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따라 이야기 따라

[부산의 비석] 가야공원 '동래 부사비'

금산금산 2016. 3. 15. 21:30

가야공원 '동래부사비'






청빈한 사대부 닮은 비석 오롯이 서다






▲ 부산진구 가야공원 동래부사 송덕비. 왼쪽 비는 이 일대 밭과 들을 개간한 김선근 부사 공덕을 기렸고 오른쪽 비는 땅을 구획해 세금을 고르게 한 정인학의 부사 공덕을 기렸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가야공원은 부산진구 가야동에 있다.

엄광산 자락 유서 깊은 공원이다.

서씨가 일군 공원이라 해서 서씨공원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공원에는 달성 서씨 재실과 유허비가 당당하다.

유허비는 1557년부터 달성 서씨가 동래부 가야동에 세거를 이뤘다고 밝힌다.

달성 서씨 종산(宗山)이던 곳이 시민의 종산인 공원이 되었다.
 
가야공원 동래부사비는 둘이다.

둘 다 송덕비다.

하나는 이 일대 전원(田原:밭과 들)을 개간한 공덕을 기렸고 하나는 땅을 구획해 세금 고르게 한 공덕을 기렸다. 주인공은 각각 김선근정인학이다.

김 부사는 1880년 12월부터 1883년 5월까지 재임했고 정 부사는 1894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재임했다.

두 부사 모두 재임기간에 약간의 이견이 있으나 조선왕조 공문서인 고종실록 기록은 그렇다. 




달성 서씨 종산인 가야공원  
신흥사 빗돌 뒤에 자리 잡아  

왜적 침입 빈번한 동래에 온  
김선근·정인학 두 부사 기려  

앞면엔 선비다운 4언시 새겨  
은둔거사 같은 단정함 눈길
 




동래부사 임기는 900일이었다.

동래부사는 오늘날 부산시장에 해당하는 고위직.

다들 임기를 꾸역꾸역 채웠을 것 같지만 정반대다.

동래부사 256명 가운데 임기를 채운 부사는 20명 남짓에 불과했다.

 사망이나 파직, 나이가 차 그만두는 과만 등도 있었지만 대개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사직했다.

신병이나 집안 사정 따위를 사직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분은 명분일 뿐. 동래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고 섬나라 오랑캐가 코앞인 변경이었다.

탈도 많고 말도 많고 모기도 많은 곳에서 900일 임기를 꼬박 채우느니 이 핑계 저 핑계 귀경하거나 귀향했다. 




가야공원 동래부사 둘은 경우가 좀 달랐다.

김 부사는 파직 당했고 정 부사는 신병으로 사임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김 부사는 본인 의사와 무관한 사건으로 파직 당했으나 파직 한 달 전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어진 관리'로 인정받아 잉임(仍任 유임)됐던 모범 공직자였다.

정 부사가 사임 이유로 내세운 신병은 사실이었다.

조정 요직을 여러 차례 사임해야 할 만큼 병치레가 잦았다.

동래부사 자리도 대여섯 달 하다가 병이 무거워 내던져야 했다.




고종실록 1883년 5월 22일 기사다.

김 부사 파직 사유가 나온다.

'동래부에서 난민 수백 명이 이달 11일 갑자기 관청 뜰에 밀려들어 당상에 올라와 행패를 부렸다. 감옥 문을 깨고 죄인들을 놓아 주었으니 변괴와 관계되는 사건이다. 해당 부사 김선근을 우선 파출하였다.'

파출은 파직해 쫓아내는 것이다.

동래부 관청 뜰에 난민 수백 명은 왜 들이닥쳤을까.

한 해 전 임오군란이 일어난 걸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군란이 진정된 이후에도 민심은 흔들렸고 난민은 수시로 밀려들었다.




김 부사는 파직 당했어도 관운이 창창했다.

 파직 당한 그 해 9월 공조참판에 임명됐고 이어 중국 텐진 주재 대원(大員)으로 나갔다.

주진대원은 임오군란 이후 텐진에 주재했던 통상담당 외교관 수장이었다.

1884년 3월부터 1894년 6월까지 10년 3개월 동안 4명이 임명됐다.

첫 주진대원이 김선근이었다.

주진대원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김선근이 첫 주진대원으로 등용된 건 동래부사 경험이 컸다.

1876년 개항한 개항기 동래부사는 일본은 물론 외국과의 관계 설정, 곧 외교와 통상에 많은 공을 들였다.

외교와 통상 전문가가 김선근이었다.




정인학은 신병으로 사임했다.

중앙 요직에 있을 때도 병을 이유로 자주 사임했다.

고종실록에 일일이 열거된다.

대신에 장수했다.

1839년 태어나 1919년 사망했다.

그동안 사망 연대는 알려지지 않다가 '동래 정 씨 문익공파보' 권4 기록으로 밝혀졌다.

벼슬길은 마흔 무렵 들어섰지만 관운이 활짝 열렸다.

사헌부 대사헌과 병조와 형조·이조참판 등을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다.

동래부사 이후에도 중앙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런 데 이런 비석이 있네요."

가야공원 동래부사비는 꼭꼭 숨어 있다.

산의 비석을 망라한 책자에도 나오지 않고 부산시 디지털 백과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부산진구청 향토지에 간략하게 언급됐을 뿐이다.

길가에 있지만 모르고 가면 찾기가 쉽지 않다.

이경혜·이진정 두 아주머니는 친구.

나이는 예순에서 일흔 사이다.

비석 답사 길에 우연히 일행이 돼 30분 정도 함께 주민들에게 수소문하다가 마침내 발견하곤

"이런 데 이런 비석"이라며 반가워한다.

당감동 동평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성터가 원래 자리였으나

길거리에 나뒹굴던 것을 1950년대 중반 이리로 옮겼단 구술이 있다.




이런 데 이런 비석 가야공원 동래부사비.

가야공원 동래부사비는 어찌 보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은둔거사 같다.

꼭꼭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는 선비 같다.

선비답게 자세가 단정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선비 비석답게 앞면에 둘 다 4언시를 남겼다.

뒷면에는 세운 시기와 세운 사람을 새겼다.

세운 시기는 각각 계미(1883년) 3월과 을미(1895년) 7월이다.

가야공원 신흥사 표석 빗돌 바로 뒤에 있다.

시내버스 110-1번 차고지 근방이다. 

연재를 마친다.

연재를 마쳐도 부산의 비석은 영세불망 이어져 부산을 깊고 높고 넓고 두텁게 할 것이다.


-끝- 

동길산 시인 dgs1116@


"부모 같은 은혜 길이 전해지리라"


▲ 김선근 부사 비석 앞면. 4언시가 새겨져 있다.


가야공원 동래부사비는 처녀지 같은 비석이다.

부산진구청 향토지 말고는 공식문서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언급이 없으니 건립 배경이라든지 비문 해석 또한 전무하다.

선인들이 단단한 돌에 한 획 한 획 더디게 새겼을 때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었을 터.

괜히 불경을 저지른 기분이다.



비석 4언시를 번역해 싣는다.

현재로선 첫 번역이고 유일한 번역이다.

비석은 마모돼 어떤 글자는 판독조차 버겁다.

날이 갈수록 그럴 것이다.

더 마모되기 전에, 더 흐릿해지기 전에 선인들 깊은 뜻을 활자로 남긴다.

판독과 번역은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하강진 교수가 맡았다.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한 한문학자다.


'굶주린 자 구제하고 궁핍한 자 도와주어 우리 백성들을 살리셨네. 재해 입은 논밭은 탕감하고 지나친 징수를 고쳐 이곳 전원을 개간하게 하셨지. 은혜는 부모와 같아 혜택이 자손까지 미치니 장차 길이 전해짐을 이 조각돌은 말하리라.' 진기주핍 활아려원(賑飢乏 活我黎元) 탕재리람 벽차전원(蕩此釐濫 闢此田原) 은동부모 택급자손(恩同父母 澤及子孫) 전지영구 편석능언(傳之永久 片石能言) -김선근 송덕비 비문.

 

'재해 입은 논밭은 탕감하고 지나친 징수를 고쳐 진휼을 실시한 덕분에 삶이 온전해졌지. 시절 형편 따라 조세를 면해 주고 땅을 구획해 세금 고르게 하셨네. 은혜가 깊어 자식처럼 돌봐 주어 칭송이 자자한 어진 수령이시라. 이 조각돌에 새겼으니 생각건대 길이 전해지리라.' 탕재리람 설진뢰전(釐濫 設賑賴全) 수시급조 정지균전(隨時給租 井地均田) 은심자보 송자후현(恩深子保 頌滋侯賢) 명자편석 염구영전(銘玆片石 念久永傳) -정인학 송덕비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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