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수영 '의용단'비

금산금산 2016. 3. 8. 21:02

수영 '의용단'비





임란 7년간 倭의 간담 서늘케 한 조선의 레지스탕스 25인





▲ 수영사적공원 의용단 경내 1853년에 세운 '의용제인비'와 25인의 의용을 기리는 단비들. 박정화 사진가





레지스탕스'저항'이란 뜻이다.

점령군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행위를 일컫는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대한 프랑스 시민 저항운동이 대표적이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비정규 게릴라전이 장기였다.

점령군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기 때문이다.

군사시설 파괴, 보급품 차단, 고위층 암살, 정보 탐지 등 큰 공을 이뤘다.

독일 패전의 한 원인이 레지스탕스였다. 
 


조선에도 레지스탕스가 있었다.

조선 레지스탕스는 프랑스보다 350년이나 앞섰다.

1592년 섬나라 오랑캐 왜가 조선을 침략하고 7년간 점령하자 시민들 저항행위가 육지에서 바다에서 일어났다.

조선 레지스탕스는 적과 싸워 죽기도 하고 길에서 새 장수를 맞아들이기도 하며 왜군 간담을 서늘케 했다.

왜군 살육과 약탈에 고통 받던 백성에겐 등불이었다.

'왜군이 어디에서 어떻게 당했다더라.'

입소문이 꼬리를 물며 퍼졌고 내남없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래부사 부임한 이안눌  
25의용 전투 행적 등 조사  
'정방록'에 담아 충절 기려  
수영사적공원 경내 비석 우뚝  
"처음 세워진 단비는 묻고  
40여 년 전 새로 만들어"
 




수영 의용단비 제액은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다.

임진왜란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레지스탕스 대원을 조선에선 '의용'이라 칭했고 모두 25명이라서 '제인'이라 했다.

제액 글씨는 붉다.

의용 한 분 한 분 마음이 붉었다.

한 분 한 분 단심이었다.

높이는 160cm 정도. 비음 음기는 절도사 장인식이 썼다.

의용제인비를 세운 경위를 상세하게 밝힌다.

숭정 기원후 4계축 4월에 세웠다.

1853년(철종4)이다. 



의용제인비는 수영사적공원 의용단 경내에 모셔져 있다.

1853년 재실을 만들어 매년 봄(음력 1·2·3월) 가을(7·8·9월) 마지막 정일(丁日) 향사를 지내 왔다.

정일은 일진의 천간이 정으로 된 날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민들이 숭모회를 조직해 야간에 제향했다.

1977년 이후 수영민속보존회 주관으로 춘추 2회 제향했고 2006년부터 추계 향사만 모신다.

지난 11월 7일 제312회 25의용 연례제향을 봉행했다.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내렸고 의용단 단비도 흠뻑 젖었다.  



"오래된 비석은 경내에 묻었습니다."

의용제인비 양옆엔 작지만 단아한 비석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다.

모두 25기. 25의용 한 분 한 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처음 세웠던 25의용 비석은 오래돼 1960년대인가 1970년대 의용단 경내에 매안했고 지금 비석은

새로 세운 비석이란 게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김채우 회장 증언이다.

김 회장은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2호 수영농청놀이 보유자 후보다.



25의용은 왜란 끝나고 한참 지난 후 알려졌다.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하고 나서다.

백성들 탄원서를 접한 이안눌 부사는 25인의 행적과 왜란 7년 동안 육지와 바다 전투 행적을 탐문하였다.

이때는 생존자가 몇 사람 있어 상세하게 조사되었을 것이라고 비문을 쓴 장인식 절도사는 유추한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 경상 좌수사도 이에 해당한다.

조사를 마친 이 부사는 25인 집집마다 대문에 의용 두 글자를 문패처럼 걸게 하였다.

그리고 전후 사정을 '정방록'에 담았다.




정방록은 1609년 발간됐다.

수영 25의용 인적사항과 행적을 정리한 책이다.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재임한 기간은 1608년 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4월 15일 새벽 집집마다 곡을 하니'

시작하는 '동래맹하유감'이란 자작시에도 나타나거니와 재임기간 내내 전쟁의 폐허를 복구하고

사회를 재건하며 민심을 다독였다.

의용 행적을 조사하여 포상하고 정방록에 충절을 기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25의용 충절은 수영의 자랑이었다.

향사는 면면히 이어졌고 관에서도 줄곧 관심을 기울였다.

동래 충렬사에도 위패를 모셨다.

오한원 동래부사(재임 1802년 6월∼1809년 2월)는 25의용 집안의 부역을 면제하고 글을 지어 표창하였다.

금정산성을 새로 쌓아 국난에 대비한 오 부사로선 25의용의 충절을 당대에 재조명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25의용 활약상을 담은 '정방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기록으로만 전한다.

왜에 대한 저항 기록이기에 일제강점기 멸실됐을 가능성이 높다.


"새긴다는 의미가 크죠."

수영구청 정임숙 문화예술계장은 수영 의용단의 의미를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의 교류에 둔다.

이전에 있었던 일이 이후에도 이어지는 것, 그 가교가 의용단이며 의용단 단비라고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는 일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보다 앞서 우리 지역에 살았던 선인들이 종이가 아닌 돌에다 글을 남겼을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돌에다 글을 남겨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자 했던 가치를 곰곰 되새겨 보는 것도 수영 의용단 단비가 갖는 의미다.

그 의미는 '산고해심 영세무체(山高海深 永世無替)'다.

높은 산 깊은 물처럼 영원토록 변함없다.

동길산·시인 dgs1116@hanmail.net




[무민사 뒤 선서바위]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리라' 25의용이 피로써 맹세한 곳




▲ 수영 무민사 사당. 사당 뒤 바위가 선서바위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부산 수영구 민락동 주택가엔 무민사란 사당이 있다.

무민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시호. 생전 백성을 내 자식처럼 여겨서 얻은 시호다.

최영 장군을 기리는 무민사 옆에는 나라를 수호한다는 뜻의 수호경로당이 있다.

사당 이름이 무민사고 경로당 이름이 수호라서 언뜻 들어도 군사적 느낌을 준다.

실제 군사적 의미가 있다.

무민사 뒤 바위가 진원이다.

바위는 한 칸짜리 황토방 크기라서 큼지막하다.

이름은 선서바위.

수영 25의용이 피로써 맹세한 곳이 이 바위다. 
 


25의용이 맹세한 내용이다.

수영 사적공원 25의용단 안내판에 나와 있다.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요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하여

산야로 달아날 것인가. 단 한 번의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리라.'

바위 상단에는 손가락 굵기 대나무가 촘촘히 자라고 있다.

25의용이 등짝에 차고 다녔을 화살처럼 파릇하고 날카롭다. 



25의용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뭉쳤다.

수군도 있었고 평범한 성민도 있었다.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변방의 군교였고 백성이었다.

좌수영 지휘관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난 것에 분개하였고 몸을 돌보지 않고 종군하였다.

25의용 한 분 한 분 이름을 돌에 새기듯 여기 적는다.

정인강 최송업 최수만 박지수 김팽량 박응복 심남 이은춘 정수원 박림 이수 신복

김옥계 이희복 최한연 최한손 최막내 최끝량 김달망 김덕봉 이실정 김허농 주난금

김종수 김진옥. 

동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