음속 문화재로 자리 잡아 영영세세 강선대가 되었다.
동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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